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와 현대사회는 각자 다른 지각의 세계를 제공한다. 시골의 읍내를 거니는 것과, 대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은 각각 다른 유형의 지각을 요구한다. 대도시에서는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찬 '모험'의 성격을 띤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고, 더 빠른 속도로 뒤에서 따라붙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줘야 하며, 빼곡하게 붐비는 곳에서는 남의 발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길을 건널 때에는 앞에서 몰려오는 인파들 외에 양옆에서 달려드는 자동차의 움직임에도 주의해야 한다. 신호 하나를 잘못 보는 것이 여기서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가 있다.
시각에서 촉각으로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충격방어'에 관해 이야기한다. "현대인들의 지각에 부여된 과제"의 해결에 필요한 "훈련"을 영화라는 기술복제의 매체가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훈련"이라 함은 그저 배워야 할 내용을 '정신'이라는 지면에 써넣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삶을 위해 습득되어야 할 어떤 행위의 코드를 '신체'에 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수학을 배우는 것은 학습이나, 운전을 배우는 것은 훈련이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정신의 일이나, 운전을 배우는 것은 핸들과 브레이크, 가속페달의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한꺼번에 여러 개의 과제를 신속하게 해결해야 한다. 눈은 전방과 후방을 번갈아 주시하고, 손으로는 핸들을 조정하고, 발로는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밟는다. 때때로 다른 차가 울리는 경적에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귀는 열어놓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제를 해결하면서도 그는 유유히 음악을 듣거나, 심지어 차에 장착된 LCD 화면을 힐끗거리며 스포츠 중계를 보기도 한다. 시속 수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하는 다른 차들을 헤집고 다니는 과제를, 그는 시각, 청각, 촉각을 동시에 사용하여 비교적 여유 있게 해결한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하나의 사물에 눈을 '집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전자의 눈앞에서 풍경은 순식간에 변하고, 그에 따라 운전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순간에 신속하게 판단을 내리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을, 그는 몸 속에 기입된 코드에 힘입어 별 어려움 없이 순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렇게 온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산만한 지각을 벤야민은 "촉각적"이라 부른다. 현대인의 지각은 "시각"의 성격을 벗고 점점 더 "촉각"을 지향한다. 이렇게 몸을 바꾸는 데에 필요한 "훈련"을, 자동차만큼이나 빨리 돌아가는 영화가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차를 몰지 않을 때도 운전자와 같다. 그의 지각은 산만한다. 가령 우리의 학창시절에 부모들은 우리가 라디오를 들으며 시험공부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아이들이 컴퓨터의 창을 여러 개 열어놓고 숙제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각, 청각, 촉각을 공감각적으로 활용하여--가령 맹인 게이머를 생각해보라--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신속하게 처리해 내는 프로게이머는 아마도 멀지 않은 장래에 인간의 평균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현대 사회가 우리 지각에 부여하는 과제는 더 이상 시각에 입각한 전통적인 지각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속도와 미디어
우리의 몸은 어느새 길들여져 이 속도를 의식조차 하지도 못하나, 언젠가 '모던'이라는 시대가 처음으로 도래했을 때 사람들은 그 속도 앞에서 모종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원래 시각에 입각한 지각 모델은 움직이지 않는 풍경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데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풍경을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 안에서 본다. 그 안에서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가만히 있지 않고 기차가 달리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우리 눈앞을 스쳐간다. 이때 우리의 눈은 창 밖으로 보이는 대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대상이 우리 시야에 머무는 것은 단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전적 지각은 움직이지 않는 영상, 즉 전통적인 타블로를 감상하는 것을 모델로 한다. 하지만 17세기에 '라테르나 마기카'의 기술자들은 두 장의 슬라이드를 이용하여 한 인물의 영상을 관객들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게 만들었다. 이때 관객들은 이 움직이는 마술환영을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수 백년 후 뤼미에르 형제가 역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마치 기차가 관객들을 향해 육박하는 듯한 느낌을 연출했다. 이때에도 사람들은 놀라서 비명을 질러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활동사진의 창세기를 경험했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움직이는 그림에 길들여져 있다.
현대인은 온갖 미디어가 쉴새없이 쏟아놓는 영상들이 홍수에 빠져 있다. 마차를 모는 감각으로 자동차의 운전을 할 수 없고, 타블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없듯이, 넘쳐흐르는 영상정보의 흐름을 헤쳐나가는 데에는 전통적인 지각과는 다른 새로운 지각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위에서 "촉각적" 지각이라 불렀다. 영화와 텔레비전에 이어 인터넷으로 연결된 통합 매체인 컴퓨터가 우리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지금, 지각의 촉각성을 높이는 것은 거의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사물의 세계이자, 새로운 지각의 세계이며, 동시에 새로운 글쓰기의 환경이다.
