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영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뒤에, 1996년에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1998년에는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현재 문학,철학,역사 분야에서 수많은 저서를 출간하며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최근에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이끌어 주었던 생각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동서양의 여러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 대한 연구에 매진한 끝에 방대한 분량의 『생각박물관』 집필을 마무리했다.



1. 한글 창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본인이 2002년 한글은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라고 발표.


육하원칙으로 생각해보자


누가 : 세종이 - 반포시 반발을 볼 때 집현전 학자와 함께 했다는 것은 힘들다. 집현전 학자도 50%가 반대

조선시대 한문의 역할은 양반의 권력의 도구였다. 글자를 백성이 안다는 것을 용인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문 - 소전체(진나라 통일 이전의 사전) - 대전체(진나라 통일이후 만들어진 사전) - 한문이란 이름은 한나라때 간체를 만들어서 널리 융통한데서 비롯)

한문은 양반의 출세 도구였다. 한문을 안다는 것은 단지 한문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서오경을 아는 것이다(시와 경 - 이것은 운율을 안다는 것이며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국이 반대할거란 것은 잘못된 얘기다 -> 최만리도 중국이 비난을 할 것이다라고 상소


왜 - 진주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일에 충격을 받아 백성들에게 바른 행실을 가르키려 상감행실도란 그림을 그려 전국에 배포했으나 그것도 잘 이해를 못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을 깨우치는 글자를 만드려는 결심.


세종은 그 당시 언어학(운율)과 관련된 주변의 모든 문서를 모아 공부를 하였다. 최만리에게 네가 성리학의 운율도 모르면서 라고 말할 정도로 언어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훈민정음만 세종의제라 부제를 붙인 것은 이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반포도 매우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언제부터 - 세종 18년부터 시작했다. 1418년 왕이 된 이후 1436년 의정부와 함께 정치, 1437년 세자에게 양정을 함. 세조에게 왕권을 이양한 이후 7년간 연구하여 세종 25년에 반포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어디서 - 강령전에서 했을 것이다. 


왜 - 그동안 법령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죄를 짓는다 생각하여 이두로 번역하게 하였으나 이두도 어려웠다. 


어떻게 - 모양을 본 따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중국의 홍무정음에서 중국의 문자를 아,설,순,치,후라는 다섯음을 기초로 23자의 음을 정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중국의 한문을 베꼈으나 단순하게 만들었다. 

아(어금니) 牙 - ㄱ이란 글자,  설(혀의 모양),  순(입술) 口에서 유래했다. 치(이빨)人에서 유추, 후(목구멍) 

전서의 형태에서 모방했을 것이다.(해례)

그리고 처음에는 중국어처럼 성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별로 사용이 필요없어 사라지게 되었다. 

모음은 마방진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숫자로 만드는 마방진이 유명했다. 남양황씨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10차 마방진의 오류를 두군데 지적하여 고친 예도 있다.


그당시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천원지방(天圓地防) : 엽전 둥근모양에 사각형 구멍


이러한 이해 속에서 한글의 기본 도형을 만들었을 것이며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천간지지나 그당시의 동양문화를 이해하고 한글을 바라보면 음양오행에 기초하여 한글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0진법의 컴퓨터가 실패했지만 2진법의 컴퓨터가 성공한 이유는 간단할 수록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이유때문이다. 한글은 비록 너무 간단하고 쉬운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어원을 담을 수 있는 과학적인 글씨가 된 것이다.

우리가 용량을 재는 용기가 모양이 복잡하다면 오히려 측정이 어려워진다. 반듯하고 단순한 모양이 측정을 정확하게 만드는 용기가 되듯이 한글도 그러한 단순함이 더 큰 것을 담게 한 것이다. 한글의 제작원리는 너무 쉽고 간단했지만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된 것이다.


처음에 한글은 내간체나 궁체가 발전한 것을 보듯 아녀자나 궁녀 등 사회적 약자 계급이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관리시험에 반듯이 한글시험을 보게 해서 관리는 꼭 알아야 했다. 


세종은 한글반포와 더불어 강제적인 교육을 하게 만들었다. 한글에 대해 반대를 할 경우 수감까지 시켜버렸다. 이렇게 강력하게 시행된 결과로 인해 한글이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이다. 



