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 프로그의 특별한 매력[2]

 

자, 이제부터 본론이다. 졸리 프로그의 세 번째이자 최고의 매력은 식당이다. 꼭 숙박을 하지 않아도 깐짜나부리를 여행하는 많은 여행객들이 졸리 프로그의 식당에 식사를 하러 온다. 이유는, 싸기 때문이다. 말도 못하게 싸다. 스테이크가 고작해야 3천 원에서 4천 원 정도였다. 1999년도의 일이다. 지금은 얼마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게다가 메뉴가 거의 김밥천국 수준으로 다양하다. 볶음밥이나 볶음국수를 비롯한 태국 요리에서부터 스파게티나 피자, 팬케이크 같은 서양 요리도 웬만하면 다 된다. 온갖 과일 주스도 다 된다. 심지어 모든 요리가 웬만하면 다 맛이 있다. 최고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가격 대비 훌륭하다. 불가사의한 식당이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불친절하다. 손님을 거의 파리 취급한다. 무표정한 얼굴에 귀찮은 태도로 요리를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한다. 태국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고 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의 종업원들은 불친절하다. 친절하기 힘들 것이다. 이 사람들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세계 각국의 방식으로 당할 만큼 당했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식당에 갔더니 어린 이스라엘 남녀들이 술에 잔뜩 취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천방지축들이었다. 직원들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친절하건 불친절하건, 나야 음식에 파리만 들어 있지 않으면 된다. 나는 유명한 졸리 프로그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3천원짜리 스테이크는 도대체 어떤 맛일까. 음, 그건…… 엄청나게 질긴 맛이었다. 운동화 밑창의 고무를 구운 맛이나 비슷했다.(물론 먹어본 적은 없다.) 운동화 밑창의 고무에 소고기 다시다를 뿌리면 이런 맛일 것이다. 아무리 씹어도 삼킬 수가 없는 맛이었다. 그럼에도 소고기가 귀한 나라에서 온 나는 감사히 먹었다. 어릴 때부터 비싸다고 소고기를 안 사주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이게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먹었다. 속으로는 계속 ‘이건 소고기야. 이건 소고기’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스테이크의 정체는 물소 고기였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논에 서 있는 물소를 보았는데 회색 갑옷 같은 피부에 멋진 뿔을 가진 소였다. 그냥 보아도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운동화 밑창의 고무 맛이 날 것 같아 보였다.

졸리 프로그의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하고 낡고 지저분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humble’ 하다.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나는 그곳의 주인이 아니니까 겸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렇다. 물론 분위기는 좋다. 2층짜리 목조 가옥이다. 방은 꽤 넓다. 화장실도 딸려 있다. 문을 열면 바로 그 예쁜 잔디 정원이 보인다. 정원사 아저씨가 매일 같이 잔디에 물을 주고 나무를 관리한다. 1층은 포치를 쓸 수 있고, 2층에도 발코니가 있다. 포치에는 빨래도 널 수 있고 나무로 만든 테이블도 놓여 있다. 포치에 앉아 있으면 콰이 강의 시원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나무 대 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 한 시간이면 기분 좋게 말라 있다. 밤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불을 켠 채로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방 안은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한낮에도 어둡다. 눅눅하기도 하다. 더운 나라라 일부러 집 안에는 해가 들지 않도록 지었을 것이다. 침대는 한가운데가 푹 꺼져 있어서 자다가 가운데로 몰리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나 수렁에 빠진 기분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기어 나와야 할 정도다. 아마도 몇 십 개국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침대 위에 누웠을 것이다. 잠만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는 살아서 상종도 하기 싫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이스라엘 젊은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쁜 사람들, 어쩌면 살인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숙소의 침대라는 것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 누웠겠지만, 바로 전날 밤만 해도 어떤 커플이 뜨거운 밤을 보낸 흔적이 남아 있겠지만, 그 흔적을 완벽히 감춰야 한다. 그것이 숙소의 침대의 의무이다. 언제나 새로 도착한 여행자가 제일 먼저 누워 보는 침대인 척해야 한다. 졸리 프로그의 침대는 바로 그 점에서 낙제다. 밤새 가운데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기를 쓰고 양쪽 가장자리에 달라붙어야 했으니까.

