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위기 신학

기독교와 위기 신학

코넬리우스 반틸

The Presbyterian Guardian, 1948년, 제17권


본 논문은 바르트주의(Barthianism)에 대한 간략한 연구로서, 반 틸 박사가 청옌바오(Cheng Yen Pao)—중국 대학생 기독교 운동(China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의 공식 잡지—에 기고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 본지는 해당 잡지 편집진의 허락을 받아 이를 게재한다. 반 틸 박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이며, 바르트주의에 대한 심층 평가서 *새로운 현대주의(The New Modernism)*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기독교와 현대주의(Modernism)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종교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제 세 번째 그룹이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위기 신학(Theology of Crisis)*이다.

이 신학의 주요 사상가인 칼 바르트(Karl Barth)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는 원래 현대주의자로 훈련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주의와 그 주요 신학자인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와 리츨(Albrecht Ritschl)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이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언어는 종종 역사적 개신교(Protestantism)의 언어와 흡사하다. 그 결과 많은 정통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통해 옛 복음이 새로운 강력한 표현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이들의 마음을 판단할 능력이 없지만, 위기 신학이 단순히 현대주의의 새로운 형태임을 증명할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


성경

바르트와 브루너는 자신들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theology of the Word)"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부정적 비평(negative criticism) 또는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이들은 성경의 언어가 곧 계시라는 정통적 교리를 거부한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의 "말씀의 신학"은 사실상 *경험의 신학(theology of experience)*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의 신학"이 아니다. 이 기본적인 점에서 우리는 다시 *구(舊) 현대주의(Old Modernism)*의 입장으로 되돌아간다.(1)


계시

바르트와 브루너는 자신들의 신학을 "계시의 신학(theology of revelation)"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들은 정통 기독교의 완결된 계시(finished revelation) 개념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계시는 항상 *행위(act)*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 일어나야만 계시가 성립된다. 그리고 인간이 이 상호작용에 참여하려면 단순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성령을 통해 인간의 계시 수용 행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알 수 있다(God can be known by God only)." 이는 곧 현대주의가 주장하는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자기의식을 갖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는 개념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2)


하나님

바르트와 브루너는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통적인 하나님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곧 계시 자체와 동일하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계시는 하나님과 신격화된 인간(divinized man)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완전히 인간과 동일시될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며, 인간을 완전히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브루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신적-인간적 만남(divine-human encounter)*과 거의 동일하다.

이들은 모두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존재(self-contained intertrinitarian existence) 개념을 강하게 거부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활동(intertrinitarian activity)을 창조, 섭리, 구속의 역사와 사실상 동일시한다.

결국, 우리는 다시 슐라이어마허와 리츨이 주장한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신(神)’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3)


인간

바르트와 브루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죄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정통 신학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의 내용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역사적 아담도 없었고, 낙원(paradise)도 없었으며, 원죄(fall)도 없었다.

오히려 완전한 상태란 *미래의 이상(ideal for the future)*이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의도를 암시하는 개념이다. 인간은 계시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이러한 이상을 자기 자신을 위한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이상을 온전히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이상(ideal)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이는 결국 현대주의의 인간론과 동일한 수준으로 회귀하는 것이다.(4)


그리스도

바르트와 브루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 관점에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리스도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을 상징할 뿐이다.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향하는 존재일 뿐이다.
  •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이 인간의 이상(ideal)이며, 계시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한 이상(ideal)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현대주의가 주장했던 ‘이상화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으로 되돌아간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도 그리스도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의 그리스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5)


결론

바르트와 브루너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복음은, 겉보기에는 정통 기독교의 용어로 표현되었지만, 본질적으로 구(舊) 현대주의의 복음과 동일하다.

이것은 변형된 복음이다.

  • 하나님이 없는 복음
  •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
  • 은혜가 없는 복음

즉, 자연인이 듣기에 만족스러운 복음이지만, 궁극적으로 절망을 안겨주는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더 교묘하고 위험한 새로운 현대주의(new Modern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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