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 대디, 플라이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느긋하게 읽어도 두세 시간이면 뚝딱 마지막 장을 넘길 수 있는 이 소설은, 한 권의 책을 읽는다기 보다는 한편의 즐거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눈앞에 뚜렷한 화면이 연상되도록 묘사된 쉬운 문장들과 개성 강하고 역동적인 캐릭터들 탓도 있지만, 구성 자체가 무척이나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뭐, 안 그래도 이미 일본에서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이준기를 주연으로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단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너무 뻔하고 가벼워서 시중에 널려 있는 장르 소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가네시로 카즈키는 독자가 한순간이라도 지루해할까 봐 염려했는지, 철저하게 독자를 위해 서비스한다. 독자의 취향을 고려해 다양한 캐릭터들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한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스피드한 전개, 그리고 한 무력한 중년 가장이 멋진 영웅이 되는 통쾌한 결말까지 아낌없이 선사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렇게 소설의 외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Fly, Daddy, Fly'는 가네시로 카즈키의 데뷔작 '레벌루션No3'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 '레벌루션No3'에는 'Fly, Daddy, Fly'에 등장하는 순신, 미나가타, 아기, 이다라시키 등의 공부 못하는 말썽꾸러기 고교생들이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의 태생과 상처, 마인드 등을 이해할 때,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졌던 'Fly, Daddy, Fly'가 비로소 결코 만만치 않은 무게감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더 좀비스 시리즈' 중에 '레벌루션 No3'가 제일 좋았다.)

재일조선인, 혼혈인, 오키나와인이라는 태생적 아웃사이더인 그들은 도쿄 시내의 삼류 고등학교의 학생들로 앞으로의 삶도 일본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여 주저앉아만 있지는 않는다. '용쟁호투'의 이소룡처럼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적(!)'과 맞서 싸우려고 한다.

현실이 그렇게 만만하겠어? 너무 단순한 마초들의 이야기 아니야?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아웃사이더들이 차별과 부조리로 가득한 일본 사회에 통쾌하게 한방 먹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작가는 보고 있는 듯하다. 일본 사회를 비웃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한 사회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애정도 느껴진다. 그의 또다른 소설 '연애소설'에서 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나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소설을 쓰겠다'라고 말했듯, 재일 한국인인 작가 가네시로 카즈키는 그 역시 일본에서 성장하며 많은 상처를 받고 절망감을 느끼며 성장했지만, 자신의 소설에서는 절망보다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Fly, Daddy, Fly'가 어떤 모양으로 탄생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설마 날라리 고교생이 힘없는 중년 아저씨를 훈련시켜 통쾌하게 승리한다는 단순 모드로만 가지는 않겠지? 물론, 원작과 그 원작을 바탕으로 만드는 영화는 별개의 작품이지만, 이 영화도 한국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질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개인적 소망이지만, 코시안과 같은 한국 사회의 혼혈인들도 등장인물로 나온다면 어떨까?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가네시로 카즈키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의 다음 작품 'Speed'도 박순신을 비롯한 고교생들이 활약하는 이야기인데, '연애소설'에 나왔던 다니무라 교수도 이 소설에서 다시 한번 등장하는 등, 색다른 재미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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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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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작가의 처녀작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처녀작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현재 나의 실력과 은근슬쩍 비교해가며 읽는 것을 즐긴다. 뭐, 그것은 언제나 아득한 절망감을 동반하며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지만 말이다.

따끈따끈한 작가의 열정과 설렘이 반영되어 있는 처녀작들을 보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작가의 긴장한 모습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듯도 싶다.(나는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요소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그들(작가들)의 태도가 아마추어 글쟁이 시절과 책을 처음 발표한 시기와 비교해 별반 달라진 것은 없겠지만,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하고 세상에 책을 내놓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들의 글쓰기 자체는 크게 의미가 달라진다. 그들의 작품들은 온전히 그들만의 작품일 수가 없게 되지만, 그들 작품에 무한한 책임만은 져야 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작가(출판계의 상업적인 측면으로 보나, 문학적 성과로 보나)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미 중견 작가로 접어든 그의 최근의 소설들을 보며 젊은 시절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혼란과 어려움을 읽어내긴 어려울 테니, 이제는 내용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그의 데뷔작이나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물론 나의 이런 행보의 이유에는, 며칠 전의 '스터디' 충격건이 꽤 크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야." 그래도 역시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는 단계가 되면 항상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너무나도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아마도 굉장히 정직한 콤플렉스의 소유자이며, 꽤나 성실하고 고지식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또는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끊임없이 닦달하여 가장 정직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내뱉도록 재촉하는 것 같다.

그러나! 꽤 마음에 들었던 이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과는 달리,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만든 스토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러니 몇 년 전 읽었던 이 소설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지...;;) 이후의 그의 소설들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한 여성과의 기이한 만남과 감정의 교류,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에서의 선문답식의 시시껄렁한 대화들. 허무하고 공허하고 행복하지 못한 인물들의 일상들...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말이다.