 

화장실은 방보다 더 끔찍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어둡고 긴 공간에 변기 하나와 샤워기 하나가 달랑 달려 있던 기억이 난다. 방충망도 없이 창문이 그대로 뚫려 있는 데다 강가라 그런지 벌레가 엄청나게 많았다. 도마뱀이야 귀여운 수준이고, 커다란 메뚜기 비슷한 벌레들도 자주 출몰했다. 최대한 빨리 샤워를 마쳐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소음이었다. 밤에 자다가 누가 우리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소리에 기절할 것처럼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2층을 쓰는 사람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그 사람들의 발소리는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층간소음이 한국의 아파트는 비교할 수준조차 못됐다. 숙소에 묵는 내내 잠을 설쳤다.

 

졸리 프로그는 예쁜, 귀여운, 멋진 개구리라는 뜻이다. 누가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센스가 좋은 것 같다. 나중에 나도 혹시라도 식당 같은 것을 열게 된다면 꼭 동물 이름을 넣고 싶다. 나는 고래를 좋아하니까 고래 식당일지도 모른다.(대왕오징어에 꾸준히 사로잡혀 있는 아들은 몇 년째 짬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대왕오징어 사진을 검색하는데, 아마 그 아이가 식당을 차린다면 당연히 대왕오징어 식당일 것이다.)

 

때로 인생의 구덩이나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 우리 방에 침입한 것 같은 소리에 겁에 질린 채로 침대 가운데에 빠지지 않도록 기를 쓰고 가장자리로 달라붙어야 했던 악몽 같던 졸리 프로그의 밤들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졸리 플로그에는 누구에게나 공짜이던 콰이 강의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예쁜 잔디 정원 위에서 뒹굴던 낮들도 있었다. 식당에는 운동화의 고무 밑창을 씹는 것처럼 질겼던 물소 고기 스테이크와 불친절한 직원도 있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갔던 철도도 있었고 그들이 잠든 소박하고 아름다운 묘지도 있었다. 그 철도 위를 달리던 기차에는 목에 카메라를 건 채로 감탄사를 내뱉던 순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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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 프로그의 특별한 매력[1]

 

태국 중부 지방의 작은 도시 깐짜나부리에는 졸리 프로그Jolly Frog라는 귀여운 이름의 식당이 있다. 실은 식당 겸 게스트 하우스다. 나는 동물 이름이 들어간 가게를 좋아한다. 코끼리 식당이나 두꺼비집, 거북당, 개미집 같은 간판을 단 가게가 보이면 언제나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프랑스가 배경인 책들을 읽다보면 동물 이름을 붙인 가게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름은 개미fourmi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를 돌아다닐 때 La Fourmi인지 Les Fourmis인지 하는 이름의 술집 간판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반가워했다. 퇴근 후 한잔 걸치기 위해 들른 듯한 동네 사람들로 가득한 술집이었다. 클럽을 찾으러 다니던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후회가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달팽이도 먹고 토끼도 먹고 비둘기도 먹고 개구리도 먹고 사슴도 먹고 아무튼 웬만한 것은 다 먹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식재료에 대한 원초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느낌이다. 야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 게걸스럽다고 해야 하나. 먹을 것을 파는 가게에 동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야성적인 느낌.

 

한국의 오래된 식당 중에는 희망을 담은 이름이 많은 것 같다. 대성이라든지, 부흥이라든지, 만복이라든지. 그런 이름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고향의 이름을 간판에 새긴 집들이 더 마음에 든다. 타지에 와서 고생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뭉클해진다. 나도 타지에 와서 고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내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의 이름은 통영식당인데, 친구의 가족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왔다. 통영과는 아무 연고가 없다. 심지어 통영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은 있으신지 의심스럽다. 단지 통영산 굴로 굴밥과 굴보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음식은 정말 맛있다. 전라도의 손맛은 역시 놀랍다. 가격도 싸다. 동인천에 갈 일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길.


졸리 프로그의 이름은 왜 졸리 프로그인지 모르겠는데, 당시(1999년)만 해도 깐짜나부리의 꽤 ‘핫’한 장소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콰이 강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콰이 강은 <콰이 강의 다리>라는 옛날 영화 속의 그 강을 말한다. 본 적은 없지만 꽤 유명한 영화라서 제목은 나도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군수물자 운반을 위한 철도 건설 작업에 태국인들은 물론이고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까지 노역으로 동원했다. 주로 영국과 호주, 네덜란드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곡괭이와 삽만 들고 맨손으로 밀림을 헤치고 절벽을 깎아내 건설한 철도라 그 과정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415km 길이의 철로를 14개월 만에 만들어냈다고 한다. 곡괭이질과 삽질이라고는 5평짜리 텃밭에서밖에는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게 어느 정도의 속도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난 속도였다. 고된 노동뿐만 아니라 열악한 수용소 생활과 구타, 고문 등으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영화는 연합군이 이 철도와 콰이 강 위의 다리를 폭파한다는 내용이다.


