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도시 - 우리 시대 예술가 21명의 삶의 궤적을 찾아 떠난 도시와 인생에 대한 독특한 기행
오태진 지음 / 푸르메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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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초록강에는 겨울이 올 것이다.  겨울이 오면 강은 강물이 얼지 않도록 얼음장으로 만든 이불을 덮을 것이다. 강은 그 이불을 겨우내 걷지 않고 연어 알을 제 가슴 속에다 키울 것이다. 가끔 초록강의 푸른 얼음장을 보고 누군가 지나가다가 돌을 던지기도 할 것이고, 그때마다 강은 쩡쩡 소리 내어 울 것이다. 봄이 올 때까지는 조심하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어린 연어가 자라고 있다고. 

                                     ㅡ 안도현《연어》 일부

 

 


   《연어》의 '초록강'과 같은 장소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리를 품고 키워준 어머니의 땅, 우연처럼 떠도는 우리를 운명처럼 받아준 고마운 장소들 말이다. 《내 인생의 도시》는 우리 시대 예술가 스물 한 명의 '초록강'을 찾아나선 특별한 여행기록을 담고 있다. 책을 엮은 오태진 씨는 조선일보 수석 논설위원이다. 작년 초 기획한 <나의 도시 나의 인생>이라는 주간연재를 맡아 편집국 기자와 격주로 쓴 것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까지 치열한 삶의 행보를 이어온 분들을 찾다 보니 예술가, 그중에서도 문인에 치우치게 되더라고 했다. 스물 한 명 중 열네 명이 시인과 소설가다. 그러나 문학기행은 아니다. 한 사람이 '거기' 흘러들기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기행이다.

 

 

   "왜 그땐 그리 앓았을까. 되돌아보면 그건 탐욕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승원은 "바다도 예전 젊어서 만났던 바다가 아니더라"고 했다. 그를 낳아준 장흥, 지금 자신을 보듬어주는 바다를 그는 우주의 시원, 우주적 자궁이라고 불렀다. "내게 득량만 바다는 화엄의 바다이고, 내 소설의 모태"라고 했다. 그는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장흥의 요소들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안다.

 

                                             ㅡ (소설가 한승원의 '장흥') 중에서

 

 

 

   제목(내 인생의 도시)에서 '도시'는 시골의 대립어가 아니라 불특정 '장소'를 두루 일컫는다. 책에 소개된 스물 한 곳의 장소 중에는 도시도 끼어 있지만 ㅡ 영화감독 곽경택의 부산, 소설가 은희경의 일산, 화가 사석원과 소설가 조경란의 서울 동대문과 봉천동 ㅡ 자연 속 시골이 대부분이다. 탐욕을 버리고 예술가의 감성을 벼리기에 좋다는 것이 시골서 터 잡고 사는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전교조 지회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운동가'로 활동했던 안도현은 1994년 산골 학교에 복직하면서 자연에 눈을 돌린다. 거대 담론에서 우리 가까이 있는 작고 일상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도 모르고 살았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담긴 시 <애기똥풀>도 그때 썼다. 이후 안도현은 시적감수성과 따스한 문장으로 성장통을 그려낸 <연어>와 소외된 이웃을 사랑하며 따뜻한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 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안도현은 "도시 학교에서 근무했다면 얻지 못했을 결실들"이라고 했다. "1980년대에 삶에 부딪치는 건건이 늘 분노하고, 상처받고 스스로를 통제하고 못하고 망가졌던" 이철수도 농사 짓고 자연 속에 살면서 작품에 꽃과 새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설가 한승원이나 김도연처럼 귀향한 경우가 있고, 시인 유홍준이나 이원규처럼 바람처럼 흩날리다 정착한 경우도 있다. 귀향이든 우연처럼 흘러들었든 자신을 받아주고 품어준 자연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만은 한결같이 엿보인다.

 

 

 

    귀향한 첫해 여름, 단편 하나를 탈고했지만 보여줄 사람이 없었다. 김도연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서다 반갑게 짖는 개를 붙들고 소설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듣던 개가 지루했던지 개집으로 들어가면 다시 끌어내기를 거듭했다. 주무시던 어머니가 나와 "너 뭐하는 짓이냐. 잠이나 자지"라며 타박하는데도 한 편을 끝까지 다 읽어줬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목이 잠겨 있었다. 옷에도 개와 씨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그를 보더니 집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ㅡ (소설가 김도연의 '평창') 중에서 

 

 

 

   오태진은 서문에서  "이야기는 되도록 많이 들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담는 것이기에 정확해야 했고 그래서 꼬치꼬치 물었다. 어떤 분은 농반 '인터뷰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했다."면서 오랜 생활 몸에 밴 기자 습성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책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 스물 한 명의 삶의 이야기와 인터뷰 내용이 전부이다. 오태진은 혹여 책이 재미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실은 나도 이 책을 펼치면서 '재미'를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책장冊張 넘어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다. 사족이 없이 깔끔하고 적당한 서정이 흐르는 문장도 참 좋다.

 

 

   긴 겨울 밤, 그는 나무를 때는 보일러실로 들어간다.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장작을 때면서 돌배 술을 홀짝거린다. 아궁이의 열기와 술기운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김도연은 생각한다. 이 고향집이 지구의 막다른 절벽이라고.

 

                                                    ㅡ (소설가 김도연의 '평창') 중에서

 

 

 

   소설가 문순태는 수몰된 장성댐 아래 가라앉은 마을을 무대 삼아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기 전 찾아간, 이제는 호수가 된 마을터를 둘러보던 그때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물속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 물속 마을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기억(혹은 관심)에서 수몰된 어떤 장소를 환기시킨다. 저 아래 잠긴 물속 마을에는 우리가 두고온 사람들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곳, 그들이 그립다.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미안하다. 머잖아 '내 인생의 도시'를 찾아봐야겠다. 가서, 오~~래오~래 들여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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