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 세트 - 전4권 (양장)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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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심장을 붙들고 긴장감을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조율하는 글솜씨에 있어서, 당금의 젊은 작가들 중에 이영도만한 재주꾼은 드물 것이다. 특히 온라인 연재 중일 땐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른바 '하이텔 좀비 군단' 속에 섞여 '지금쯤 올라올 시간이 됐는데...' 하며 연재란을 배회하는 것이 일이었다. 특히 전쟁 묘사에 탁월한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이번만 해도 악타그라쥬 전투씬은 어떻게 그런 발상의 전환을 이루었을까 하고 작가의 머리속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연재가 끝나고 몇달이 지나 책이 나온 지금... 나는 조금은 냉정한 눈으로 작품을 되새겨본다.'과연 또 사야 하나?' - 독자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의문과 더불어.

먼저 캐릭터. 이번에는 륜 페이라는 섬세하고 유약한 (미)소년 이미지의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왔지만, 극의 핵심을 짊어진 가장 중요한 인물인 케이건 드라카의 캐릭터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놈, 폴라리스 랩소디의 키 선장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내면 묘사가 조금 더 많다는 것빼고는. 또한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비형 스라블 역시, 드래곤 라자의 제레인트와 너무 흡사하다는 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이 벌써 4편째 장편임을 감안하면 이정도의 중복은 봐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두 캐릭터 모두 처음부터 등장하는데 초장부터 데자뷰를 일으키고 나니 조금은 실망스러웠달까. 무엇보다 한명은 무려 '주인공'이 아닌가. 비슷한 주인공이 두편에 연달아 나온다는 것은 좀...

내용에 있어서도, 이번 작품은 보다 추리적 면모가 두드러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영도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인 철학적 면모가 추리적 면모에 좀 가려진 느낌.이영도 작품의 주요 흐름 중 하나는 흥미진진한 주요 스토리라인과 더불어 묻어나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었다. 그 고찰은 폴랩에서 절정을 이루었었고, 안그래도 나는 '더이상의 고찰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고 걱정섞인 의문을 품던 차였다. 이번 작품은 그 주제가 '서로 다른 4개의 종족'을 통해 고찰된 것 같은데, 전작들은 이야기와 주제의 비중이 5대 5였다면 이번에는 후자가 밀리는 느낌이다. 독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꾼 이영도의 면모는 여전했지만 뭐랄까, 끝까지 다 읽고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은 지금 상태의 독자로 하여금 다시 처음부터 책을 또 읽게 하는 매력이 전작에 비해 덜하달까.

캐릭터들의 호감도도 이전만 못하다. 똑같이 유쾌해도 비형에겐 제레인트에게 가졌던 만큼의 호감은 들지 않았다. 티나한은 짜증스러울 정도였는데, 이것은 단지 같은 작가의 책을 4편째 읽다보니 내가 식상해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종족 구분을 확실히 하려다 보니 캐릭터 묘사의 폭이 다소 많이 좁아진 탓인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마시는 물질'인 물을 계속 겁내하는 티나한과 레콘 일족은 도무지 공감 안 가는 족속들이었고, 페시론 섬의 악당들을 일족의 결의로서 태웠던 도깨비들이 나가의 공격에는 그토록이나 소극적인 것도 공감가기 어려웠다.

인간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았지만, 그 매력적인 캐릭터 중 하나인 지코마 펠독스를 그토록 간단히 죽여버린 것, 그리고 그 죽음이 단지 극연왕의 과거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 위함이었다는 것에는 심지어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뭐, 이 작가가 자기 캐릭터에 냉정한 건 폴랩 때도 알아봤지만. -_-;;)나가들 쪽에서도, 가령 비아스와 세리스마의 결말은... 물론 모범적인 결말이고 하등 나무랄 데 없는 결말이었지만, 내가 이영도라는 작가에게 가졌던 기대감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너무 전형적이라서 실망스러웠었다. (가장 화끈한 악당이었던 비아스에게는 좀더 나은 퇴장 무대가 마련되었어야 했다! 퓨처 워커의 할슈타일을 생각하라!) 도서정가제와 한정 박스라는 두 제한 때문에 일단 내가 이 책을 살 가능성은 높은 상태지만 그래도 좀더 고려를 해봐야 할 듯. 시간 제한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구매를 미루었을 가능성이 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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