깐짜나부리의 인기 투어코스는 열차를 타고 이때 건설된 ‘죽음의 철도’ 위를 달리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고작해야 기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폭이 좁은 철로가 나타나는데, 양 옆으로 벽처럼 높이 늘어선 절벽은 모두 당시의 포로들이 맨손으로 깎아낸 것이다. 이곳은 ‘헬 파이어 패스Hell fire pass’라고 불린다. 밤낮 없이 철로를 건설하느라 켜놓은 횃불이 멀리서 보면 지옥불처럼 보였기 때문이란다.

 

무시무시하다. 반세기 전에 이 철도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생각하면 더 무시무시하고, 그럼에도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면 더더욱 무시무시하다.


깐짜나부리에는 이때 죽은 연합군의 묘지가 있다. 기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보았는데 나무 십자가가 무덤마다 꽂힌 작고 아름다운 묘지였다. 이 사람들은 죽어서 이런 데 묻힐 줄 알았을까. 고향에서는 이름조차 들어본 일 없었을 뜨거운 나라의 시골 마을 묘지에.


역사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포로들 중에는 정말로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낯선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죽지 않아도 좋았을, 살아 있었더라면 인류의 번영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했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데서 고생하다 죽어도 싸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늘이 이런 사람을 버릴 리 없을 것이라 남들도 믿고 그 자신도 내심 믿었을 사람도 죽었을 것이다.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다가 어이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은 버젓이 살아 있고,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시 귀여운 졸리 프로그 이야기로 돌아가자. 졸리 프로그의 첫 번째 매력은 바로 콰이 강이다. 강물은 한국의 강물처럼 맑지 않은데 거의 흙탕물에 가깝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강 주변으로는 열대의 숲이 무성하다. 그러나 한국의 강이 차갑고 날카롭고 단호한 느낌을 풍긴다면, 콰이 강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풍만한 느낌이다. 태국의 산이 한국의 산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의 산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웅장한 데 반해, 태국의 산은 둥글둥글하고 아기자기하다. 동그란 얼굴에 늘 웃음이 걸려 있는 이빨 빠진 할아버지 같다.


졸리 프로그의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과 연관이 있는데, 숙소 건물을 둘러싸고 잘 가꿔진 잔디 정원이 있다는 것이다. 정원 한가운데는 커다란 코코넛 나무가 있어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가려준다. 그리고 바로 앞의 콰이 강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말도 못하게 시원한 강바람이다. 잔디밭에는 데크체어가 놓여 있어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좋다. 실제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여행객들을 많이 보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당황했다. 우리는 언제나 유명 관광지를 찍고 순회하는 식의 여행을 여행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본전을 뽑아야 하는데!’라는 한국인의 본능이 채찍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긴장해 있고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 있다. 본전을 뽑아야 하니까. 3천 원짜리 콩나물국밥집에서도, 7천 원짜리 목욕탕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술집에서도, 비행기를 타도,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본전부터 뽑아야 한다. 본전을 뽑고 나면 뜨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것처럼 만족감이 밀려온다. 그래야 발 뻗고 잘 수가 있다.


