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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독소전쟁에 대한 내 최초의 독서는 13년 전 읽은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에 나왔던 짤막한 단락들이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 박물관에서 그림들을 일일이 져날랐던 어느 여성의 이야기라든가, 그런 전쟁 때는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아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든가, 평생 나비에 미쳐 주위의 놀림을 받았던 과학자의 색채미학 연구가 전쟁 때 위장기술에 응용되어 많은 건물들이 폭격에서 구원받았다든가 하는 이야기 등. 어린 나는 그 전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기회가 닿지 않은 채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즈음하여 많은 전쟁 서적이 쏟아져나왔다. 그 중 어느 한 주, 모든 신문의 독서 섹션을 점령한 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13년간 간직되어 왔던 오랜 기억을 떠올렸고, 어떤 운명적인 감흥마저 느끼며 이 책을 꺼내들었다.
이 책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으로 숱하게 접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대전의 분수령인줄만 알고 있었던, 냉전 하에 교육받은 평범한 나 같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진실을 보여주는 책이면서 동시에 그런 상식적인 지식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독재자 스탈린의 추한 모습을 가감없이 그대로 그려내는 객관적인 시각도 마음에 들었다. (뭐, 혹자는 그래도 소련을 미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승리한 전쟁에 대해 언급하다 보니 확실히 소련에 후한 점수를 준 측면은 있다)
가장 마음에 든 대목을 고르라면 '이것은 위대한 투르게네프의 것이오'라는 말에, 목숨이 달린 피난길에서도 순순히 길을 터준 러시아의 평범한 민중들의 모습을 꼽고 싶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구절이었던 역자 후기의 한 러시아 청년의 말 '전쟁은 사람이 하는 건데!' 라는 말과도 어느 의미에서 하나로 통하는 대목이랄까. 굳이 노동가치설까지 들먹일 건 없더라도, 결국 위대한 것은 사람이라는 잔잔한 깨달음을 주는 책이었다.
역사에 관심은 있지만 어려운 책에 부담을 가지는 일반 독자들에게 2차대전 입문서로서도 훌륭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