너에게17. 전치현상(5)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를테면 올해의 유행어라든지 좋아하는 동물이라든지, 이번에 치른 중간고사의 시험결과라든지(난 저번보다는 높게 나왔다!). 한심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슬비는 나의 말을 듣고 많이 웃어주었고 나도 슬비 덕에 많이 웃었다. 하지만 슬비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아마 슬비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내 이야기는 정말 따분하니까.
슬비와 헤어지고 나서 방에 돌아가 발표대회 원고에 필요한 자료를 모았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에 가장 깨달음이 많은 일을 떠올리고 정리해서 일본어로 적는 것, 그게 내 일이었다. 내 일상 중에서 뭘 쓰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동네 골목 음식점에서 먹은 오코노미야끼가 정말 맛있었던 걸 생각했다. 그 음식을 팔던 아주머니의 미소도 떠올렸다. 그 아름다웠던 미소를 주제로 해서 쓰면 훌륭한 연설문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오코노미야끼와 아주머니와 미소가 있던 그 동네 골목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쓰는 와중, 다시 슬비의 말들이 떠올랐다. 자신과의 조화, 전치현상. 전치현상과 자신과의 조화. 녀석들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용을 썼지만 난 그들을 막았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그들을 막는 손에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대강의 줄거리 가지를 정하고 끝마쳤다. 갓 물기를 짜낸 걸레가 의자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기지개를 폈다.
슬비의 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들끼리 서로 좋아서 나자빠지는 게 느껴진다. 나는 덮쳐오는 그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그들은 내 생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슬픔이 공명하듯 올라왔다.
조화. 두 개의 사념이 있을 때, 그것들이 서로를 더욱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 들뜨지 않은 것. 적당한 것.
조화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아직도 제 갈 길을 못 찾고 떠돌고 있는 ‘공부’라는 녀석이 생각났다. 그들은 내 속에서 길을 잃어버려 품속에서 울고 있던 애였다.
처음 녀석을 접했을 때 난 내 삶을 위해서 그를 들여왔다. 그를 소중한 것으로 만들고, 보살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비틀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점차 난 엄마를 위해서, 오빠를 위해서만 공부를 했지 나를 위해서 그를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방향이 다른 사랑을 먹고 자란 그가 길을 잃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한 가지 영상이 칠판에 떠올랐다. 그 영상은 또 다른 내 마음의 심상이었다. ‘전치현상’이 그 녀석의 이름이었다.
여러 개의 의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원형의 중심에 왕좌가 있었다. 각 의자에는 나의 사념들이 앉아있었고 왕좌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었다.
이상했다. 원래의 왕좌에는 누군가가 앉아있을 터였다. 그녀석이 있어줘야 내가 바르게 일을 할 수 있는데, 이러면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할 판이었다. 기능 정지란 것이었다.
갑자기 다른 의자에서 한 녀석이 나와서는 그 비어진 왕좌에 앉았다. ‘공부’라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손에 가시를 두른 채찍을 들고 있었고 어느 샌가 검은 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왕좌에 앉고 서는 채찍을 들어 보이며 공부는 씩- 웃었다. 독재정치였다. 그 때부터 그곳은 아니 그 공장은 잘 돌아가기 시작했고, 아무 문제없이 나를 움직였다. 몇 개의 사념이 채찍에 죽긴 했지만 공장이 돌아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기억났다.
나의 왕은, 아니 내 꿈은 내 스스로 죽여버렸다.
감았던 눈을 떴다.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헛웃음이 난다. 이게 무슨 꼴이냐,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았지만 다 가려지지 않았다.
난 오빠 놈의 목소리를 근 3년 동안 의지하며 살아왔다. 피 묻은 얼굴로 뱉어내는 공기 방울들을 되새기며 살아왔다. 아니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외국에 돈 벌러 간 엄마가 나에게 힘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나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빠가 힘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남은 건 우리 오빠 놈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러면 오빠 놈도 실망할게 분명하다. 누구보다 큰 꿈을 가졌던 대한건아의 동생이 의욕 없이, 꿈도 없이, 그저 하루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보면 뒷목 잡을 상황이다. 그 상냥한 오빠 놈이라도 나를 버리겠지.
‘미안, 너는 열심히 살아줘.’
오빠 놈은 이렇게 말했었다.
근데 난 그러지 못했다. 열심히 살아가기는 커녕 길을 잘못 들었다.
뺨을 타고 눈물이 내려왔다. 오빠, 역시 나는 안 되겠어. 나는 오빠만큼 바른 아이가 아냐. 오빠만큼 인생을 열심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렇게 긍지 높던 오빠의 의지를 이어나갈만한 그릇이 아냐.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삶’을 맡긴 거야. 왜 남긴 거야.
ㅡ 어허.
흠칫. 굵은 목소리가 내 마음 속에 울려 퍼졌다. 오빠의 목소리였다.
ㅡ 그러면 안 되지.
오빠, 날 데려가. 빨리. 여기에 1초도 있기 싫어.
ㅡ 아니야. 너는 살아가야 돼.
.....왜? 나는 여기 있기 싫어. 나는 오빠 있는 데로 가고 싶어. 더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 그러니 빨리 나를 데려가 줘.
ㅡ 너, 그래도 삼년이나 살았잖아.
오빠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ㅡ 그러면 넌 아마 더 살 수 있을 거야.
그 목소리가 내 마음을 감싸 안았다.
.. 정말 오빠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여?
ㅡ 괜찮아. 박선우는 박건우의 위대한 동생인 걸. 잘못된 것은 지금부터 고쳐나가면 되는 거야. 아직 네 꿈은 죽지 않았으니까.
오빠의 미소가 나에게 보이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ㅡ 힘내.
그 말을 끝으로 오빠는 사라졌다.
시간이 멈추었다 다시 돌아가고, 눈물도 멈췄다가 다시 흘러내렸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엉엉 울 수 있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한심함과 미움이 담긴 눈물을 쏟아내었다. 어린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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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지금 보이더가 말하고
있는 보라색 부분을 오빠라고 착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편이 더 행복하겠지요.(저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