그런데 다른 여행객들은, 특히 서양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늘 누워 있었다. 전생에 나무늘보였나 싶을 정도로 누워만 있었다. 해변에서도 누워 있고 잔디밭에서도 누워 있고 배 위에서도, 기차 위에서도 누워 있었다. 나도 서양인들의 흉내를 내어 누워 보았다. 10분 정도는 좋았는데 10분이 지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누워 있는 이들을 게으름뱅이라 부른다. 게으름뱅이는 경제 발전의 적이다.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한다. 나도 잘 눕지 않는 성격이다. 잘 때를 빼고는 하루 중 누워 있을 때가 거의 없다. 결혼 전에는 그래도 종종 누워 있었다. 할 일이 없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지상에 붙어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을 때, 직립하고 있다는 것이, 겨우 발바닥 두 개만 땅에 붙어 있다는 것이 불안할 때 나는 누웠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고 나니 하루 종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할 일이 끝이 없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생활의 일들. 잠잘 때야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다. 이제 겨우 누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 나는 거의 누워 있다. 어딜 잘 가지도 않고 뭘 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적당한 장소를 찾아 눕거나 널브러져 있다. 누워서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한번 누우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행에서 배운 전부인지도 모른다. 누울 줄 아는 것. 누워 있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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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을 켜고 온 것이 분명하다[2]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까지 정확히 2주일이 남았다. 우리는 태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도착지인 방콕에서 묵을 숙소와 다음 목적지인 피피 섬의 숙소만 미리 예약해 두었다. 둘 다 수영장이 딸린, 저렴하지만 괜찮은 숙소다.(물론 내 기준에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있기. 할 수 있다면 매일 수영하기. 아이들의 물놀이용품만으로도 캐리어가 터질 것 같았다.


아침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면서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권을 두고 왔나? 가방을 뒤졌더니 네 개의 여권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여권에 발이 달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 않도록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스터카드도 지갑 속에 있다. 환전은 어차피 인터넷뱅킹으로 해두었으니 공항에서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뭔가 빠진 것 같아.”
“뭐가?”

 

남편이 물었다.


“불안한데……”
“휴대폰?”
“챙겼어.”
“노트북?”
“챙겼지.”
“그럼 됐네 뭐.”


그러나 불안감은 여전하다.


“아니야. 뭔가 잊은 게 있어.”
“카메라?”
“여기 있는데?”
“그럼 뭐야?”
“불을 켜고 왔나?”
“불은 내가 껐어.”
“보일러는?”
“보일러도 외출로 돌려뒀지.”
“확실해?”
“확실해.”
“가스는?”

“잠갔어.”


남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를 두고 왔다. 무언가를 잊었다. 분명하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섬광 같은 깨달음.


“전기장판!”
“뭐?”
“전기장판 껐어?”


내 물음에 남편이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당신이 끄지 않았나?”
“잘 모르겠는데.”
“아냐. 당신이 껐어.”
“아닐지도 몰라.”
“아까 끄는 것 봤어.”

“언제?”
“본 것 같은데……”


남편이 말끝을 흐린다. 나는 그를 믿지 못한다.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한 남자를 믿지 못한다. 아니, 사실 나는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한다.


“안 껐어. 안 끈 게 분명해.”

“아니야. 껐어. 껐을 거야.”


남편도 오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증거 있어?”
“껐다니까!”
“증거를 대.”
“그럼 다시 돌아가든가!”


남편이 화를 냈다. 나는 갑자기 수그러든다.


“아니야. 껐을 거야.”


우리의 싸움은 늘 이런 패턴이다. 내가 히스테리를 부린다. 남편이 불안해하며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지금 히스테리를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편의 무마는 거의 추임새, 백댄스, 장구소리, 휘발유에 가깝다. 나의 히스테리는 점점 고조된다. 급기야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그제야 나는 물바가지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을 차린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전기장판을 켜놓고 외출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 2주 동안 집을 비우는 오늘, 외국으로 떠나는 오늘, 전기장판이 나를 괴롭힌다. 껐는지 안 껐는지 아무리 더듬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칠 것 같다. 이미 고속도로를 탔는데 다시 돌아가자니 진짜로 미친 것 같아 보일까 걱정이 된다. 손톱만큼 남은 내 이성은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나의 감성은 폭주기관차라도 탄 듯하다. 전기장판이 과열된다. 이불이 타다가 불이 붙는다. 불은 싸구려 장판과 벽지와 커튼을 태우고 집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될 것이다. 실직도 했는데.


두 아이를 데리고 태국으로 간다. 이건 3박 4일 정도의 홍콩 여행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불안하다.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나는 태국이 어디보다 안전한 나라이면서 또 어떤 면에서는 불안한 나라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딜 가나 흥정은 기본이다. 나는 흥정이 싫다.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보석사기!) 전에 아들과 함께 여행하던 유럽 여자의 실종 전단이 카오산로드의 경찰서 앞에 붙어 있던 걸 봤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일정도, 숙소도, 제대로 정해두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그저 이 여행에 대한 내 불안감을 해소할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걸 애꿎은 전기장판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공항에 가서 티켓을 발권하고 짐을 부치고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서야 불안감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기장판은 꺼져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자.


