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날. 큰 맘 먹고 이 영화를 봤다.
왜 큰 맘을 먹었냐고? 런닝 타임이 200분이 길래...
다음은 김영하의 책, 굴비낚시에서 발췌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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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있다. 왕의 자리는 고독하다. 형제들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으며 신하들은 언제나 모반을 꿈꾼다. 암살의 위협이 상존하며 영토를 노리는 적대국의 동태도 감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왕은 냉정해야 한다. 때가 되면 운명적 승부를 걸어야 하며 가족과 국가의 안위도 책임져야 한다. 때로는 가족이라 해도 살해해야 하며 적이라도 껴안아야 한다. 그게 왕의 운명이다. 왕은 한순간도 쉴 틈이 없다.
〈대부〉시리즈는 한 왕국의 전설이다. 〈대부〉에는 위에서 말한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 지점에서 〈대부〉와 셰익스피어가 만난다. 내게 있어 〈대부〉는 20세기의 셰익스피어다. 한 외로운 인간이 온갖 역경을 딛고 왕위에 오른다. 주변의 제국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합종연횡하며 신생제국의 성장을 저지한다. 결국 전쟁이다. 그 전쟁을 통해 새로운 승자가 등극한다. 그렇다고 영구한 평화는 아니다. 평화는 잠정적이다. 왕은 늙어간다. 배신자가 나타난다. 왕은 후계자에게 말한다. "누군가 네게 다가와 협상을 권하면, 그자가 바로 배신자다." 그는 생물학적 죽음과 맞서며 동시에 사회적 죽음과도 대결한다. 자신이 건설한 왕국의 패망을 막기 위해 아들에게 사람과 조직을 다스리는 법을 전수해준다.
그 아들은 어떤가. 우리의 마이클은 전설의 인물답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 그는 평범하게 살고자 한다. 하버드에 다니며 이탈리아계가 아닌 여자와 연애를 하며 가족의 뜻을 거스르고 해군에 입대한다. 해군이란 뭔가. 배를 타는 것이다. 해군에 입대한다는 건 배를 타고 아주 멀리 나가 싸운다는 것이다. 고래로부터 운명을 거부하는 자들이 선택한 운명은 배를 타는 것이었다. 그럼 떠날 수 있었다. 아주 멀리.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운을 시험하는 동안 왕국은 위기를 맞는다. 전형적인 전설이다. 아버지는 쇠약해지고 형제들은 무능하다. 결국 멀리 떠났던 아들이 돌아와 왕국을 계승한다. 그가 가장 싫어했던 일,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말이다. 사람들 의심해야 하고 죽여야 하고 동시에 거둬야 한다.
그건 왕만의 일인가. 과연 왕만이 그런 일을 하고 사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나 대부가 그렇게 많은 이들을 매혹했을 이유가 없다. 기실 〈대부〉가 보여주는 세계는 우리 모두가 사는 바로 여기, 그래 이 세상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저 먼 바다로 떠나고 싶어했었다. 또 실제로 떠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결국은 돌아와 그토록 하기 싫었던, 내 아버지가 했던 일을 똑같이 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누군가를 모함하고, 살아남기 위해 배신한다. 마이클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새끼들을 거느리고 주말이면 야외에 나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회전목마를 타고, 그리하여 아무도 배신하지 않고 아무도 죽이지 않는, 그런 삶이란 없다. 〈대부2〉에서 마이클이 깨닫는 것은 그런 것이며 그런 그에게 감정이입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우리는 또한 잘난 동생을 질투하여 그의 침실에 기관총을 쏘아대는 반푼이 뚜쟁이 프레도에게도 감정이입하며(오, 잘난 형제들은 얼마나 증오스러운가), 연애시절의 꿈을 잃어가는 남편에게 실망하여 아이를 지워버리는 마이클의 아내를 이해하며(동시에 아내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마이클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가족을 위해 동맥을 끊어 자살하는 프랭크의 장렬한 최후에 비감해한다.
