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의 기억은 전체(as a whole)로서가 아니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부적인 부분(as a part)으로서 기억되어야 비로서 소중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이름이나, 생김새, 목소리같은 객관적인 정보보다, 애정의 주체와 객체에서만 교환되는 사소한 정보들로 인해 사랑은 더욱 사적이고 특별해 지며 소유물로서 실존하게 되고, 어쩌면 누군가는 평생을 그 기억에 붙들려 옴짝 달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자코메티가 오브제의 원형을 탐구하기 위해 시선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했던 방식을 저자는 소설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폴란드를 떠난 알마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또 알마를 떠나보낸 레오가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들의 남긴 단편적 증거물들을 통해 살을 발라낸 문자그대로의 원형의 사랑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거지요. 적어도 그 사랑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동시에 얼마나 슬펐는지 알기 위해 필요한 건 죽은 아이작의 집에 걸려있던 사진 낡은 사진 한장으로 충분하니까요.

초반에는 다중화자의 기억의 편린들을 모으고, 재배치하는 것이 피곤하기도 했고, 낭만적이긴 하나 단촐한 서사를 메꾸기 위해 공연히 형식에 치중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끝까지 치밀하게 조여가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플롯을 완성해가는 작가의 능력은 소설의 마지막으로 다다를수록 빛을 발합니다.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의 실험성과 완숙한 경지에 오른 노련한 작가의 통찰을 동시에 가진 소설이라고 하면 너무 극찬일까요?

아직 쓴 책보다 쓸 책이 더 많은 젊은 작가라니,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군요.

(이젠 정말 늙었나봐요, 전엔 저보다 어린 작가의 프로필을 보면 가슴 한켠이 덜컹했었는데(뭐냐, 나는!), 무덤덤한걸 보니..^^)

P.S. 우연이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읽은 바람의 그림자랑 설정이 많이 비슷하네요. 1. 소설 속의 소설이 존재하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소설이고 그 소설제목이 진짜 소설의 제목이라는 점 2. 어린 화자가 소설속의 소설의 비밀을 풀어나간다는 점 3. 운명을 관통하는 단하나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점 4. 결국에는 소녀(소년)가 소설속의 소설의 작가를 만난다는 점...무엇보다 둘다 책읽는 동안 무지 행복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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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7-01-3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작가 나이랑 내 나이랑 비교해보고는 괜히 혼자 가슴 철렁하는거요. 히히.
덕분에 좋은 책 소개받았어요. Fox in the snow님이 달아놓으신 리뷰 제목이 괜히 뭉클한거 있죠. ^^

치니 2007-01-3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두가 정말, ...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제가 옛사랑의 기억을 너무나도 초라하게 갖고 사는 이유도 저것일테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 ^-^

Fox in the snow 2007-01-31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까칠해져서 집중이 안돼서 그렇지 안그랬으면 책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을 수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