다행히 아이들은 인천에서 방콕까지의 꽤 긴 비행시간을 잘 견뎌냈다. 예전에 홍콩행 비행기에서 갓 돌이 지난 아들이 귀가 아팠던지 내내 악을 쓰며 울어 승객 모두가 이를 갈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잠도 잘 자고 기내식도 잘 먹고 모니터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잘 갔다.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변신이라도 하듯 화장실로 달려가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한국을 떠날 때는 오리털 코트를 입어야 했는데 여기서는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어도 된다. 겨울을 벗어버리고 여름을 입는 것이다. 추위에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고 어깨를 움츠린 채로 종종걸음을 칠 때의 우리와, 더위에 늘어져서 세월아 네월아 슬리퍼를 질질 끌으며 걷는 우리는 같지만 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삼복더위에는 실연을 해도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살게 돼. 더워 죽겠는데 울고 불며 곱씹을 여력이 어딨어.”

 

그렇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운 나라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울고불고 곱씹고 치를 떨고 저주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도 날씨가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다. 춥고 스산하기로 유명한 나라 출신 작가들의, 세상 근심을 다 끌어안은 얼굴을 떠올려 보시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약간 긴장했지만 의외로 간단했다. 숙소가 있는 거리의 이름인 ‘프라 아팃’을 말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을 포함한 적정 금액을 흥정하자, 택시는 문제없이 우리를 프라 아팃으로 데려다 주었다. 많은 것들이 눈에 익다. 나는 이 거리를 잘 안다. 익숙한 골목들, 익숙한 가게들, 익숙한 건물들, 익숙한 분위기와 냄새.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챙겨오지 않은 딸의 수영복을 사러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며 남편이 즐거운 듯 소리친다.


“아, 외국에 도착한 첫 날 맡는 이 낯선 냄새! 정말 좋아.”


내 남편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나는 이 낯선 냄새가 싫다. 낯선 공기와 낯선 소리와 낯선 냄새가 나를 불안하고 울적하게 만든다. 이 순간 나는 달아나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여길 왜 온 거지.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가까운 나이고, 남편도 있고, 애도 둘이나 낳았고(말했다시피 둘 다 자연분만으로!), 2종 수동 운전면허도 있는데, 심지어 여기까지 이 모두를 끌고 온 건 나인데, 그런데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정말 바보 같다.


수영복을 사서 돌아와 가족들은 모두 수영장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수영장 옆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수영하는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 후덥지근한 공기와 숯불과 생선젓국과 매연과 팍치와 파인애플이 뒤섞인 달짝지근한 냄새와 낯선 언어들과 새소리들이 ‘이질적인 것’에서 ‘이국적인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두렵지만, 후자는 견딜만하다. 그리고 내게는 전자에서 후자까지 가는 거리가 인천에서 방콕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그나저나 내가 수영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생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나의 불안과 히스테리와 울적함은 모두, 호르몬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하고 이틀 후에 볼 일이 있어 엄마가 안양의 우리 집에 들렀다. 나는 태국 남부의 소도시, 끄라비의 바다 앞에 서서 엄마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


‘전기장판 꺼져 있음.’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바다가 2%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여행과 여행 중인 우리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행운아이고, 지금의 시련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집도 불타지 않았다.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 그러고 보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어쩌면 그게 여행의 가장 멋진 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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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을 켜고 온 것이 분명하다[1]

 

2013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북한에서 장성택이 처형당했다. 호주에 산불이 났고, 필리핀에 태풍이 불었고, 샌프란시코 공항에 착륙하려던 아시아나항공의 여객기가 사고를 냈으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그 해에 남편은 두 번째로 실직을 했다.


한 번도 실직을 당해본 적이 없는 나는, 30년 군 생활 후 만기 전역한 아버지를 둔 나는, 사람이 실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어떻게 하면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어쩌다 저런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일까. 두 번째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이게 다 내 팔자다. 약 25분 동안 공황 상태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오케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나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무척 대범한 여자인 줄 착각하실 텐데,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낙천적인 여자냐고? 그것도 아니다. 집에 쌓아놓은 재산이 많아서 걱정할 게 없을 여자처럼 보이는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나는 주로 지나치게 비관적이다가 가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낙천적이 되어 이상한 짓을 하곤 하는 여자인데, 그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현실 도피.