2. 뿌리깊은 나무 드라마의 진실과 허구


원시시대의 돈은 사냥감이었다. 그러한 사냥감이 약속체게로 바꿔진 것이 오늘날의 돈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태동과 더불어 나라를 경영하는데 들어가는 것도 돈이었다. 그당시 국가보다도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한 사찰에 대해 조선은 강력한 제제를 가했고 사찰의 통합과 불전의 강제수용을 통한 공전의 발달을 통해 조선의 지배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유교를 강력하게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유교는 종교는 아닌 것이다. 종교의 필요성은 항상 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불교나 민간신앙은 항상 공존했다. 정치이념과 종교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윤회론에 대해 새로운 이해도 필요. 윤회론이란 생성과 성장, 소멸이 순환된다는 개념이다. 가령 현재 내가 이렇게 자란 것은 어떠한 생명체의 소멸(음식의 섭취)을 통해 내가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소멸할 것이며 그것은 끝이 아니고 다른 생명을 생성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설을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의 환관과 한국의 환관은 입장이 다르다. 중국의 환관은 글을 알지 못한다. 단순한 전달자의 역할만 수행할 뿐이다. 명령을 바꿀 소지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환관은 글도 배웠으며 결혼도 할 수 있었다. 한국의 환관들은 당상관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상궁의 우두머리인 제조상궁과 당상관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겸사복이 국경에서 한양으로 온다는 것은 그냥 설정이다. 그당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관의 말단직이 한문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천자문은 안다고 한문을 아는 것은 절대 아니다. 드라마의 전개상 필요로 넣은 것이다.


가끔 사극에서 독대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당시 독대는 탄핵의 대상이 되는 아주 위험한 짓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질문 : 사극이 너무 근대의 개념인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닌가?


- 답변 : 대하사극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일단 대하사극이 많은 인원과 자본을 들여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다. 앞으로의 사극은 세밀하면서도 문화를 많이 담는데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일단 시청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현재 광개토대왕에서 보듯 너무 소리만 질르는듯한 모습을 비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역량있는 작가가 나와야 한다.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사극이 나오듯이 민족주의적인 입장이 아닌 사극다운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많이 너오는 것이 중요하다.


- 질문 : 세종이 석가를 위한 글을 만든 이유는?


- 답변 : 학문과 종교는 분리해야 한다. 유학은 학문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교는 조선시대 내내 항상 존재했다. 조선총독부가 사판을 육성해 불교를 관리하려 했던 것을 보듯 종교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풍습을 가진 나라다. 가장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왕자가 불가에 귀의하면 절대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단한번도 종교가 정치를 지배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 질문 : 밀본이 있었는가? 조선왕조에 그러한 조직이 있을 수 있었는가?


- 답변 : 동학이나 보상이라는 조직, 활빈당이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의 밀본은 재미를 위한 그냥 허구일 뿐이다. 동학이 자체 관리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집강소를 통해 무리없이 관리기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보부상이라는 조직은 실제로 보상(평민들이 하는 보따리상)은 별로 힘이 없었으며 부상(천민들이 중심이 되는 집단 상거래 조직)이 중심이었다. 부상은 전체 조직을 결정하는 직접 투표제를 통해 안건을 처리했던 강력한 조직이었다. 

또한 일제시대 만민공동회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고 마을마다 대동계 등 자체 조직들을 가지고 있었던 좋은 선례들을 가지고 있었다.


- 질문 : 다양한 지식을 얻는 방법은?


- 답변 : 사문철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처음부터 책을 쓰면서 공부를 했다. 몸이 안 좋아 체질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체질과 인간유형을 알면 사람 만나는 것이 즐겁다"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쓰려 하는데 책을 쓰면서 공부를 하게 되면 처음부터 정확하게 가득을 잡으려하기 때문에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나는 학문에는 떨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할 때처럼 떨림과 감동이 학문을 할 때도 만들어져야만 제대로 된 학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로와 아무추어의 차이는 시도하는 것이다. 


- 질문 : 조선왕조 중 역사를 되돌려 한다고 생각하는 시점은?


- 딥변 : 한번쯤은 조선의 중간에 망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광해군의 시절에 망했더라면 큰 아픔은 있었겠지만 망국이라는 경험은 않했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전쟁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경험을 했던 조선이 그 경험을 새로운 조선을 세우는데 이용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오류였을 것이다. 


정치란 대신 싸우러 내보낸 것이라 생각한다. 싸우는 것을 국민들이 머라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다만 싸우데 제대로 싸우라고 해야한다. 저는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 대신 싸우고 대신 죽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좋은 풍습 중 사관제도를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장관들에게 군대를 안가는 대신 사관 둘만 붙여 놓으면 한국 정치가 얼마나 발전할 수 있겠는가? 


- 질문 : 책을 쓰려면 얼마나 공부를 해야한는가?


- 답변 : 지식전달은 알고 있는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전달이 된다면 좋은 전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란 심심한 직업이다. 본인도 너무 심심해서 다산학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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