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에서 만난 하나님
성소은 지음 / 삼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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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기 위해 비구니가 된 여정을 그린 [선방에서 만난 하나님]



이웃을 사랑하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이웃을 해하는 우리의 종교의 현실에 대해 진정한 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갈급했던 저자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삶이 갈구하였던 모습을 통해 반성해보고자 한다.


저자가 순복음교회를 다니면서 누구보다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점점 더 다가오는 내면의 물음에 대해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우리의 사회와 교회가 점점 더 대형화하고 더 크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을 추구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사회를 주도하게되고 우리를 강조하지만 우리가 없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가 함께 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닌 루저가 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이러한 원인이 맹목적인 성경읽기가 낳은 맹목적인 신앙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개인적으로도 종교인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힘든 문제는 서로가 대화가 가능하려면 상새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는 절대적이고 상대방을 교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보니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경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깐 정리하고 가면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신의 계시로 ?㎢鳴? 하더라도 그 기록자가 인간인 이상 이미 인간의 산물이며 그 성경의 공인 역시 인간의 회의에서 정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절대화시키면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는 "No such Jesus : Reading Christinity Inside Out"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런 예수는 없다:기독교뒤집어 생각하기라고 번역할 수 있는 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근본적인 삶의 재발견이 회개라고 말하는 메타노이아이고 그것을 찾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통해 자신의 갈급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책의 저자인 신학자의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이 하바드에서 한국의 화계사를 찾아온 현각스님이었다는 것을 이때 알았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는 말을 한다. 이후 그녀는 순복음을 떠나 성공회로 옮기게 된다.


저자의 진정한 메타노이아는 일본을 자주 왔다갔다는 하는 여정 속에 진정한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고 존재의 이유를 찾으면서 부터이다.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기카"의 스바다르마를 알게되면서 세계와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정신수련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것이 이미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막스뭘러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미 1964년 바티칸공회에서 무신앙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구원이 있다고 선언했듯이 타 종교를 인정했지만 아직도 우리들은 자신만의 종교가 옳다고 자신의 생각에 갖혀 있는 것이다. 


저자가 진정한 신의 내면에 다가가기 위해 수행을 찾게되고 수행의 목표인 진실된 나를 찾는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면서 선불교의 깊이에 빠져들게 된다. 

주로 이책에서는 저자의 여정을 그리면서 기독교와 불교가 서로 부정적인 관계가 아니라 두 종교가 화합할 수 있으며 그러할 때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종교와의 대화를 말하는 많은 책들이 주로 개념을 통해 논리를 풀어가지만 이책은 저자의 여정을 통해 종교의 순례를 통한 내면의 갈등과 가족간의 갈등, 주변과의 갈등을 그리면서 이것이 더 이상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행동을 통한 종교와의 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본인도 한국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종교갈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각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입장만을 말하는 것은 해결이 불가능하며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든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결국 자신의 입장이 상대적이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자세만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인도 신학을 했지만 요즘 많은 불교 관련 책이나 다른 종교서적들을 읽으면서 서로의 종교의 장점을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의 탄생은 주로 암하렛츠라는 당시 하층계급들의 해방의 주제였던 이유로 인해 기존의 지배계급들의 신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다보니 나와 너는 다르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장점은 자아를 강화시킬 수 있는 좋은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막스베버가 말했지만 자본주의의 태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불교는 이미 붓다가 왕자 출신이었고 종교의 핵심문제인 내면문제에 집중을 하면서 붓다라는 개념 자체가 깨어있는 자라는 말이듯이 내면의 깨달음에 집중을 하였다. 

이 둘을 생각하면 단순하게 보아서 기독교가 외적인 문제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면 불교는 내면의 문제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신을 찾아가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가 다른 문제인 것이지 둘의 고민 자체가 다른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신을 찾는 원초적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실 종교의 문제는 매우 단순하다. 우리의 초기 문명에서 신을 찾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많은 석기시대의 결과물들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종교심들이 청동기를 거치면서 구체화되며 철기시대를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철기시대는 국가라는 개념이 완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 국가라는 개념이 완성되었을 때 종교가 구체화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170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은 삼국시대에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불교가 국교가 된 것이 고대국가가 된 시점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서평이 다른 것으로 흐르긴 했지만 종교의 문제가 찾는 것은 사실 하나라는 것이다. 다만 그 길이 다를 뿐이다. 이 길이 맞다, 저 길이 맞다라는 얘기는 마치 우리가 많이 하는 꽁트인 나폴레옹이 이길이 아닌가봐라는 농담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선불교가 내면의 종교적인 심성을 찾는데에는 좀더 유익한 방법이었다 생각한다. 

서로의 다름을 통해 좋은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좀더 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현명한 종교인들이 들여다 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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