결혼 이후 우리는 한동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왔다. 그건 마치 플랫폼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인파에 떠밀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를 전철에 올라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취직을 했고, 웨딩문화원이라는 데서 결혼식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으며, 주택자금대출을 받았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취직을 했고, 아이를 연달아 둘 낳았고, 학부형이 되었다.


남편은 매일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은 불편한 차림으로 1시간이 넘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눈치를 보고 욕을 먹고 욕을 하고 갈굼을 당하고 누군가를 갈구고 술을 퍼마시면서 돈을 벌었다. 남편의 양복바지는 여기 저기 헤지고 찢어진 데 투성이였다. 비싼데다 실용적이지도 않은 그 바지가 나는 싫었다.


남편이 그러고 사는 동안 나는 유모차를 밀며 하루 종일 집과 놀이터와 마트 사이를 전전했다. 난장판이 된 집에서 미친 듯이 매 끼니를 차려냈다. 적금을 붓고 대출 이자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보험에 들고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터널 시야 증후군에라도 걸린 듯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졌고 세상사를 바라보는 각도는 고정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미 전철의 문은 닫혀 버렸다.
이제 전철 안의 상황에 좀 적응해 보려 했더니 떠밀려 내려야 했다. 우리를 텅 빈 플랫폼에 버려둔 채 전철은 떠나버렸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왕 망한 인생, 잠시라도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일도 하지 않고 공과금도, 대출 이자도, 보험료도, 세금도 내지 않고 싶었다.(실제로는 내고 있지만.)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싶었다. 빈둥대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었다. 하기 은 것은 하기 싫었다. 하기 싫은 것을 주로 하면서 살아왔으니, 2주 동안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천벌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달아나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빛을 쬐고 새로운 바람을 맞고 새로운 시야와 새로운 각도를 얻는 것. 그것들을 안주머니 깊이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우리는 목적지를 태국으로 정했다. 태국. 나의 첫 여행지. 내가 처음으로 밟아본 외국 땅. 처음 방콕 돈므앙 공항에 내렸을 때 열대의 새콤달콤한 향기가 입국장 안까지 흘러 들어왔었지.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태국을 여행한 후, 나는 여름만 되면 태국으로 가는 짐을 꾸려왔다. 나는 태국을 좋아했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모든 이들이 태국을 좋아했다. 물가는 싸고 먹을 것은 지천이고 자연환경은 풍요롭고 즐길 거리가 널려 있으며 사람들은 친절한 곳. 그곳에서는 3천 원짜리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며 천 원짜리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6천 원짜리 마사지를 받으며 유유자적 지낼 수 있었다. 반대로 10만 원대의 호텔에 묵으면서 3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썰고 에어컨이 시베리아 북동풍처럼 불어오는 화려한 쇼핑몰들을 순회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중간쯤의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오늘은 가난한 여행자가 되었다가 내일은 부유한 관광객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태국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소비로 자존감을 획득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태국이란 그런 곳이었다. 3분의 1만 가져도 실컷 즐기다 올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번 여행은 좀 다르다. 이제 막 여덟 살과 여섯 살이 된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다. 아이 둘을 데리고 태국을 여행하다니. 택시비를 흥정하고 낯선 골목에서 하룻밤 묵을 방을 찾아 헤매고 노천 식당에서 이름 모를 음식들을 먹고 트럭을 타고 뚝뚝을 타고 배를 타는, 그런 여행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대문 앞만 나섰다 하면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앉는 저 화상들을 데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파타야의 워터파크가 딸린 리조트를 검색하고 있었다.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평쯤에 놀러온 것 같은 그런 리조트라고 했다. 파타야라니, 아아 안 돼. 파타야에 갈 수는 없어.


파타야가 나쁜 곳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심지어 나는 파타야에 가본 적도 없다. 기껏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해놓고는 고른 것이 파타야의 리조트라니, 어쩐지 어색하지 않은가. 전형적인 바보짓이다. 하지만 나는 평소 이런 바보짓을 많이 한다. 생각난 김에 나의 바보짓 퍼레이드를 반추해 보자면,

 

1. 나는 트럭을 모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1종이 아닌 2종 수동 운전면허를 땄다. 내 평생 수동 자동차를 몰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 운전면허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수동 기어가 달린 자동차로 운전 연습을 하느라 고생만 죽도록 했는데, 면허를 따자마자 클러치 밟는 법을 다 까먹어 버렸다. 결국 나는 수동 운전면허를 갖고 있지만 생계를 위해 트럭을 운전할 수도(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수동 기어가 달린 자가용을 운전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게 뭔가.