텍스트와 이미지
언뜻 보기에 영화는 '선형적'으로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과 비교해 보면 영화의 공간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연극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것이 쉽지 않으나, 영화는 구성원리자체가 '몽타주'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시간의 자연적 흐름을 멈추거나, 뒤로 돌리거나 혹은 두 가지 다른 시간대를 교차하게 만들 수 있다. 미학적 의미에서 '몽타주'란 단지 커팅을 넘어 필름 시퀀스 a와 b를 충돌시켜 거기서 제3의 이미지를 불꽃처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제3의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공간성을 구현한다.
이런 영상 매체에 익숙한 세대는 글쓰기에 대해서도 다른 감각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시사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요즘 대학생들이 낸 레포트 중에는 '컷'과 '페이스트' 기법으로 씌어진(?) 것이 많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인터넷 서핑으로 얻은 패러그래프들을 잘라내어 갖다 부치는 식으로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상 이미지를 구성하는 원리를 텍스트의 작성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강사의 불평에 따르면 이렇게 작성된 텍스트에는 종종 일관된 논리의 전개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문자 텍스트는 더 이상 선형적이기를 그치고, 텍스트 파편들로 이루어진 공간적 모자이크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예는 현대의 매체 환경 속에서 글쓰기가 처한 긍정적, 부정적 가능성을 모두 보여준다. 부정적 가능성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선형적 사유능력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긍정적 가능성이란 문자 텍스트가 공간적 이미지의 차원을 획득하여 글쓰기의 새로운 차원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 선택의 축을 (시간적) 결합의 축에 투사한다는 은유의 원리(로만 야콥슨)처럼 인터넷 글쓰기의 텍스트는 선형적인 문자의 흐름에 공간적 구조를 도입한다. '텍스트'라는 말이 본디 직물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종횡으로 짜여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텍스트는 이제 비로소 제 어원에 값하는 모습을 띠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디자인으로서의 글쓰기
"인문학의 위기"가 그저 대학에 침투한 신자유주의의 횡포라는 의미를 넘어 어떤 내용적 실질을 갖는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사유와 글쓰기의 위기를 가리킬 것이다. 인문학의 선형적 글쓰기는 더 이상 현대의 미디어 상황과 호환성을 갖지 못한다. 한 마디로 선형적 사유에 입각한 글쓰기는 영상적 사유에 익숙한 현대의 지각모델과 충돌을 일으킨다. 사유의 '집중'을 요구하는 긴 호흡의 텍스트는 현대인의 지각의 산만함에 어울리지 않는다. 리모콘으로 끊임없이 화면을 바꿔가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모자이크식 지각에는 기나긴 집중을 요구하는 텍스트는 낡은 '고문'의 도구일 뿐이다. 스크롤 바를 한번 긁어서 끝나지 않는 텍스트는 더 이상 읽혀지지 않는다.
읽혀지기 위해서 텍스트는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짧은 파편으로 해체되어 흩어진 후 다시 몽타주의 수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미 발터 벤야민은 인용문의 몽타주로 이루어진 콜라주 내지 모자이크식 글쓰기를 도입한 바 있다. 이런 글쓰기는 텍스트의 내용을 통해서보다는 외려 형식을 통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이렇게 씌어진 텍스트는 선형적인 논리의 연쇄를 이루기보다는 공간적인 이미지의 합성에 가까워진다.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선거 영상은 전통적인 선형 텍스트를, 민주당의 홍보물은 의미 없는 영상 이미지를 지향했다.) 빌렘 플루서가 미래의 글쓰기는 디자인이 될 것이라고 한 것을 바로 이 때문이다.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그것의 형식에 있다.
오늘날 텍스트는 읽혀지기 위해 영상을 지향하고 있다. 아니, 영상을 지향하는 텍스트는 시간적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보여지는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 텍스트를 보는 것은 소리 없이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전통적인 의미의 시지각이 아니다. 텍스트의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은 외려 모든 감각을 동원한 공감각적인 체험, 마샬 맥루언이 말하는 의미에서 '촉각적'인 체험이다. 텍스트는 더 이상 데카르트적 정신에 기록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정신으로 올라가 사유를 거치기 전에 벌써 신체에 기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마사지다.
