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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야 진짜 - 어른의 어른 후지와라 신야가 체득한 인생배짱
후지와라 신야.김윤덕 지음 / 푸른숲 / 2014년 5월
평점 :
조선일보 기자 김윤덕이 후지와라 신야를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매끄럽게 읽힌다. 비교적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데도 부담스럽지 않다. 한국 아줌마다운 솔직한 질문과 신야의 넉살이 잘 버무러졌다. 기막히는 호흡이다. 다섯 시간 동안 이루어진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대화, 이런 공감, 이런 경이! 반짝, 환해지는 세계. 어딘가 넓고 깊어졌다는 기분이다.
구두닦이를 했을 때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봤지요. 직업으로서도 아주 비천한 일이었습니다. 앉은 자세에서 노동하는 업종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젊은 시절, 세상의 가장 낮은 관점에서 세상을 올려다 봤습니다. 아주 귀중한 경험이었어요. 도쿄 시부야 거리를 걷다 보면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을 보면, 나는 이들이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 것 같습니다. (본문 중에서)
신야의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한 권의 책에 모든 것이 담겼다. 규슈남아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부터 그 자신 곡절 많았던 사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가볍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는 솜씨가 놀랍다. 웬만한 소설보다도 재미있다. 편안함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지혜로운 일본인 할아버지는 슬픔을 자랑하지 않는다. 젠체하지 않는다. 나는 여행지마다 애인들이 있어요. 아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무슨 자랑거리라도 말하는 아이처럼, 슬쩍 고백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진맥을 하더니 "오늘 밤, 또는 내일 아침에 임종하실 것 같다"고 일러주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아버지의 인생을 정말로 축복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버지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카메라를 가져왔습니다. "아버지, 자, 치즈"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 물론 지금은 내가 선승인 양 죽음에 대해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지만, 당장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하고 발버둥칠지도 모르지요(웃음). 그건 여러분이 너그럽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도 사람이니까요. 하하! (본문 중에서)
사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신야는 이 책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크게 두 가지 관점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찍을 것인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찍을 것인가. 첫 번째 방식은 사진 찍는 사람의 자아가 개입되는데, 이 경우 사진 찍는 쪽이 주체가 된다. 후자의 경우 이와 반대로 피사체가 주체가 된다. 이 대립되는 관점이 신야 세계관의 기본 골격이라고 보면 되겠다. 신야는 피사체를 주체로 하는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는 왼쪽 눈을 렌즈에 대고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시력이 약한 왼쪽 눈이 좀 더 죽음 쪽에 가깝다고 여겨서라는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야말로 생명력 있는 삶이라는 역설로 들었다. 그는 생명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자연과 교감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눈앞의 현실을 묵묵히 살아낸다. 한마디로 야성적이다.
너무 이성적으로, 머리로 살려고 하지 말아요. 때때로 우리의 불행은 너무 많이 생각하는 데서 옵니다. 단순하게 사세요. 몸이 느끼는 대로, 야성을 지나치게 억누르려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돼요. (본문 중에서)
지난 밤, 티븨에서 조영남을 봤다. 늙었단 말 하지 마. 젊어서, 늙으면...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두 살 난 아이나 나나 지금이 가장 늙었어! 무슨 말 끝에 흥분해서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는데, 자꾸만 나는 저 일본의 '규슈남아'가 떠올랐다. "늙었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당신은 늙기 시작한 겁니다." 나이 듦이 서글프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은 신야의 대답이다. 말에는 영혼이 담겨 있어서 그 말을 뱉는 순간 어휘들이 살아 움직인다나. (늙었다는) 생각에 갇히면 진짜 늙는다는 말일 것이다. 늙는다는 건 무엇인가. 무감해진다는 것이다. 신야는 사십 중반이 된 형이 더 이상 집 없는 고양이를 쓰다듬지 않아서 슬펐다고 고백한다. 어릴 땐 둘이 함께 고양이를 쓰다듬던 형이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의 중역은 집 없는 고양이를 만지지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무감해진다는 건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야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걱정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평범합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아주 작은 것까지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평범함 속에 보물들이 잔뜩 묻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진짜 생명력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는 진실을 사진을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인간성의 결여는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낳고 있다. 신야는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에도 관심이 크다. 부모와 반목하고 거리를 떠도는 십대 청소년들과 안전제일주의에 사로잡힌 청년들, 일본 대지진 문제도 언급하고 있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토대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었다. 다시, 조영남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단순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살라는 것이다. 동년배인 신야를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역시 책에서 같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순간을 살라는 말은 사실 신선한 가르침은 아니다. 그런데 신야는 이 가르침을 말로 하지 않고 전생애를 통해 보여준다.
여행은 자기가 무너지는 일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다는 뜻이지요. (본문 중에서)
신야는 사진을 찍을 때 피사체와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진 찍는 쪽의 마음이 렌즈 너머 상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사진 찍는 쪽이 진심으로 다가가면 피사체도 마음을 허락하고 활짝 열어보인다는 것이다. 신야는 이 책에서 말보단 행동하는 삶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여러 번 무너졌다.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