2. 한때 자연주의 출산법에 경도되었던 나는 첫째를 조산원에서 낳았다. 지하에 나이트클럽이 있는 허름한 건물의 여관방 같은 조산원에서 DJ가 틀어대는 비트에 맞춰 밤새 소리를 지르다가 도합 38시간의 진통 끝에 자연주의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환경 빼고는 모든 것이 자연주의적이었다). 그때 나는 둘째는 무조건 온갖 약물과 기구의 도움을 받아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병원에서 낳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세상에 첫째를 병원에서 낳고 둘째를 조산원에서 낳는 사람은 많아도 나처럼 반대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별 수 없다. 바보짓은 내 특기니까. 혹시 조산원과 병원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묻는다면 애 낳는 건 뭘 어떻게 하건 죽도록 아프다고 말하련다.


3. 한때 내 꿈은 영화 <카모메 식당>의 여주인공처럼 동네의 한적한 골목에 예쁜 카페를 차리고 그곳을 찾아온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1년 반 만에 나는 단골손님과 싸우고 드나드는 낯선 손님들을 경계하고 미워하면서 카페의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된다거나 몸이 고되다는 이유로 카페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물론 그 두 가지도 문을 닫은 이유에 포함이 되겠지만) 사실은 손님이 싫어서 그만둔 것이다. 손님이야말로 장사의 복병이라는 사실을 누가 꿈에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남들은 했겠지만 나는 바보라서 못한다.) 지금은 카페에 커튼을 내리고 작업실로 쓰고 있는데, 누가 들어와서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하면 단호하게 안 판다고 말한 후 매몰차게 쫓아내 버린다.


물론 이 세 가지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바보짓들을 하며 살아왔다.(바로 오늘 한 바보짓도 생각난다. 참담하다.) 내 인생은 바보짓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며 사는 일의 연속이다. 아니, 그게 내 인생 자체다.
아무튼 밤새 파타야 리조트를 검색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이러려면 굳이 태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코스라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아이들까지 끌고 태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나의 바보짓 퍼레이드를 멈춰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평생 바보로 살다 바보로 죽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더 험한 코스로 여행한 여자들도 있었다. 좋다. 나라고 못할 것이 뭔가.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트럭을 타고, 배를 타고, 예전에 그랬던 대로, 길을 잃고, 헤매고, 당황하고, 화를 내고, 싸우고, 악다구니를 쓰고, 울고, 그러다 바보처럼 웃는, 여행 같은 여행을 해보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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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2]

 

태국에 가기 전에 나는 태국 여행에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섭렵한 후 그중 한 사이트의 운영자가 직접 만든 여행 안내서를 구입했다. 좋은 책이었다. 가보지도 않고 쓴 티가 역력한 다른 안내서들처럼 들고 다니다가 국제미아가 될 일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그 책을 우리보다 더 꼼꼼히 읽어본 아빠는 이 페이지를 꼭 읽어보라고 했다. 태국의 낯선 거리 음식을 보고 ‘저런 걸 어떻게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도전해보면 다 먹을 만하다는, 특히 족발덮밥 같은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음식을 가리느라 맥도날드에 가고 서양 음식만 먹다 보면 배낭여행의 한정된 예산을 초과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태국 문화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족발덮밥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아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코펠이랑 버너 안 가지고 가냐?”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페이지는 대충 보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바보가 이런걸 당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은 방콕의 ‘보석 사기’에 관한 페이지였다. 지도를 들고 얼빠진 표정으로 방콕의 거리(구체적으로 왕궁 부근)에 서 있는 당신에게 선량한 얼굴의 태국인이 다가온다. “좀 도와줄까?”라면서.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이 찾고 있는 장소까지 가는 길을 알려준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어디에서 왔느냐, 태국은 처음이냐, 나는 유명한 T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당신은 그의 친절에 감복하고 태국의 유명 대학에 다닌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는 관광객들은 잘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유명한,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고급 정보까지 준다.