스크립트로서의 글쓰기
빌렘 플루서는 오늘날의 글쓰기가 영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과거의 글쓰기는 주술이나 신화와 연결된 마술적 그리기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등장했다. 마술로 맺어진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가 낯설어지는 시기에 알파벳이 등장한다. 그렇게 도입된 수천 년의 문자문명의 끝에서 이번에는 알파벳 텍스트가 이번에는 자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텍스트는 더 이상 세계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의 사이는 다시 낯설어졌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알파벳 텍스트를 대신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영화, 사진, 인터넷 영상 등 기계복제가 가능한 '기술적 형상'이다.
세계-그림-글쓰기-기술형상의 역사적 연쇄 속에서 글쓰기는 서서히 독자적 의미를 잃고 점점 더 기술형상의 창조에 종속되어 간다. 플루서에 따르면 기술형상은 세계의 재현이기를 원했던 전통적 그림과 달리 문자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든 것, 말하자면 영상으로 실현된 스크립트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를 영상으로 옮겨놓는 방송작가나, 광고 스크립터는--아직 발달되지 않은 그들의 자의식과는 달리--더 이상 글쓰기의 변방에 머무는 주변인이 아니라 미래의 글쓰기의 전범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는 스크립트가 글쓰기를 모방했다면, 앞으로는 스크립트를 모방하는 것이 글쓰기의 아방가르드가 될 것이다.
읽혀지기 위해 글쓰기는 점점 더 '스크립트'를 닮아가고 있다. 알파벳 문화가 몰락하는 가운데, 글쓰기는 점점 더 스크립트를 지향해 간다. 굳이 영상으로 실현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글쓰기도 점점 더 그 안에 영상의 형상적 잠재성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래의 글쓰기는 이를 그저 변화된 매체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차한 '생존의 전략'으로 바라보는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전유하는 창조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문자문화에서 구술문화로
알파벳 문명은 구술문화를 문자문화로 바꾸어 놓았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낭독의 문화를 묵독의 문화로 바꿔놓음으로써 인간의 정신화, 내면화를 초래하였다. 문자는 목소리의 침묵, 청각을 고요한 시각으로 대체해 놓은 것이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서 다시 목소리는 부활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중간에 위치한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채팅은 뜨거운 구술문화에 속하나, 그 흔적이 문자의 형태로 남아 기록된다는 점에서는 차가운 문자문화를 닮았다. 새로운 글쓰기는 문어로서 구어를 구현하는 경향이 있다. 문어와 구어는 각각 다른 수사학을 갖는다.
소크라테스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다. 그는 맥락을 벗어난 곳에 인용되어 그 의미를 왜곡시키는 문자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대화체로 글을 썼다. 그의 진리는 대화의 변증적 구조 속에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기억을 위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고독한 화자의 독백이다. 그의 글쓰기 형식은 오늘날 학술논문의 모델이 되었고, 그 글쓰기의 독백적 성격은 다른 모든 글쓰기의 일반적 형식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움직임에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 매체는 구어를 부활시키고, 쌍방향적 성격은 글쓰기의 대화적 성격을 강화하고, 화상과 음성채팅은 소통을 위해 더 이상 문자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움직임 역시 부정적 가능성과 긍정적 가능성을 함께 내포한다. 부정적 가능성이란 문자를 배우고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문맹층의 형성이다.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문자가 파괴되고, 음성(특히 모음)이 유아적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이 실제로 확인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긍정적 가능성이 또한 존재한다. 하나의 발신자가 다수의 수신자를 향해 송신을 하는 일방적인 소통모델을 대신하여, 동시에 다른 메시지의 수신자의 역할을 하는 다수의 발신자가 서로 접속하여 이루는 새로운 망형 소통모델이 등장할 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일 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글쓰기의 감각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는 전통적인 글쓰기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저자의 죽음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벤야민은 대중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필자와 독자의 차이가 더 이상 신분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의 독자는 '귀여니'처럼 필자가 되고 있고, 오늘날의 필자는 그 놈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알기 위해 귀여니의 독자가 되고 있다. 하나의 중심에서 다수의 독자를 향해 메시지를 널리 던지는(broadcasting) 것이 필자의 권력이었다면, 그 중심의 지위에서 내려 와 망형 소통의 구조 속에 하나의 망점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독자의 저항이다. 그리고 이 평등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고유한 글쓰기의 감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진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