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 창비세계문학 20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박원복 옮김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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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 뭔가 브라스 꾸바스'하죠. 창비에서 첫 선을 보이는 이 작품은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소설이라는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라는 찬사를 받는 브라질 작가 마샤두 지 아시스의 대표소설 가운데 맨 처음 씌어진 것인데요.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적 사실주의' 경향의 시초가 된 소설이기도 합니다. 1880년에 씌어진 이 소설은  한 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시간을 무색케 할 정도로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데요. 고전이라는 타이틀이 어색할 정도로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난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말도 안되는 존재요. 당신은 동화일 거요. 분명 난 꿈꾸고 있는 겁니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난 미쳤을 거요. 당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의 환영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재중인 이성이 통제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허황한 그 무엇일 뿐이지요. 자연이라고요? 당신이? 내가 알고 있는 자연은 그저 어머니일 뿐 적은 아닙니다. 삶을 재앙으로 만들지도 않을뿐더러 당신처럼 무덤만큼 무표정한 그런 표정을 짓지 않지요. (본문 중에서)


       작중화자인 브라스 꾸바스'가 자신이 죽은 날의 정황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죽은 사람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설정은 작품의 의도를 대변하고 있는데요. 이 사소한 형식적 전복을 통해 마샤두 지 아시스해묵은 관습에 익숙한 독자의 몽몽한 정신에 시원하게 한 방 날리고 있습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낑까스 보르바'라는 의심쩍은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작가는 그 뜻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데요. 낑까스 보르바'의 변화무쌍한 삶과 그의 궤변적 철학을 그럴 듯하게 풀어놓으면서 독자를 매혹하는가 싶더니, 막판에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내몰고 맙니다. 낑까스 보르바의 말발에 홀려 그도 그럴 듯하다고 동조하던 독자는 또 한 방 보기좋게 얻어맞습니다. 마샤두 드 아시스는 낑까스 보르바'나 도나 에우제비아', 로브 네비스' 등 신분층이 다양한 인물들이 내비치는 불안한 심리나 불확실한 삶의 행로를 통해 19세기 후반 브라질의 사회상을 담고 있는데요.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사랑과 연민, 행복과 불행, 정상 비정상 등...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인간의 삶에 안개처럼 드리워진 견고한 통념 같은 것을 소설 전반에 걸쳐 날카롭게 비꼬고 있습니다.

 

          가장 덜 나쁜 일은 추억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현재의 행복을 믿어서는 안된다. 그 행복 속에는 카인의 침 한방울이 담겨 있다. (본문 중에서)

 

      소설적 구성 면에서도 마샤두 지 아시스는 실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설은 160개의 짧은 장들로 이뤄져 있는데요. 어떤 장은 서로 이름만 부르다 끝나는가 하면, 긴 꼬리를 잇는 말줄임표로만 이루어진 장도 있습니다. 브라스 꾸바스의 감정 기복을 반영하는 문장들 역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말의 고삐를 붙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합니다. 서사보다는 주인공의 정서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방해를 받지 않고 평탄한 독서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평탄하다? 음. 아무래도 주관적인 감상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네요. 혹자는 지리멸렬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는데요. 지리멸렬할지는 몰라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브라스 꾸바스 식' 해학과 풍자가 행간 곳곳 곰틀거리고 있거든요.

 

     단 한 번의 그 키스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그 순간은 짧았지만 열렬한 사랑이었으며, 달콤함, 공포, 원한, 고통으로 끝날 희열, 기쁨 속에 피어오를 혼란의 삶을 알리는 한편의 서곡이 되었다.(...) 즉 혼란과 분노, 절망과 질투의 삶을 알리는 서곡이 되었다. 어떤 시간은 지나치게 많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고, 다른 시간이 도래해 그 앞의 시간을 삼킬 것이다. (본문 중에서)

 

      사후세계의 빛 속에 빠르게 펼쳐지는 삶의 장면들처럼 브라스 꾸바스는 삶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짧지만 강렬하게 회고하고 있는데요. 그의 삶, 혹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비르질리아, 그의 연인입니다. 언뜻 보면 브라스 꾸바스의 나머지 삶은 이 한 여인과의 추억을 감싸는 껍데기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미혼자인 브라스 꾸바스와 귀부인 비르질리아의 밀애는 역설적으로 그 나머지 삶과 나머지 사람들을 투영하는 소설적 장치에 불과합니다. 둘의 관계를 의심하면서도 사회적 체면 때문에 속만 끓이는 비르질리아의 남편 로브 네비스, 그들의 은밀한 사랑을 돕는 도나 쁠라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삶과 반응들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우리 어린 시절의 장난질에서는 항상 왕, 장관, 장군,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 고위 관리 역할을 택하곤 했다. (본문 중에서)

 

      소설에는 앞서 언급하지 않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브라스 꾸바스에게 사제가 되기를 강권하는 삼촌, 아들이 정계에 입문(아버지에게 정계 입문'은 가문을 빛내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하지 못한 절망감으로 죽은 아버지, 브라스 꾸바스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알고 떠나는 절름발이 소녀 등. 이들을 통해 마샤두 지 아시스는 인간 욕망의 양면성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인간의 사랑, 사회적 통념 앞에 가물가물 흔들리는 연약한 촛불 같은 인간 존재를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64세에 결핵으로 사망한 브라스 꾸바스는 자신의 사인이 실은 고약'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브라스 꾸바스가 야심차게 발명한 이 고약', "인류의 우울을 완화시키는 숭고한 의약품"은 "인류애"와 "명성에 대한 갈망"이라는 양날의 칼'을 상징합니다. 비르질리아'와의 관계 역시 정계 입문의 야심에서 시작되었던 것을 볼 때, 꾸바스, 결국 그 자신을 삼킨 것은 명예욕'이라는 불치의 병'이었던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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