그러더니 그는 뚝뚝을 잡아주겠다고 한다. 방콕의 관광지들을 돌아보려면 이쪽이 훨씬 저렴하다면서. 직접 뚝뚝 기사와 적절한 가격을 흥정까지 해주겠다고도 한다. 그가 도로 쪽으로 나가서 두리번거리자 때마침 뚝뚝 한 대가 다가온다. 친절한 태국인은 말한 대로 저렴한 가격의 뚝뚝 투어를 흥정해준 후 고마워하는 당신에게 한마디 덧붙인다.

 

“그런데 방콕에서 보석 박람회가 열리는 것 알고 있니? 보석이 엄청나게 싸대. 요즘 외국 애들이 거기서 보석을 잔뜩 사서 자기 나라에서 비싸게 판다더라. 기회가 있으면 한번 들러봐”

 

가벼운 말투. ‘안 가면 네 손해지 나는 아무 상관도 없어’의 태도. 즐거운 여행을 빌며 그가 선량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역시 태국은 미소의 나라. 뚝뚝 기사는 태국인들의 친절에 홀딱 넘어간 당신을 그 아름답다는 사원으로 데려다준다.


사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번들거리는 양복을 쫙 빼입고 콧수염까지 기른 번들거리는 얼굴의 남자가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번들거린다. 미소도 번들거리고 말투도 번들거린다. 그는 번들거리는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신상조사가 끝난 후 그는 당신이 들고 있는 가이드북을 잠깐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는 방콕에서 꼭 보아야 할 곳들을 찾아내 짚어준다. 번들거리기는 하지만 친절한 남자다. 그때 한 서양인 남자애가 다가온다. 공부만 하다가 태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순진한 인상의 남자애다. 번들거리는 남자는 그 애가 자기 친구고, 프랑스인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인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그때 번들거리는 남자가 말한다.


“오늘 방콕에서 아시아 최고의 보석 박람회가 열린다더라. 보석을 엄청나게 싸게 판대. 부모님 선물로 좋을 거야.”


가든 안 가든 상관없지만 안 간다면 네가 참 불쌍하다는 느낌으로. 수줍은 프랑스인이 한마디 보탠다.

 

“나도 작년에 보석을 잔뜩 사서 프랑스에 가서 5배의 이윤을 붙여 팔았어. 올해도 그래 보려고.”


당신은 갑자기 흥분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추천할 정도면 분명히 뭔가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는 금전운이란 없었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기대도,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당신의 인생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할 것이다. 남들이 돈방석에 올라앉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보석 박람회가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사원을 뛰쳐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뚝뚝 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친다.


“보석 박람회장으로!”


박람회장은 모르는 사람은 찾아가기도 힘들 방콕 시내 어딘가의 커다란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그렇게 유명한 박람회라더니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빨리 낚아챌 수 있게 되었다.


초조함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홀 같은 곳에 보석이 잔뜩 진열된 쇼케이스를 늘어놓고 대부분 중국계 태국인으로 보이는 보석상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다. 갑자기 당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석을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뭐가 보석이고 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보석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당신의 눈에도 이 보석들은 제3세계를 제외하고서는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디자인 같아 보인다. 심지어 가격표에 찍힌 금액은 심장마비가 올 지경이다. 그래도 일단 사가지고 가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당신의 맞은편으로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나타난다. 얼빠진 미소를 띤 채로 보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을 너절한 차림을 하고서 쇼케이스 사이를 걸어 다니는 노란머리의 덩치 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연하다. 그건 당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한 사람의 얼굴.


사기의 기본은 ‘우연을 필연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에게 다가와 길을 알려주었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뚝뚝은 신호를 받고 달려왔으며, 사원에서는 번들거리는 남자와 프랑스인 남자애(알바생으로 추정)가 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것이 신이 내린 대박의 기회라는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놀라운 우연의 고리가 조금이라도 느슨했더라면, 또는 그 느슨함을 눈치챌 만한 약간의 지능이 있었더라면, 당신은 보석 박람회장을 멍청한 얼굴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 하면, 바로 내가 그 사기를 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가이드북의 ‘보석 사기’ 페이지를 보며 비웃기까지 했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이런 사기를 당하나.’ 그 바보가 바로 나였다.


다행히 최후의 순간에 이것이 사기임을 눈치 챌 정도의 지능은 있었던(침팬지 정도의 지능이면 가능) 나와 동생은 황급히 보석 박람회장을 빠져나왔다.(불쌍한 미국인 동지는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수수료를 못 챙기게 되어 기분을 잡친 뚝뚝 기사와 칼부림을 한판 벌인 후 무사히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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