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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의 옷>은 내가 두 번째로 읽게 된 아멜리 노통의 소설이다. 책의 대부분이 대화체로만 되어 있는 이 독특한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주인공이자 작가 자신인 아멜리 노통은 어느 날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화산 폭발에 의해 용암 아래로 사라져 간 고대 도시 폼페이가 정말 단순히 자연재해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 혹시 미래의 어느 누군가(현재보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가 고대 도시의 유물과 도시를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고의로 화산 폭발을 일으켰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녀는 이 기발하고도 엉뚱한 생각을 자신의 친구에게 농담삼아 가볍게 말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자신이 원래 살던 곳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26세기로 납치 된 것이었다. 그녀가 품었던 폼페이에 대한 추측은 사실이었던 것. 그런 위험한 사실을 알게 된 그녀를 26세기의 사람들은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26세기로 가게 된 아멜리는 폼페이를 그렇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셀시우스와 길고 긴 대담을 하게 된다.
최고 엘리트 계층인 셀시우스는 아멜리에게 26세기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고의적으로 화산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를 사장시켰던 과정을 이야기한다. 지능은 물론이요, 외모까지 등급을 나눈 철저한 계급사회,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모두 와해되어 버린 사회, 계약결혼 제도가 통용되는 사회, 폼페이라는 숭고한 유적지 보존을 위해 몇 천 명의 목숨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바꿀 수 있는 사회, 지구의 반인 남쪽이 가난이라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버린 사회. 아멜 리가 셀시우스를 통해 듣게 된 26세기는 이토록 끔찍하다.
그녀 특유의 독설이 섞인, 그러면서도 재치있는 언변으로 셀시우스를 공격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무지하다고 말하며 그녀가 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5세기의 조선시대에 사는 누군가가 지금 현재의 이곳으로 와 나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 사람은 나와 이 시대를 끔찍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 사람의 사고를 이루고 있는 그 시대의 상식과 통념같은 것들이 얼마나 한 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사회 전반에 구축되어진 인권이라든지, 자본주의 원리든지 하는 것들이 하나의 눈가림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멜리는 자신이 살던 세계로 되돌려 달라고 셀시우스에게 매달리고, 부탁하고, 협박하지만, 셀시우스는 냉정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최고 지배자의 결정에 의해서만 따를 수 있다고. 그런데 소설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녀는 돌연 원래 그녀가 살던 시대로 되돌아간다. 최고 지배자의 마음이 변한 건가? 그저 그녀는 셀시우스와 수다스러운 말싸움만 했을 뿐인데. 작가는 그런 처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 같지만, 좀 생뚱맞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소설은 대부분, 슬픔을 간직한 어떤 비극적인 내음을 풍기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소설들, 아니 최소한 아멜리의 소설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