꽤나 정직했던(또는 정직하고자 노력했던)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과 달리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되는 부분의 내용은 기억에 잘 남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래, 이런 부분 때문에 하루키는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소설 쓰기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좋은 문장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인가.하루키가 자신의 첫 소설에서 '잘만 되면 몇 년인가, 몇십 년 후에, 구제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라고 소망했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 지금의 자신이 '좀더 아름다운 말로 세상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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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2006-05-18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공감할 수가 없군요.

그렇기에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으실런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글읽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존재하는구나...하는걸 새삼 느껴봅니다.
 
레벌루션 No.3 더 좀비스 시리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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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작가 가네시로 카즈키의 데뷔 소설.

확실히 데뷔작이다 보니 조금은 어설프고 덜익은 듯한 느낌은 들지만, 그의 특유의 재담과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드러내는 기분 좋은 솔직함은 이 작품 속에서도 느낄 수 있다. (난 아마도 '솔직함'에 대해 언제나 관대해지고 매력을 느끼나 보다. 그 증거로 내 주변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모두 굉장히 솔/직/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의 후속 작품들에 등장하는, 친한 친구의 죽음이라는 소재, 사회적 차별에 대한 성찰,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한 자의 슬픔 등도 꾸준히 반복된다.

'레벌루션 No.3'라는 소설은 '차별'에 대한 소설이다.

소설 속의 배경이 되는 고등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형편없이 낮은 삼류 남자 고등학교다. 다시 말해 일본 주류 사회에 편입될 가망이 현저히 낮은 사람들의 집합소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 속의 주요인물들은 사회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선천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재일조선인, 혼혈아, 오키나와 출신의 백혈병 환자가 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비관하고 또 우울함이나 즐기며 폼을 잡지 않는다.

"헐, 그런 가식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라고 말하듯, 소설 속의 해학적이고 유머러스한 문장들은 읽는 내내 배를 잡고 웃게 만든다.

 

"우리 학교는 1963년에 역도산을 찌른 야쿠자, 의 사제 같은 일부 마니아나 반가워할 유명 인사를 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총리대신도 고급 관료도 지체 높은 집안과도 전혀 무관하다. 주변 명문학교들은 우리를 '좀비'라고 부른다.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좀비'라는 별명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우리 학교의 평균 학력이 뇌사 판정에 버금가는 혈압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 이쪽은 내 마음에 쏙 든다.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아서' 시각을 바꿔 생각하면 우리는 영웅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레이더스'의 인디아나 존스,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처럼."

 

현실 속의 상황은 꽤나 절망적이지만, 우리의 꼴통 학교의 '더 좀비스' 멤버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늘 다수 쪽이 이기게 되어 있고, 언제까지나 그 다수들로 인해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싫으면 그 시스템 속에서 나와 버리면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들이 동네 양아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 진지하고 솔직한 그들의 열정은 어쩔 땐 부럽기까지 했다. (난 왜 좀더 어릴 때 바보같고 어이 없는 일들에 대해 좀더 열정적이지 못했나! 가장 쉽게 '열정'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시절인데 말이다.)

 

"그리고 리틀 중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작별 인사를 했어. 너는 고된 인생을 살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아 좌절하는 일도 있겠지. 라고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세계와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느끼면서 히로시의 마지막 말에 귀 기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춤추는 거야."

 

'더 좀비스'들의 활약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플라이, 대디, 플라이'라는 책도 조만간 구입하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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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좋은게 뭐지?
닉 혼비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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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닉 혼비

닉 혼비의 다른 소설들에서처럼, 이 소설에서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평범하다 못해 별 볼일 없는 일상에 단단히 발을 내딛고 있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은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고, 치사하고,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처럼 소설이 우울하지만은 않다.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툭툭 내뱉듯 나열되는 문장들은 여느 시트콤보다도 더 배꼽 빠지게 웃기다. (공공장소에서 이 책을 읽다가는- 특히 나처럼 히죽히죽 잘 웃는 사람들은- 이상한 인간 취급 받을 수 있다.)

잘난 척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저자세도 아니면서, 적나라하게 솔직하다. 게다가 발군의 유머감각까지 지녔다. 아, 이래서 난 닉 혼비가 너무도 좋다!

 

2. How to be good?

'홀로웨이에서 가장 분노한 사람'이라는 칼럼을 지역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 지망생인 남편 데이비드가 어느 날 갑자기 '마약을 하다가 초능력을 갖게 된 굿뉴스(이름이 굿뉴스란다)'를 만나 개과천선하면서 벌어지는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

데이비드는 굿뉴스와 더불어, 그의 특기였던 시니컬한 욕설 내뱉기를 그만두고, 쓰잘데기 없던 온갖 것들에 대한 분노도 집어치우고, 집 없는 아이들에게 방을 마련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또한 집안의 불필요한(전적으로 그의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잉여 물건들을 보호소에 기증하고, 살아오면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시추에이션을 재연한다.

우리의 아줌마 주인공 케이티는 시종일관 냉담한 시선으로 그들의 행동을 탁월한 언어유희로 비꼬고 또 비꼰다.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꽤 '착한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던 그녀는 남편과 굿뉴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면서도 꽤나 찝찝한 기분이 된다. 도덕적 정당성을 생각했을 때, 자신보다는 남편과 굿뉴스가 옳은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이어 남편과 굿뉴스의 행동들이 결국은 '위선과 자기만족'에서 나온 것임이 드러나고, 케이티는 통쾌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 그지없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사람인 거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인 거야?

