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이 옛이야기 그림책 까치호랑이 9
이미애 글, 이억배 그림 / 보림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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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겨울 밤이 무르익을 때면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들던 기억이 새롭다. 할머니의 그 이야기 보따리는 어찌나 풍성했던지 “또요..또요~”해도 자꾸만 새로운 이야기로 손주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셨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그 멀고도 머언 아주 오랜 옛날~~, 이렇듯 손주들이 이야기에 목달라 하는 마음에 애를 달구는 게 당신의 즐거움인 듯 한참을 뜸들이고서야 이야기는 시작되었지. 눈은 말똥말똥, 귀는 쫑긋~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 전개에 따라 손을 움켜쥔 채 숨을 꼴깍 삼키기도 하고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하면서 그렇게 겨울밤은 깊어만 갔었다.

내가 어렸을 적엔 옛이야기를 다룬 책이라고는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던 시절이라 오로지 입담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즉흥이야기를 의지 삼아 이야기의 재미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런 우리들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이야 옛이야기를 다룬 많은 그림책들 속에서 듣고만 싶으면 책장에서 빼내와 책을 읽으면 되는 일이지만 그런 문명의 이기 속에 있는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서글퍼지는 것은 내용이야 훤히 알지언정 정작 우리세대가 가졌던 이야기에 얽힌 추억들은 갖지 못할 것이기에 옛이야기를 읽기는 하나 참 삭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선 그림책으로 접하게 되는 옛이야기 그림책들은 구술로 전해 듣는 이야기의 상상력에 비해 내용이 많이 축약되어지고 이야기가 산만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을 편집하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지만 어딘가 모자란듯한 느낌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옛이야기 책이란 게 활자화된 그림책의 영역에 속하다 보니, 그리고 대상연령이 어린 아이들이다 보니 내용의 충실함 보다는 삽화로 전하는 내용의 전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그 삽화란 게 정말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닌 이상 오히려 아이들의 상상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래 지니고 있는 옛이야기의 맛까지도 떨어뜨릴 우려가 많다.

아직 우리나라 그림책 시장에 옛이야기 그림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협소하여 아이에게 들려주고픈 이렇다 할 옛이야기 책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는데 몇 년 전 보림의 까치호랑이 시리즈와 웅진닷컴의 「두껍아 두껍아 옛날옛적에」, 보리의 「꼬불꼬불 옛이야기」가 출간되면서 아이들은 예전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그 옛이야기의 묘미를 책으로나마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리즈중 「반쪽이」는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옛이야기 그림책이다. 군더더기 설명이나 배경그림 없이 전할 내용에만 충실하고 있고 또 옛이야기가 지니는 전형인 반복구조를 띠고 있어 딸아이가 쉽고 재미있게 책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반쪽이」를 하은이에게 읽어주면서 내 나름대로 책을 통해 느낀 건데 만약에 할머니로부터 반쪽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반쪽이의 형상을 과연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눈도 하나, 귀도 하나, 팔도 다리도 하나, 입도 반쪽, 코도 반쪽이라는데..

처음 「반쪽이」를 읽을 때 아이는 반쪽이라는 어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반쪽이라는 건 아무리 상상을 해보아도 제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책을 통해 본 반쪽이는 그리 심각한 모습이 아니다. 심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어가다 보면 반쪽이의 용감함과 지혜로움에 반하게 되어 버린다. 게다가 반쪽이에게 닥친 위기상황은 반대로 유머러스하게 전환해 놓아 아이들은 코앞에 닥친 위기를 실감하지 못한 채 배꼽웃음을 웃는다.

또한 이야기 말미의 영감딸을 업어가는 클라이막스는 반쪽이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남기기에 충분할 정도의 구성이 돋보인다. 반쪽이의 해결방법이 기발한데다 아수라장이 된 사람들의 모양새는 민화풍의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과장과 재미가 녹아져 있어 반복되는 어구와 함께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내용을 추스르는 전형적인 끝맺음, 잘 먹고 잘 살았대.

옛사람들의 이야기엔 늘상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교훈이 저변에 깔려있어 아이들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있는 동안 시나브로 착하고 어질게 살아야 함을,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것이고 어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드러내어 훈시하지 않아도 옛이야기의 즐거움 속에서 은근히 내 아이가 그렇게 자라기를 바래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으로 바꾸어 놓은 옛이야기. 반쪽이의 이런 재미에도 불구하고 만약 나에게 그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한다면 다른 건 몰라도 예전 할머니가 꺼내 놓으시던 이야기 보따리 만큼은 지금의 그림책보다 훨씬 재미난 꺼리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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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가 그립다는 님의 말이 맛깔스런 님의 글만큼 정겹습니다.

waho 2004-04-1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자기 전에 이모에게 반쪽이 애길 들려 달라고 졸르던 기억이 나네요. 왠지 반족이 애기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bluetree88 2004-04-1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이미지가 바뀌었군요..그동안 안들린 사이에 많은 변화들이 있어서 적응이 잘 안되려고 하는군요..돌아가신 할머니, 무척 보고 싶네요..^^

강릉댁님은 어릴적 반쪽이 애기를 들으셨나 보군요..전 하은이에게 읽어주려고 책을 고르기 전에는 이런 얘기가 있는줄 전혀 몰랐는걸요..할머니 못지않게 이모님도 이야기 보따리가 큼직하셨던 모양이네요..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