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생명의 윤리를 말하는 것보다 윤리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앞서지 않을까? 윤리란 인간의 윤리이기 때문에 인간을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그 양태가 변화하며 그 생명이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고대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의 윤리적 입장들이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샌델의 윤리적 입장은 어떤가? 나는 이 짤막한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샌델의 핵심 논변은 인간의 삶이란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조작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논변이 종교의 영역으로 한정 지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이러한 생각은 ‘세속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이 든다. 이러한 생각은 ‘통념적’인 것은 될 수 있어도 ‘탈 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세속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꼭 신이 아니더라도 자연이 인간에게 삶을 준 이상 생명에 대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샌델은 생각하지만 자연이란 그저 물질과 에너지의 집합체라고 생각하는 다니엘 데넷과 같은 자연주의적 다윈주의자에게 그런 입장은 자연을 신격화하는 우상 숭배로 여겨질 것이다.

샌델은 우생학을 반대한다. 그것을 본질상 타인의 조작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역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서구 자유주의 철학의 기본 가정은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히려 벤자민 리벳의 고전적인 연구처럼 현대 과학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자기결정적인 주체라는 인식은 언어가 만들어낸 효과이라는 것이 현대 구조주의 사상의 주된 요점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은 인간의 자유를 도전하지 않는다. 애당초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거리낌없이 우생학적 수단을 사용한다. 인류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가축들을 품종 개량하는데 수많은 노력을 투자하며 그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인간을 ‘품종 개량’하는 것은 죄악시한다. 과연 무엇이 다른가? 샌델의 책은 그러한 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열망에 찬 저술이다. 그러나 다윈이 알려준 사실은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에서 인간의 (타 동물 종에 대한) 우월성의 기반을 찾으려는 시도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설득력 있게 논구하듯이 다윈주의의 함축과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인간관이다. 샌델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은 근대 서구 휴머니즘의 인간관이다. 서구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관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다. 자유로우며 이성을 지녔으며 따라서 다른 동물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 존 그레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의 잔재 속에서 형성된 유사 종교일 뿐이다. 니체나 다윈, 프로이트 등이 그려내는 인간 상은 이런 입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나 역시 우생학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 후손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샌델 역시 이러한 불쾌감의 근거를 분석하려는 마음에서 이 책의 저술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 조작을 반대하는 샌델의 논변에 상당한 결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쾌감의 정당함을 논증하려는 시도는 올바른 근거 위에 서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 담긴 논변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넓게, 그리고 더 깊게 사유하는 지적 모험을 시작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