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 비주얼족 16
카나츄 쿠미 지음 / 시공사(만화)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캐릭터가 재미있고,
연출과 스토리 라인이 시원시원하여 즐겨 보던 만화책.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여자가 나온다.
모두 신기에 가까운 화장술로, 또는 천문학적인 돈으로 전신성형수술을 한 후 미인이 된 OL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예뻐지기 위해 수술을 하고 화장을 하는게 뭐가 어때?
세상은 어차피 외모로 모든 걸 판단하는 걸.
예뻐지고 나서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되는 거 아니야?

우스꽝스런 캐릭터들의 우왕좌왕 러브스토리와 회사 내에서의 각종 에피소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하지만,
단순히 삼류 만화로 간과할 수도 없는 것이 그 속에 모든 여성들의 미에 대한 욕망과 고민, 그리고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얼굴(?)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이상,
성형수술에 돈을 들이는 게 꼭 필요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성형수술한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거나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는다.
아마도 아름다움에 대해 지나치게 경도되었다가도 그 상대가 성형수술을 한 인공미라는 것을 아는 순간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이 우스워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보이지만(-_-) 순수하게 사랑할 줄 아는 미에,
능력있는 캐리어우먼 사유리,
페미날시스트(페미니스트+나르시시즘)를 외치는 마에코.

이들이 비록 화장과 성형수술로 만들어진 미인이더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줄 알기에
꽤나 사랑스러워보인다.

그런데.. 이거.. 엄청 질질 끈다.
웬만하면 그냥 끝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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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니코 일기 5
마리 오자와 지음, 정혜영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더란다. 아무도 욕을 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몽땅 갖다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종종 듣는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난 어떤 도덕적 비난의 말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비교적 안정된 가정의 평범한(?) 부모 아래에서 성장한 나 역시 가족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결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에 그런 지긋지긋한 가족이란 존재를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혈연이나 어떤 법적 관계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한 꼬마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 여자가 있다. 독신으로 자유로운 싱글 생활을 하고 있는 방송작가 케이가 그녀다.

그녀는 8년 전 어느 유명 여배우의 매니저로 일을 했었는데, 임신을 한 여배우의 출산을 비밀리에 도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그 여배우가 처치(?) 곤란해진 숨겨둔 딸 니코를 그녀에게 보내버린 것.

표면상으로 보면 케이와 니코는 일종의 계약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니코의 엄마인 시노 미후유가 케이에게 매달 양육비와 수고비를 보내주고, 케이는 시노 미후유 대신 니코를 돌본다.

그러나 ‘give & take'가 확실한, 그 살벌해 보이는 관계도 그 사이에 오고가는 어떤 감정의 교류 때문에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니코는 ‘케이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고 말하고, 케이는 프로포즈하는 남자 대신 자신이 딸처럼 여기는 니코를 선택한다.

그들은 혈연관계도 아니고 그 어떤 법으로도 단단하게 묶여있지 않은 관계이다. 언젠가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그야말로 불안정한 관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타성에 젖지 않고 더욱더 애틋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완전하게 마음을 여는 데는 얼마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걸까.

내 경우는 꽤 오래 걸리는 편이다. 오래 걸릴뿐더러 너무나도 까다로워 아주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문이 잘 열리지도 않는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 사람’이라고 느낀 사람과 주고받는 감정의 기쁨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안다.
그것은 사람을 꽤 착하게 만든다.
(어쩌면 정말로 ‘함께가는세상’ 덕분에 정서적으로 순화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없다, 우정은 없다, 모든 것은 허상이며 우리는 모두 허깨비를 쫓고 있는 것이라고 시니컬하게 내뱉는 것이 쿨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일 뿐이다.

물론 완벽하게 충족감을 주는 관계란 없다. 사람이란 원래가 완벽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란 ‘give & take'의 기본바탕 위에 이루어지는 타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까다롭게 굴며 따지지 않으련다.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있어 나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둘 모두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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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막스 프리쉬 지음, 봉원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이 책이 아니라 82년도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누런 종이의 양장본 책으로 읽었다.

보통 지하철에서 소설책을 읽는 나로서는 너무도 무거운 이 책을 매일 들고 다니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이 유난히 더 힘들었던 이유는 바로 엉망인 책의 번역과 편집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퀘퀘한 책 냄새 맡는 재미가 쏠쏠하여 도서관의 오래된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갔을 그 책의 역사에 나 역시 한몫하는 것이 설레이기도 했다. 도서관 안의 책들은 시큼한 낭만을 풍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읽다보니 예전에 내가 그 책들을 어떻게 '견디'며 읽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짜증나는 오문과 잘못된 맞춤법을 책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빨간색 플러스 펜을 들고 꼭 달려들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날 짓눌렀다.-_-;

각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는 캐릭터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호모 파베르는 라틴어로 도구를 만들어 쓰는 인간을 뜻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호모 파베르'는 주인공 발터 파베의 성향을 규정짓기도 한다. 실제로 고급 기술자인 파베는 사색적이고 감성적인 것의 가치를 모르는 철저하게 기계적인 인간이다.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그는 자신의 애인이 임신했을 때도 그가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유태인이기에 정치적 상황으로 봤을 때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여 청혼을 하려 한다.
(물론 그의 애인인 한나는 그의 이런 성향을 감지하고 떠나버린다.)