과거의 예술가들이야, 다시 말해 버지니아 울프의 여동생이었던 바네사 벨 같은 사람들이야 자신도 그렇고 주변 인물들도 그렇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니,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지금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이란 대가 끊긴 족보인 것 같다.'

으음, 소설과는 상관없이, 다시금 머리를 들이밀고 날 귀찮게 하는 질문들.

타인에 대한 호의, 다시 말해 자원봉사 같은 행위들은 정말 "100% 우월감과 자기만족"없이 실행될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면(사람이란 원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잖아. 안 그래?) '위선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퍼센트까지 허용치가 될 수 있을까.

타인의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그저 '잰 체'하기 위해 발휘하는 동정심 사이의 경계선은 어떻게 구별할 수가 있는 거지?

어쩌면 언젠가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 한 구절처럼 '위선이란, 선천적으로 착하지 못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의 행동들'인 것은 아닐까. (아, 그건 아닌 듯 싶다-.-)

 

3. 이성 캐릭터의 이해 또는 동일화(?)

닉 혼비의 다른 소설 속 주인공이 대부분 30대 남성(성정이 좀 덜 된;)이었던 것과 달리 이 소설 속 주인공은 중년의 여성이다. 그것도 이혼 위기에 놓인 애 둘 딸린 아줌마.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성 캐릭터를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사용할 경우, 조금씩 뽀록(?)이 나게 마련인데, (특히 최근에 읽었던 야마다 에이미의 '나는 공부를 못해'처럼), 이 소설은 작가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내가 소설을 쓰거나 시나리오를 쓴다면, 닉 혼비처럼 능수능란하게, 뻔뻔하게 그렇게 남성캐릭터를 잘 만들어 내지는 못할 거다. 장진이 남성 캐릭터 묘사에는 탁월한 반면, 뻣뻣하고 전형적이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X!

 

4.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거야. 나는 꼭 한쪽 길만 계속 따라가다가 결국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 같아."

"결단을 내리기 전에 세월이 흘러가 버린다."

"결혼은 그래. 결혼은 꼭 왕립 동물 학대 방지 협회 포스터에 나오는 동물들 같아. 깡마르고, 불쌍하고."

"사람을 그토록 매혹시키는 건 기독교적인 부분이 아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부분이다. 세상 그 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바라지 않겠는가?"

10년 뒤, 중년의 문턱에 서서, 나 역시 살아온 내 삶이 서글프고, 다시 시작하고 싶고, 돌이킬 수 없음에 엉엉 울고 싶어질 날이 올지 모르겠다. 아흑, 너무 리얼하다.

 

5. 문학사사의 표지 감각

이토록 좋은 소설을 조용히 그냥 묻혀버리고 싶지 않다면, 문학사상사의 디자인팀은 각성하라! 각성하라!(피버피치에서의 불타는 축구공 사진도 어이없었다만, 이건 정말....-_-;;; 혹시 문학사상사 디자인팀, 닉 혼비의 안티 세력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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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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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제대로 시행해본 적은 없지만, 미술사나 미술이론서 같은 책을 한번 제대로 정독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갖고 있었다. 서점에 가면 괜히 한번씩 그림 관련 서적을 펼쳐보며 빤히 들여다보고 있곤 한다.  그림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언가 미묘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이 좋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그런 나의 취향 때문에 고르게 된 책이다.

17세기 네델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가 표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그 고급스런 그림의 질감에 끌려 구입하게 되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미국 여작가는 이 그림 한점으로 17세기의 네델란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연상케 하는데,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된 어느 하녀의 이야기라는, 그 스토리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분하게 진행되는 소설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중간 중간 나오는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이 소설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에 불과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은 소설을 읽기 전과 다른 감동을 준다.

내가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소녀인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화실에 머무르던 순간의 장면들이다. 그리트는 하루 종일 고단하게 몸을 놀려야 하는 하녀라는 신분이다. 주인마님과 함께 일하는 하녀의 눈치를 보랴, 주인집 꼬마들의 악의적인 장난을 받아내랴, 단 한 순간도 정신적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그 집에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은,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순간뿐이다. 화실은 그 시대 최고 화가 중 하나였던 베르메르의 신성한 작업 공간이다. 어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그곳은 그녀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곳이다. 그녀의 실생활과 전혀 다른 그곳에서 그녀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인 베르메르와 사랑에 빠진다.

베르메르는 뛰어난 화가일지언정 현실감각은 없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경제적인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 뿐더러, 그의 능력상 잘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는 대신, 단 한 장의 그림을 그리더라도 온갖 정성을 쏟아 붓는다. 그의 이런 비현실적인 감각은 비단 경제적인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남달리 영리한 그녀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지만 그로 인해 그녀에게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그림일 뿐이다.  예술가란 언제 어디서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잘 표현한 것 같다. 그 순간 그냥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의 이 그림들을 언젠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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