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
이원희 지음 / 주류성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인문 서평] 일본 천황과 귀족의 백제어 - 백제인이 지배한 고대 왜국의 흔적 그들의 언어


 


일본은 자국의 각색된 역사저술인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통해 백제를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한국을 지배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백제어의 흔적이 오히려 일본인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일본의 고대역사가 나타나고 있는 저술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이다. 고사기가 돔 더 오래된 것으로 고사기의 원편에는 백제어가 많이 나오고 있으며, 특히 당시 한반도에서 쓰던 이두가 많이 보여 자신들이 직접 당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실을 거꾸로 부정하고 있는 저술이다.

이러한 백제어의 흔적은 지금의 일본어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그들은 외면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대 일본어의 시시하다는 말인 ku-da-ra-nai는 앞의 구다라가 백제를 뜻하는 말이며 나이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결국 백제산이 아닌 물건은 시시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 말의 원형인 것이라걸 알 수 있다. 구다라가 백제인 것은 백제가 왜로 가는 항구였던 부여의 항구 이름이다. 왜로 가있던 백제인들이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를 향한 애절함이 옅보이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구다라는 말은 일본의 어느 원형과도 연결이 안 되는 말이다.

특히 구다라라는 부여의 항구를 표현한 용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한성에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이주한 것에로 볼 수 있다. 웅진에서 가까운 부여는 일본으로 가기 쉬운 최적의 항구였던 것이다. 일본에 점령된 백제라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것은 일본으로 빨리 가기 위한 정책이었으며 당수군에 멸망했듯이 방어에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웅진천도의 배경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 있는 부여의 구드레 항구가 백제를 상징하는 말이 된 것이다.

특히 그들의 고사기와 서기에 일본이 최고의 신의 이름은 i-za-na-ki(남신)과 i-za-na-mi(여신)이다. 일단 마지막의 어간의 나기와 나미는 지금의 내기와 내미로 우리가 사용하는 시골내기(출신을 뜻하는 말)과 딸내미(여성의 출신)의 어간의 원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앞의 이자라는 말은 끌어들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엇을 끌어들인 사람들일까? 이것은 먼저 백제에 넘어가 정착한 구백제세력과 당의 멸망 이후 새롭게 넘어간 신백제세력의 갈등에서 그 원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원래 일본에 문화를 끌어들인 사람들이 백제인이라는 것을 그들의 태고의 신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기와 나미의 원형은 고대 일본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백제어임을 알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용어가 행정용어, 정치용어 등 통치언어에 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정치문화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사기에 기록된 이두의 흔적은 이것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이(관리), 두(원래 도로써 말을 뜻한다)는 관리가 쓰는 말 또는 관리의 서류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용한 나라는 신라와 백제였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이 백제를 지배한 나라였다면 어떻게 백제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것인가하는 것만 봐도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라걸 알 수 있다. 

일본 서기를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가 있어 하늘의 신을 기다린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하늘과 땅에 어떻게 다리가 있을 까? 사실 이것은 백제라는 하늘과 왜라는 땅이 연결된 다리가 있다면 언제라도 고국에 내왕할 수 있다는 고대 백제인들의 향수가 숨어있는 대목이라 해석해야 한다. 

왜라는 말은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야요이 시대의 일본인은 매우 왜소한 체격이었다. 그래서 왜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부 고서에서는 그냥 섬이라 부른 사례도 많이 보인다. 왜왕을 뜻하는 도군이라는 말은 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일본이라는 국호에 대해 구당서는 별종이 왜국이라는 국호가 좋지 않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별종은 백제 멸망 후 넘어간 백제이주민을 뜻한다. 결국 자신의 조국을 떠나 새롭게 일본으로 넘어간 백제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문화가 바로 일본문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근거는 매우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역사학계의 보수성(사실 친일성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지만)으로 인해 식민사관의 옷을 못 벗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좋은 근거를 역사학자가 아닌 법조계의 사람이 썻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아는 근거가 된다. 정통사학이 아직 삼국을 넘지 못하는 한계(고조선은 신화라 단정하는 모습)나 일본의 왜곡된 내용에 대한 분석에 지나치리만큼 외면하는 모습은 하루속히 개선해야 할 과제이다. 특히 자국의 역사를 선택과목으로 취급하는 정서는 정말 빨리 고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본인은 한중일의 우호와 협력을 통해 새로운 아시아를 꿈꾸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래서 일부 재야사학자의 영토사학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다. 본인은 문화사적 입장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통해 화합의 근거를 만들기를 바라고 있다. 한일이 잘못된 서로의 시각으로 인해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평화의 상징을 만드는 근거로 함께 잘못된 역사를 조정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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