인간성이 결여된 그는 결국 철저하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좀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마치 권선징악의 그것처럼 비인간적 성향을 지닌 호모 파베르는 철저하게 벌을 받는 것 같다.)

애인과 헤어지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는 여행길에서 한 어린 여자를 만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그는 그녀에게 곧 청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난다.(사랑이라기 보다는 젊은 여자에 대한 육체적 욕망의 표현으로 보이긴 했다.)

그런데 여행 도중 해변가에서 그녀는 뱀에 물려 죽음을 맞이하는데, 곧이어 그녀가 바로 파버의 딸이었음을 알게 된다. 건강상태도 안 좋았던 그는 위암판정을 받고 크나큰 정신적 충격에 혼란에 빠지고 점점 죽어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호모 파베르와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와 다른 사고를 지닌 소수의 사람들을 호모 파베르들은 쉽게 비웃곤 한다.
작가는 그런 현대의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렇게 살지 마라.
너넨 인간이잖아.
안그러면 얘처럼 벌받는다... 뭐 이런 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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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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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벌써 몇 달은 된 것 같은데...-_-

친구의 극찬으로 읽었던 책. 그러나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 그랬는지 생각보다는 그냥 그랬다.

재미있게 잘 쓴 소설임에는 분명하나 그 이전의 역사소설과 큰 차이를 잘 모르겠다. 겉포장은 ‘새로운 형식의 역사소설’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 내면적인 부분은 ‘김주영의 역사소설’과 큰 차이를 모르겠다.
뭔가 2% 부족하다고나 할까나.

멕시코로 가는 일포드 호 안에서 조선시대의 각계각층의 계급들이 서로 뒤엉키는 장면은 분명 이 소설에서 압권이다. 굉장히 상징적이면서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후에 이 소설은 너무 성급히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최소 두 권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길게 늘여쓰기 보다는 함축적으로 세련되고, 모던(?)하게 한방에 끝내버리는 게 김영하에겐 더 어울리지만 처음 벌여놓았던 것에 비해 이 소설은 충분히 말해주지 않고 무책임하게 끝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 자체보다는 책에 딸려 있는 남진우의 해설이 더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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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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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은 내가 두 번째로 읽게 된 아멜리 노통의 소설이다. 책의 대부분이 대화체로만 되어 있는 이 독특한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주인공이자 작가 자신인 아멜리 노통은 어느 날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화산 폭발에 의해 용암 아래로 사라져 간 고대 도시 폼페이가 정말 단순히 자연재해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 혹시 미래의 어느 누군가(현재보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가 고대 도시의 유물과 도시를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고의로 화산 폭발을 일으켰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녀는 이 기발하고도 엉뚱한 생각을 자신의 친구에게 농담삼아 가볍게 말한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자신이 원래 살던 곳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26세기로 납치 된 것이었다. 그녀가 품었던 폼페이에 대한 추측은 사실이었던 것. 그런 위험한 사실을 알게 된 그녀를 26세기의 사람들은 가만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26세기로 가게 된 아멜리는 폼페이를 그렇게 만들었던 장본인인 셀시우스와 길고 긴 대담을 하게 된다.

최고 엘리트 계층인 셀시우스는 아멜리에게 26세기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고의적으로 화산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를 사장시켰던 과정을 이야기한다. 지능은 물론이요, 외모까지 등급을 나눈 철저한 계급사회,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모두 와해되어 버린 사회, 계약결혼 제도가 통용되는 사회, 폼페이라는 숭고한 유적지 보존을 위해 몇 천 명의 목숨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바꿀 수 있는 사회, 지구의 반인 남쪽이 가난이라는 이유로 모두 사라져버린 사회. 아멜 리가 셀시우스를 통해 듣게 된 26세기는 이토록 끔찍하다.

그녀 특유의 독설이 섞인, 그러면서도 재치있는 언변으로 셀시우스를 공격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그녀를 무지하다고 말하며 그녀가 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15세기의 조선시대에 사는 누군가가 지금 현재의 이곳으로 와 나와 대화를 나눈다면, 그 사람은 나와 이 시대를 끔찍하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한 사람의 사고를 이루고 있는 그 시대의 상식과 통념같은 것들이 얼마나 한 개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 근대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사회 전반에 구축되어진 인권이라든지, 자본주의 원리든지 하는 것들이 하나의 눈가림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멜리는 자신이 살던 세계로 되돌려 달라고 셀시우스에게 매달리고, 부탁하고, 협박하지만, 셀시우스는 냉정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최고 지배자의 결정에 의해서만 따를 수 있다고. 그런데 소설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녀는 돌연 원래 그녀가 살던 시대로 되돌아간다. 최고 지배자의 마음이 변한 건가? 그저 그녀는 셀시우스와 수다스러운 말싸움만 했을 뿐인데. 작가는 그런 처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 같지만, 좀 생뚱맞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소설은 대부분, 슬픔을 간직한 어떤 비극적인 내음을 풍기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소설들, 아니 최소한 아멜리의 소설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다. 소설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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