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책읽기 - 나를 다독여주고 보듬어주세요
서유경 지음 / 리더북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손끝을 간지럽히는 당신들의 지문. 포획을 노리는 거미줄 같은 밑줄들. 행간마다 고인 너의 시간, 모서리 접힌 페이지에 담긴 감정들... 사람 손을 탄 책, 그러니까 헌책은 은밀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90년대만 해도 헌책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기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 같아요. 펜팔 시대이기도 했지요. 무심하게 넘긴 책의 페이지에서 모르는 이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같은 것을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유치하고 은밀한 낙서나 머리카락, 압사한 곤충의 사체, 심지어는 말라붙은 코딱지마저도 ^ ^ 어떤 정취를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의 간극.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의 다름을 넘어선 기묘한 연대감. 접힌 모서리를 펼칠 때의 설렘과, 오래된 밑줄 위에 다시 밑줄을 그을 때, 그 부듯한 마음. 그런 사소하고 순간적인 몸짓과 느낌이 나를 위로했고, 그래서 헌책방을 자주 찾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실로 사소하고 순간적인 몸짓이나 눈짓, 뜻밖의 감정들. 아아! 하는 짧은 감탄사 같은 것들 아닐까요.

 

    당신은 종이에 물을 뿌려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묻어 나온 것들은 간혹, 당신이 읽어낼 수 없는 나의 여백이거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번지는 먹구름이거나

     나는 여기서 쉼, 표를 찍는다

 

          - 김지녀, 『시소의 감정』, 민음사, 80~81쪽

 

 

   우리 삶은 "당신이 읽어낼 수 없는 나의 여백"과 '내가 읽어낼 수 없는 당신(들)의 여백'으로 채워진 거대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행간들, 누군가 접어두고 잊어버린 페이지들을 무심히 넘기다 불현듯, 아아, 마음을 두드리는 단어나 문장을 만나는 순간들이 있죠. 힘주어 밑줄을 긋는 그 짧은 순간. 그런 공감의 순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무거운 삶을 버티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 조경란, 『불란서안경원』, 문학동네, 304쪽

 

 

     지금 소개하는 책 『치유하는 책읽기』는 여백의 시간을 채우는 밑줄들로 가득합니다. '책에 관한 책'이 속속 쏟아져 나오고 또 많이 읽히는 것 같은데요. 이 책 역시 책 속 책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쓴 서유경은 은희경과 김연수, 정미경, 한강, 김숨, 김이설의 소설을 좋아하는 한국문학 애호가입니다. 책에 실린 문장들 모두 한국문학(소설, 시, 산문) 작품에서 옮긴 것들인데요. 방대한 독서량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종 차분한 어조로 책 속 문장을 소개하는데요. 아직 읽지 않은 책들도 이미 읽어버린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편, 한 권의 책에서 고른 한 구절...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

 

     커피 한 잔을 마실 때에도 욕심이 자란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 그러니 일회용 믹스로도 충분한데, 순간 커피메이커가 있다면 더 맛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거란 기대, 원두를 갈아 마시면 그 향은 얼마나 황홀할까, 상상한다. (...) 우리가 잊고 있던 삶에 대해 시인이자 여행작가안 최갑수는 산문집 『잘 지내나요,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일은 분명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을 포기하는 일, 그것 역시 새벽 두 시에 잠들어 세 시에 깨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버린다는 건 어찌됐든 내게서 떠나가는 일이다. 떠나가는 것만 생각하고 다가올 것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게 된다. (119~120쪽)

 

 

    전문적인 서평이나 자세한 책 소개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읽기에 따라서 책 이야기는 배경으로 치부해도 될 정도니까요. 그러니까, 책에 대한 이야기이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삶과 문학의 경계를 구분짓는 일이 무의미해 보입니다. 기차를 타고 연인을 만나러 가던 기억, 설거지하다 아끼는 컵을 깬 일, 공부와 취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촌 동생 이야기... 서유경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에 힘주어 밑줄을 그어요. 밑줄을 따라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 억눌린 욕망과 은밀한 기억, 감정들과 조우하게 됩니다. 나 자신도 몰랐던 혹은 모르는 체하고 싶었던 수많은 얼굴들. 그것들을 똑바로 응시하고 긍정하는 서유경의 담담한 태도에, 아아! 하고, 나직하고 짧은 동조의 목소리를 보냅니다. 

 

 

                     서유경(자목련) 님의 블로그 http://littlegirl73.blog.me

 

 

 

 

 

 

             (*)

              서평에 소개한 인용문은 모두 『치유하는 책읽기』에서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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