〈대부〉가 보여주는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고스란히 그것이다. 〈타이타닉〉같은 유치한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세계(어째서 타이타닉호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두 종류의 인간밖에는 없는 걸까)가 있다. 〈대부〉속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 도박업 허가권으로 흥정하는 상원의원에게 마이클은 말한다. "우리는 똑같은 위선 위에서 살아갑니다." 마이클은 살인자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는 오딧세이다. 그의 아내 케이는 마이클의 살인을 비난하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자 뱃속의 아이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에게 맞선다. 결국 그들은 손에 피만 묻히지 않았다 뿐 똑같은 살인자다. 프레도는 동생 마이클을 살해하려 했고 마이클은 성모송을 외우며 낚시를 하는 그를 석양의 호수 위에서 사살한다. 모두가 조금씩은 서로를 배신한다. 그 배신이 치명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것이 배신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이 배신의 리얼리즘, 그것이 내가 몇 번이고 〈대부〉를 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이 정치적 드라마의 밑바닥엔 무엇이 있나. 양파처럼 마지막 한 겹의 껍질까지 다 정치인가.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 그곳엔 우리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 서정이 있다. 우리는 배신당할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끊임없이 우리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가족에게 애틋함을 느끼며, 등에 칼을 꽂은 친구를 비난하면서 그리워한다. 우리 인간에게 굴레처럼 씌워진 서정이라는 짐. 〈대부〉는 그 짐을 그린다. 세례라는 성스러운 행사와 동시에 행해지는 살해극은 서정과 정치가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 보여준다. 등이 붙은 샴 쌍둥이처럼 그들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 서정이 없다면 복수도 없다. 가족과 영토에 대한 집착 없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실리라는 실낙원이 없었다면 패밀리들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생겼다 하더라도 금세 사라졌을 것이다. 그 실낙원에서 마이클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은 적대 패밀리의 폭탄테러로 가루가 된다. 그녀가 가루가 되지 않았다면 마이클은 대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서정이 허무를 낳고 허무가 삶을 알게 하고 그것이 정치가 된다. 이제 대부가 된 마이클은 정치를 한다. 불리한 증인을 제거하고 배신자를 총살하며 형을 살해한다. 호숫가에 면한 집에서 형이 살해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장면은 가히 〈대부〉의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총소리가 울리고 새들이 깍깍대며 보트를 맴돈다. 석양이 비끼는 어두운 방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마이클에게는 친족 살해의 죄명까지 얹혀졌다. 서정을 배신함으로써 서정은 완성되었다.
음악은 장중하게 흐르고 그가 해군 입대를 공표하는 시점으로 플래시백. 아버지 돈 꼴레오네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인 형제들은 그의 결정을 비난하고 있다. 그 형제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소니는 적대 패밀리의 총탄세례를 받아 죽었고 프레도는 마이클이 죽였다. 마이클은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생일잔치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준비해 두었다는 'Big Plan'이라는 게 고작 이거였느냐고.
마지막 장면. 마이클 꼴레오네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다. 이제 그는 진정한 혼자다. 아버지도 형제도 없다. 그의 왕국은 굳건하다. 정적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불리한 증인에게는 로마식 자살을 권해 동맥을 끊게 만들었다. 난봉으로 속을 썩이던 누이 카롤린도 집으로 들어왔다. 아이들도 그의 곁에 있다. 아내만이 멀리 떠나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보러 찾아온 아내의 면전에서 조용히 문을 닫음으로써 떠나보낸 마이클. 그는 이제 진정한 혼자다. 적들은 떠나갔지만 그냥 가지 않았다. 적들은 그의 형제와 친구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최후의 서정까지 가져갔다.
누군들 그 서정과 정치의 함수에서 자유로울 것인가. 돌아보면 우리들 역시 서정과 정치의 줄다리기 속에서 산다. 속이면서 슬퍼하고 슬퍼하면서 속인다. 실리와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새로운 여자와 결혼한다.
영화는 우리 인생처럼 막을 내린다. 마이클이 앉아 있는 어두운 방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클라이막스도 카타르시스도 없다. 그것마저 우리 인생을 닮았다니, 〈대부〉는 한 편의 잔혹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