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 - 비룡소 그림동화 83 

                                     사노 요코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원제 : 100万回生きたねこ

 

100만 번이나 산 고양이...

이 책은 일회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풀어내는 방식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나올법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린이 대상의 그림책이라고 하기엔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심오하다.


언제나 누군가의 고양이었지만 백만번이나 죽어야 했던 얼룩고양이.

자신의 죽음 앞에 너무도 슬프게 울던 주인의 아픔 따위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렇게 또다른 주인의 소유로 태어나 의미없이 살다가 또다시 죽고를 반복하는 고양이.

주인들이 하나같이 그 멋진 얼룩고양이를 사랑했음에도

고양이는 임금님도, 뱃사람도, 서커스의 요술쟁이도, 도둑도, 혼자사는 할머니도, 어린 여자아이도...어느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면서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눈물에 동정을 보내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잠깐동안 고양이를 소유했던 사람들은 무척 자기의 고양이를 사랑하는 듯 보이고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엔 참 많이도 울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의 편에서 일방적인 눈길로 고양이를 바라본다면 이 고양이는 정말 배은망덕하고

인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랑받을 자격조차도 없는 그런 고양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의해서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고양이가 왜 그랬는지를 다시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단지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있는 주인들에게 있다.

자신의 방식을 상대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생각지 않은채,

자기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양,

어떨적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주인들은 착각을 한다.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해 줄 주인을 만나기 위해 고양이는 그렇게 백만 번이나 죽음과 삶을 반복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얼룩고양이는 이제 어느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자기 자신의 고양이로 태어난다.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닌 혼자만의 세상살이 이지만 고양이는 차라리 그런 자기 자신이 너무너무 좋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혼자사는 고양이와 짝이 되고 싶어하는 온갖 암고양이가 있었으니

이 얼룩고양이는 더더욱 자신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전의 주인들로부터 그렇게 사랑받고자 했다는 사실을 망각한채

얼룩고양이는 서서히 자신의 소유자였던 백만 명의 주인처럼 되어 간다.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이제 와서 뭐 새삼스럽게 그래. 세상에 나 원 참!"

이렇듯 자신의 사랑을 기다리는 다른 고양이들 앞에서 상대의 관심을 무시한채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도취되어 버린다.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얼룩고양이 앞에 이 고양이를 변화시키는 한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고양이는 얼룩고양이가 옆에서 아무리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하면서 외쳐대도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흰털고양이에게 어느날 얼룩고양이는 "네 옆에 있어도 돼?"하고 묻는다.

 

창닫기


늘 ‘사랑’에 대한 갈망을 마음 한켠에 간직하고 살아왔던 얼룩고양이에게 이제 그 ‘사랑’을 표현할 대상이 생긴거다.

그리고 더 이상 "난 100만 번이나"하면서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얼룩고양이는 차츰 흰털고양이와 많은 아기고양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하게 되고 그 고양이와 언제까지나 살아있고 싶다고 생각한다.

흰털고양이를 만나기전 자기 자신의 고양이인게 너무너무 좋았던 고양이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더군다나 백만 번이나 죽고 삶을 반복하는 동안 ‘죽음’이란건 얼룩고양이에게 아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는데 이제 얼룩고양이는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욕망까지 생겨 난다.

 

창닫기


난 이 대목에서 이전 얼룩고양이의 주인이었던 여러 사람들의 ‘사랑’과 ‘참된 사랑’을 하기 위해 백만 번의 죽음을 불사했던 얼룩고양이의 사랑의 방식에 대해 또다시 비교를 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혼자만의 일방적인 통행이 아니며 자신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 소유도 아니다.

이전의 이기적인 모습일랑 사랑앞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지고 겸손해 지는 것...그것이 아닐런지...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얼룩고양이는 자신의 바램과는 달리 그렇게도 사랑했던 흰털고양이를 떠나보내게 된다(사랑은 그렇게 고통도 수반된다).

이 날, 얼룩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죽고 살면서 한번도 울지 않았던 울음을 운다.

자신의 백만 번의 죽음으로 백만 번의 이별을 해야했던 여러 주인과의 이별에서도

한번도 울지 않았던 울음을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흰털고양이의 죽음앞에서 토하고야 만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던 바램대로 얼룩고양이는 흰털고양이의 주검과 함께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죽음을 맞이한다.

"영원히,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고양이가 죽고 자신도 죽었지만 얼룩고양이는 참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늘 이렇게 말했지만 그말은 외로움을 가장한 객기로만 들렸는데 이제 고양이는 더이상 자신을 포장하지 않아도, 또 백만번을 역설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백만 번을 죽고도 슬픔도, 눈물도 몰랐던 얼룩고양이는 단 한번의 죽음을 통해 백만 번 죽음의 슬픔을 맛보았고 눈물을 쏟았으며 또 ‘죽음’에 대해 겸허해 질 수 있었다.

수백번을, 수천번을, 아니 얼룩고양이처럼 백만 번을 살아도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공허한 삶일뿐 진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얼룩고양이는 들려주는 듯 하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좋았던 고양이, 그러나 사랑은 자기 자신보다 상대를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죽음 앞에 겸손케하고 죽어도 행복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니 흰털고양이와 나란히 한곳을 응시하며 앉아있는 얼룩고양이가 보인다.

하늘나라도 간 얼룩고양이는 분명 환한 미소로 흰털고양이가 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고

함께 느끼고 행복해 하고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끝으로 생명을, 죽음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이 한권의 책을 통해 여러분도 가져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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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비밥中.
 
이런 얘기 알아요?.
고양이가 있었어요.
그 고양이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러 주인들을 거치면서
백만번을 죽고, 다시 백만번을 살아났죠.
고양이는 죽는게 두렵지 않았어요.
녀석은 한때 자유로운 들고양이였죠.
어느날 하얀 암코양이를 만나 둘은 함께 행복하게 보냈어요.
그러다 세월이 흘러 하얀 고양인 늙어죽고 말았죠.
고양이는 100만번을 울고 그리고 죽었어요.
두번 다시 살아나지 않았죠.

좋은 얘기야.

난 이 얘기가 싫어요.
고양이가 싫거든요.

그럴 줄 알았어

스파이크.
한가지만 물어도 될까?.

뭐죠?.
여자를 위해선가?.

죽은 여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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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5-09-1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참 귀엽군요. 아주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bluetree88 2005-09-11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어제 서재에 다시 글을 오랫만에 올리고 바로 하늘바람님의 댓글을 받았습니다. 살짝 올려놓으니 누가 다녀갈까 했는데 말예요..잠깐 님서재에 들렀는데 한동안 바람님도 서재활동이 뜸하신것 같아요..바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