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변증
정성욱 지음 / 홍성사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티타임에 나누기도 아까운 이야기들.

 

본서의 저자는 옥스퍼드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제자로 하버드-옥스퍼드를 졸업한 소장 신학자이다. 이 책의 뒤편에는 혼란의 시대를 시원하게 정리해 줄 해갈의 답변서라는 문구와 함께 장신대학교 총장 등 기독교계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난 이 책의 주요 논점들을 모조리 논박하려고 한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을 발군의 실력 가진 귀한 인재(진홍)라는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고작 이 정도 뿐이라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먼저 챕터 2를 보자. 정성욱은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해 주는 주요 증거로써 40명의 저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1600여 년에 걸친 세월의 기록이 모두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큰 증거가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왜 저자는 그 자신이 입증해 보여야 할 테제를 마치 자명한 사실인양 거론하고 있는가? 구약의 아가서를 보라, 그 책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남녀 간의 짙은 사랑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신약을 보라. 거기에는 마르틴 루터가 쓰레기 복음이라고, 바울과 요한 등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 못한 야고보의 공로주의 문헌이라고, 따라서 정경에서 제거되어야 할 문서라고 지칭한 야고보서가 있다. 이런 실례들을 정성욱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설령 정경에 담긴 책들의 주제가 비슷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다른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소유한 집단의 자기 검열의 결과라고 말이다. 이러한 검열의 결과가 바로 외경과 위경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1600여 년이 흘렀고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적 입장이 담긴 문헌들이 수 많은 저자에 의해 계속 기독교회에서 끊임없이 출간되어 왔다는 예만으로도 어느 정도 다른 방식의 설명이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 가지 더, 이 챕터에서 정성욱 C.S. 루이스를 거론하면서 기독교 변증의 유용한 방법으로 자연법에 호소하고 있는데 요즘과 같은 공약 불가능성의 시대에 자연법을 믿는 철학자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버마스 같은 구닥다리 빼고.) 이런 한물간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이유가 뭔지 난 잘 모르겠다.(설마 현대 사상을 잘 이해 못하는 건가?)

 

성경의 해석과 적용의 관계에서 정성욱은 해체주의 문학 이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전혀 그 이론의 도전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해체론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의 진위를 결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앞서 과연 텍스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마련할 수 없다. 해체론의 작업으로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집어낼 수 있는 토대가 모조리 제거된 것이다. 저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면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자만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불신자는 근원적으로 텍스트 의미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의 의미를 통한 불신자에 대한 전도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자면 정성욱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는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의도한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약 기자들의 구약 인용, 예컨대 마태복음 기자의 호세아서 인용 등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음으로 나는 챕터 5 9를 함께 묶어 논의하겠다. 이 두 챕터에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악의 문제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의도로 주관하는 이가 신이라면 이 세계의 악마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마저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선악과를 주었을 때 이미 신은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취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닌가? 정성욱은 죄의 원인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고 신은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라 함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라 하여도 이단이고 원인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성욱은 이단인가?) 정성욱은 신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방도로 신이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궁지에 몰고 있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낄낄.

 

그 다음은 챕터 8이다. 이 챕터의 앞 부분은 사실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 부분을 간략히 추린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부분은 불신자와 신자의 접촉점 파트다. 첫째, 둘째는 언급할 가치마저 없으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만약 니체에게 이런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그는 ‘당나귀라 비난하지 않을까?) 내가 겨냥하는 것은 3번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의 보편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의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기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성욱은 남편의 간음을 장려하는 문화권은 없으며 살인과 절도를 권유하는 문화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걸? 나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다윈주의가 가장 멋지게 설명해낼 수 있는 모범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생각한다. 진화 심리학의 기본 테제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은 진화의 산물이다 는 것이다. 살인과 절도를 장려하는 도덕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개체가 담지하고 있는 유전자는 종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자연 선택을 통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챕터 11에서 정성욱은 성경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과학적 실례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내가 인정하는 것은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즈가 인정하였듯이 다윈주의 역시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전제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킨스의 완고한 입장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으로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더 많은 내용을 썼으나 사이트의 성격 상 몇가지 부분을 삭제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티타임에 나누기도 시간이 아까운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맥그래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신학도들 사이에 상당한 추종자를 가지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이토록 저급한 것인지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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