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 - 전3권
김혜린 지음 / 길찾기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한국 순정 만화 사상 가장 좋은 종이로 나온 걸작에 축하를 보냅니다. 표지의 고급스러움과 더불어 사양 면에서는 정말 최상이더군요. 출판사의 성의가 느껴져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부분도 보이는 바, 그 부분을 말해볼까 합니다.

먼저 식자. 특히 나레이션 식자가 전문 만화출판사들과 비교해서 어설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래아 한글'에서 '고딕'체는 굉장히 안 예쁘죠. 반면 'HY고딕'이나 '휴먼고딕' 등은 짜임새 있는 모양을 갖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전문출판용 식자에도 수백 가지 다양한 고딕체가 있거든요. 향후에는 조금 더 벤치마킹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평과 자간도요.

그리고 인쇄 방식 말인데요... 일일이 사진 찍는 전통적인 아날로그 밀착 필름 방식에 비해 디지털화해서 CD로 담아두면 관리가 용이한 점도 있지만, 인쇄질의 측편에서 볼 때에는 섬세한 펜선과 많은 스크린톤이 이용된 이런 원고에는 디지털 작업이 그리 적합하지 않습니다. 디테일을 살리기 어렵거든요.

다년간 원고 작업도 해보고 출판도 해봤지만 디지털 스캔을 하면 특히 스크린톤 부분에 문제가 노정됩니다. 없는 잡티가 생기는 거죠. 실제로 흑백 그레이 스캔을 받아보면 선이나 점이 조밀하면 할수록 사이의 흰 공간이 흰색 아닌 회색으로 인식되는데 그것을 인쇄용 흑/백 1비트로 전환하면 이런 회색 부분은 뿌연 안개처럼 미세한 검은 점으로 표현됩니다. 인쇄의 메카 충무로에서 제일 큰 해상도의 드럼 스캐너로 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픽사나 ILM의 장비쯤 되면 다르려나...-_-;) 처음부터 1비트(라인아트) 방식으로 스캔해도 문제는 나타납니다. 실제로 '테르미도르'의 톤 인쇄에서 이런 안개 같은 점들이 자주 보입니다. 세월의 잡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잡티가 전체적으로 보였겠죠. '북해의 별'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 다른 옛날책 재출간본들에도 그런 잡티는 보이지 않고요.

이는 근본적으로 디지털 자체의 한계 때문입니다. 디지털 스캔은 대상을 한정된 픽셀수로, 그것도 크기가 정해진 픽셀로 읽어들이는 작업 방식입니다. 그림이 작으면 울퉁불퉁해질 수밖에 없지요. 원이 아주 작아서 픽셀 10개로 나타내야 한다면 그 원이 과연 동그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문제가 이 책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한 해상도인 아날로그 밀착 필름과 유한 해상도인 디지털 스캔 필름의 차이는 윤곽선 방식인 일러스트레이터와 픽셀 방식인 포토샵만큼이나 결과물의 매끈하기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얼른 보기에 많이 거슬리는 건 아니라 해도 찬찬히 보면 눈에 띌 정도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스크린톤뿐만 아니라 펜선도, 가늘고 곡선이 유려할수록 픽셀로 인한 문제(계단현상, 축소 시 일그러짐)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형이 작을수록 문제는 커집니다. 원고 사이즈에서 픽셀 100개짜리 원이라면 A5 단행본에서는 픽셀 10개로 나타내야 합니다. 매끈할 수가 없죠.

어차피 축소해서 낼 수밖에 없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 굳이 해상도가 떨어지는 디지털을 고집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아날로그 밀착 필름으로 작업하면 문제가 없거든요. 가령 대원의 '문고판 유리가면'의 경우, 판형은 작아도 없던 잡티가 생기거나 점이 찌그러져 보인다든가 하는 일은 없지요. 사진 방식은 디지털의 픽셀처럼 '기본단위'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축소해도 매끄럽습니다. 물론 뿌연 안개잡티 문제도 없고요. (보통 단행본의 인쇄가 안 좋은 건 인쇄소에서 성의없게 찍은 탓이지 필름 문제가 아닙니다)

'로보트 킹'이나 '별빛속에' 5,6권처럼 오리지널 원고를 분실해서 인쇄본을 스캔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니, 기왕 복간에 나서서 그것도 비싼 값에 책을 내놓을 바에는 더 나은 인쇄질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더 잘 하려는 마음에 첨단 디지털 방식을 도입하신 것 같은데, 전통 방식이 어울리는 원고도 있다는 것을 부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만화 출판사에서는 일상적으로 하는 방식이고, 게다가 더 저렴하잖아요?

앞으로도 좋은 책 좋은 사양으로 계속 내 주시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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