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왈 曰曰 - 하성란 산문집
하성란 지음 / 아우라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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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 시끄럽다. 개소리. 제목을 보고 스쳤던 생각. 언젠가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성란 작가가 인터뷰를 했다. 작품 얘기였던 것 같다. 그때 작가의 말하는 본새는 시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굉장히 차분했다. 말하는 음성이 조용했다. 자연적으로 귀 기울이게 만드는 고요한 울림을 가진 그에게 순간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같다. 그때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인가. 그의 산문집 제목은 조금 의외였다.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도 말(曰)이 아쉬워서 집어든 책 .


 

   2009년 1월 19일부터 그해 연말까지 한국일보 '길 위의 이야기'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는다. (...) 그렇지 않은 해가 없었겠지만 작년 한 해도 다사다난했다. 많은 이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거라던 그 마음이 그새 아스라해졌다는 것에 놀란다. 바꿔 말하자면 이 짧은 글들이 다시는 못 올 2009년에 바치는 송사쯤으로 읽히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해 보름 정도를 빼고는 매일 거르지 않고 썼다는 650자 산문 묶음집이다. 정말 650자일까. 나와 같이 호기심 많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몇몇 글들의 글자수를 세어보았다. 띄어쓰기 포함해서 650자가 맞다. 이렇게 얘기해도 분명 세어보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제목을 '왈왈'로 정하고 보니 지난 한 해 정말 왈왈(曰曰)댔다는 느낌이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쉬고 작은 목소리나마 제 목소리를 내려 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도 그렇다. 정말 왈왈댔다는 느낌이다. "작은 목소리나마 제 목소리를 내려"했다기보다는 시끄럽기만 했다. 생각만 해도 시끄러울 정도이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제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작가의 말이 다소 의심스럽다. 누군가는 제 목소리를 들을 거라는 가능성 내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그래 다른 사람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외이다. 어릴 때 일기 쓰던 생각이 난다. 방학 때 썼던 내 일기장이 전교생에게 공개된 적이 있다.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쓴 어린이의 글이라고 했다. 솔직하게 쓴 건 사실이다. 그런데 몇 번 공개가 되고 보니 '일기를 가장 솔직하게' 쓰던 어린이는 머리를 굴렸다. 이 글을 그 친구가 보겠지. 그 선생님이 보겠지. 염두에 두면서 일기를 쓰게 되었다. 거짓을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밀한 자기 안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와 소통하는 일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써댔던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왈왈댔던 것 같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가 아니라 누군가는 들어줘야 하고 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 왈왈.

 

 

   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 사람살이를 어렵게 하는 것들은 많다. 어쩔 수 없는 주변상황이 그렇고 내 마음 같지 않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무에게나 질문을 던져보라. 미움과 절망, 후회와 변명의 말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말(曰)로 시작해 말(曰)로 끝나는 유별난 종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난 지 18개월 된 조카가 말을 뗐다. 다섯 살 제 누나와 엄마가 놀고 있으면 곁으로 와서 말을 한다. "나도." 그래 너도 말의 세계에 입문했구나. 본격적인 사람살이 돌입했구나. 사람 물이 들어가는구나. 어린 조카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는 자라면서 말의 위력(威力)과 무력(無力)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신인일 땐 어딘가 모르게 촌스럽던 연예인들도 몇 년 지나면 세련된 모습이 된다. 그런 걸 '방송국 물 좀 먹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시골 사는 친척들도 내가 놀러 갈 때마다 서울 물은 다르네, 라며 웃곤 했다. 물도 물이려니와 먹는 음식에 따라 쌍둥이의 얼굴도 다르게 바뀌는 듯하다. 어쩌다 헤어져 서울과 유럽에서 따로 자란 쌍둥이는 어딘가 모르게 모습이 많이 달랐다. 작년 여름 아빠와 떨어져 시카고에 살고 있던 시조카가 서울에 왔다. 그곳엔 한국인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애는 어릴 적 배웠던 우리말을 떠듬떠듬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못 알아듣는 우리말은 영어 사전을 뒤적여 알려주었다. 그애의 아버지는 7년 동안이나 미국에 가 있었으면서도 고향 사람들보다 더 사투리를 진하게 하는 이였다. 방송국 물이나 서울 물처럼 시카고 물이라는 것도 있다. 제 아빠를 닮은 그애는 뭐랄까 어딘가 모르게 버터를 좀 바른 듯한 '미국에 사는 한국인' 표시가 팍 났다. 제 아빠가 엉뚱한 말을 하자 그애가 곧바로 되받았다. "아빠, 약 했어?" 미국 친구들과 하던 우스갯소리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니 좀 이상하긴 했다. 그애 아빠는 아이도 못 알아들을 진한 사투리로 버럭 화를 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사람의 얼굴을 변화시킨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달라질 것이다.

 - 물과 말, 전문


 

 

   을 쓰다 보니 책에 대한 내용보다 '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풀어놓고 있는 것 같다. 짖고 싶은 본능이 문제다. 큰일이다. 다시 책 얘기를 하기로 한다. 이 책을 펼친 건 지난 해 끄트머리에서이다. 생각은 많고 말을 풀어놓을 곳은 없어 속이 시끄럽던 때였다. 좀 심각했다. 그래서 작가가 아무리 왈왈대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아주세요." 지하철역 입구에서 술 취한 사내의 말을 흘려듣고 지나쳤다던 작가의 경험담이 떠오른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자연 듣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 아닐까.

 

 

 

   의 무한한 매력에 취해 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황홀할 지경이었다. 책,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말(曰)들을 타고 신나게 달려왔다. 치기(稚氣)와 허영(虛榮)의 시절을 바람처럼. 그리고 잠시 멈춘 길,위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가 수상쩍다. 내 것 아닌 말의 허울 속에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홀려 있었나. 나는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성란 작가의 조용한 짖음- 《왈왈》 -을 들으면서 나는 말(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또 딴청을 부린 셈이다. 그래도 변명할 건덕지는 있다. 작가는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일기 쓰던 어린이를 생각한다. 누가 듣든 듣지 않든 개의치 않고 왈왈 짖어댔던 가장 솔직한 아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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