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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번도 제대로 시행해본 적은 없지만, 미술사나 미술이론서 같은 책을 한번 제대로 정독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언제나 갖고 있었다. 서점에 가면 괜히 한번씩 그림 관련 서적을 펼쳐보며 빤히 들여다보고 있곤 한다. 그림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언가 미묘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이 좋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그런 나의 취향 때문에 고르게 된 책이다.
17세기 네델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가 표지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그 고급스런 그림의 질감에 끌려 구입하게 되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미국 여작가는 이 그림 한점으로 17세기의 네델란드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이 소설은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연상케 하는데,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된 어느 하녀의 이야기라는, 그 스토리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분하게 진행되는 소설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중간 중간 나오는 베르메르의 그림들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물론 이 소설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에 불과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그림은 소설을 읽기 전과 다른 감동을 준다.
내가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소녀인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화실에 머무르던 순간의 장면들이다. 그리트는 하루 종일 고단하게 몸을 놀려야 하는 하녀라는 신분이다. 주인마님과 함께 일하는 하녀의 눈치를 보랴, 주인집 꼬마들의 악의적인 장난을 받아내랴, 단 한 순간도 정신적으로 위로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그 집에서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은, 베르메르의 화실을 청소하는 순간뿐이다. 화실은 그 시대 최고 화가 중 하나였던 베르메르의 신성한 작업 공간이다. 어떤 성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그곳은 그녀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곳이다. 그녀의 실생활과 전혀 다른 그곳에서 그녀는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집 주인인 베르메르와 사랑에 빠진다.
베르메르는 뛰어난 화가일지언정 현실감각은 없는 사람으로 표현된다. 경제적인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닐 뿐더러, 그의 능력상 잘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는 대신, 단 한 장의 그림을 그리더라도 온갖 정성을 쏟아 붓는다. 그의 이런 비현실적인 감각은 비단 경제적인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남달리 영리한 그녀로부터 여러 도움을 받지만 그로 인해 그녀에게 발생하는 난감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그림일 뿐이다. 예술가란 언제 어디서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잘 표현한 것 같다. 그 순간 그냥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의 이 그림들을 언젠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