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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좋은게 뭐지?
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닉 혼비
닉 혼비의 다른 소설들에서처럼, 이 소설에서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평범하다 못해 별 볼일 없는 일상에 단단히 발을 내딛고 있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은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고, 치사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처럼 소설이 우울하지만은 않다.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툭툭 내뱉듯 나열되는 문장들은 여느 시트콤보다도 더 배꼽 빠지게 웃기다. (공공장소에서 이 책을 읽다가는- 특히 나처럼 히죽히죽 잘 웃는 사람들은- 이상한 인간 취급 받을 수 있다.)
잘난 척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저자세도 아니면서, 적나라하게 솔직하다. 게다가 발군의 유머감각까지 지녔다. 아, 이래서 난 닉 혼비가 너무도 좋다!
2. How to be good?
'홀로웨이에서 가장 분노한 사람'이라는 칼럼을 지역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 지망생인 남편 데이비드가 어느 날 갑자기 '마약을 하다가 초능력을 갖게 된 굿뉴스(이름이 굿뉴스란다)'를 만나 개과천선하면서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
데이비드는 굿뉴스와 더불어, 그의 특기였던 시니컬한 욕설 내뱉기를 그만두고, 쓰잘데기 없던 온갖 것들에 대한 분노도 집어치우고, 집 없는 아이들에게 방을 마련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또한 집안의 불필요한(전적으로 그의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잉여 물건들을 보호소에 기증하고, 살아오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추에이션을 재연한다.
우리의 아줌마 주인공 케이티는 시종일관 냉담한 시선으로 그들의 행동을 탁월한 언어유희로 비꼬고 또 비꼰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꽤 '착한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던 그녀는 남편과 굿뉴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꽤나 찝찝한 기분이 된다. 도덕적 정당성을 생각했을 때, 자신보다는 남편과 굿뉴스가 옳은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이어 남편과 굿뉴스의 행동들이 결국은 '위선과 자기만족'에서 나온 것임이 드러나고, 케이티는 통쾌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 그지없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인 거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인 거야?
과거의 예술가들이야, 다시 말해 버지니아 울프의 여동생이었던 바네사 벨 같은 사람들이야 자신도 그렇고 주변 인물들도 그렇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니,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이란 대가 끊긴 족보인 것 같다.'
으음, 소설과는 상관없이, 다시금 머리를 들이밀고 날 귀찮게 하는 질문들.
타인에 대한 호의, 다시 말해 자원봉사 같은 행위들은 정말 "100% 우월감과 자기만족"없이 실행될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면(사람이란 원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잖아. 안 그래?) '위선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퍼센트까지 허용치가 될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그저 '잰 체'하기 위해 발휘하는 동정심 사이의 경계선은 어떻게 구별할 수가 있는 거지?
어쩌면 언젠가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위선이란, 선천적으로 착하지 못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의 행동들'인 것은 아닐까. (아, 그건 아닌 듯 싶다-.-)
3. 이성 캐릭터의 이해 또는 동일화(?)
닉 혼비의 다른 소설 속 주인공이 대부분 30대 남성(성정이 좀 덜 된;)이었던 것과 달리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중년의 여성이다. 그것도 이혼 위기에 놓인 애 둘 딸린 아줌마.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성 캐릭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용할 경우, 조금씩 뽀록(?)이 나게 마련인데, (특히 최근에 읽었던 야마다 에이미의 '나는 공부를 못해'처럼), 이 소설은 작가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내가 소설을 쓰거나 시나리오를 쓴다면, 닉 혼비처럼 능수능란하게, 뻔뻔하게 그렇게 남성캐릭터를 잘 만들어 내지는 못할 거다. 장진이 남성 캐릭터 묘사에는 탁월한 반면, 뻣뻣하고 전형적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X!
4.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거야. 나는 꼭 한쪽 길만 계속 따라가다가 결국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같아."
"결단을 내리기 전에 세월이 흘러가 버린다."
"결혼은 그래. 결혼은 꼭 왕립 동물 학대 방지 협회 포스터에 나오는 동물들 같아. 깡마르고, 불쌍하고."
"사람을 그토록 매혹시키는 건 기독교적인 부분이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부분이다. 세상 그 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바라지 않겠는가?"
10년 뒤, 중년의 문턱에 서서, 나 역시 살아온 내 삶이 서글프고, 다시 시작하고 싶고, 돌이킬 수 없음에 엉엉 울고 싶어질 날이 올지 모르겠다. 아흑, 너무 리얼하다.
5. 문학사사의 표지 감각
이토록 좋은 소설을 조용히 그냥 묻혀버리고 싶지 않다면, 문학사상사의 디자인팀은 각성하라! 각성하라!(피버피치에서의 불타는 축구공 사진도 어이없었다만, 이건 정말....-_-;;; 혹시 문학사상사 디자인팀, 닉 혼비의 안티 세력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