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fiction으로 외도를 했다는 책이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이었다.
주인공 '쉐벡'의 행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요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송두율 교수 등과 겹쳐지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배경인 '우라스'와 '아나레스'는 쌍둥이 행성이다. 행성은 쌍둥이이지만 거기에 사는 이들의 사회체계는 대조적이다.
우라스에는 현재의 지구와 비슷한 환경으로, '소유주의자'라고 표현된,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혼란한 제3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고,
아나레스는 우라스의 소유주의 국가에서 아나키스트 혁명을 일으키고 이주해 온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두 행성 사이에는 필수적인 구상무역 이외의 교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이른바 냉전 상태에 있다.

주인공 '쉐벡'은 아나레스의 물리학자로, 시간에 관한 통일된 이론을 완성하는 인물이다.
아나레스에서 자신의 물리학 이론에 대해 이해 받지 못하자, 쉐벡은 정치적으로는 수백년간 적대적 관계를 지속했지만 자신의 이론을 이해하는 우라스로 간다. 거기서 쉐벡은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는 한편, 우라스의 소유주의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빈민계층의 투쟁에 참여하고는 다시 아나레스로 돌아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 작가는 여러 사회 체제의 특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또한 우라스와 아나레스인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체제가 주입한 편견도 묘사하고 있다. 우라스나 아나레스, 어느 사회 체제에서든 공동체의 발전과 함께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는 노력이 끊임 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볼 때 쉐백이 완성하는 시간물리의 개념을 통해 이런 갈등의 극복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실재 소립자 물리학에서 물질의 가장 기본 구조가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관한 논쟁이나, 불확정성의 원리 등 한가지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쉐벡이 제시하는 시간 이론도 '동시성'과 '연속성' 이론을 아우르는 이론이었다. 어느 하나의 이론, 하나의 사상만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실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요즘 송두율 교수의 귀국과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서 떠들썩 하다.
내 개인 생각은 송두율 교수를 비난하기에 앞서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가 그의 행보를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사회였는지부터 반성해야 할것 같다.
그의 과거 행적에 대한 조사를 정확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나, 지금과 같은 여러 어려움을 예상하고도 귀국을 감행한 만큼 포용하는 조국이 되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사회 혹은 종교에서나 이른바 '믿음' 혹은 '신념'이 강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가장 배타적이고 억압적이다. 하지만 상생의 길은 검거나 희기를 거부하는, 그럼으로써 비난을 감수하는 회색인들에 의해 열린다.

회색인들이여,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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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3-11-26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송두율교수 건을 보면서, 말씀하신 것보다 한참 저급한 부분에서 화가 납니다. 김일성 생일과 장례식에 가고 안가고, 전향서를 쓰고 안쓰고를 따지는 데서는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ㅠ.ㅠ

가을산 2003-11-2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정신과 환자 중에서도 의처증이나 의부증을 가진 사람들의 치료가 정신분열증이나 조울증 환자보다 치료가 어렵습니다. 후자는 그래도 자기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전자는 절대 설득되지 않거든요. 주위 사람들만 피곤해집니다.
우리 나라에는 의홍증(?) 환자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홍'이 아닌 걸 '홍'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이고, 한발 나아가... '홍'이면 안되나? 얌전히 있는 '홍'을 왜 가만두지 않는거지?

씨네 21에서 퍼온 글입니다. 위안이 되려나요?

[펌] [씨네21] 어떤 협박
글쓴이 : 진중권 2003-11-07

한 사람이 포승줄에 묶여 조사를 받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남의 등을 치지도, 남을 때리지도 않았다. 탈세를 한 것도, 밀수를 한 것도 아니고, 마약을 판 것도 아니다. 하다 못해 이웃집 여자랑 바람피다가 들통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포승줄에 묶여 있다. 왜 그럴까? 난 모르겠다. 그를 잡아다가 조사하는 자들도 그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그 이유를 그들은 그에게 묻기로 했다. “당신이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가?” 얼마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인가. 근데 이건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송두율 교수가 구속됐다. 참으로 너절하게도 그 사유가 국보법 위반이라고 한다. 북한에 다녀오고, 노동당에 가입을 하고, 여행 및 학회 운영 경비 받아쓰고, 북한의 학자들과 몇 번 학술회의 열고, 수령님 초상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개성에 출장을 가고, 평양에 쇼핑을 가고, 금강산에 소풍을 가는 시대에, 겨우 이 정도로 인신을 구속할 사유가 되겠는가? 당연히 안 된다. 검찰에서도 이 정도의 낯간지러운 사유로는 인신을 구속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잡아 가둬야 하는가?

검찰에서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거다. “대체 우리는 왜 송 교수를 잡아다 조사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를 구속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실존적 물음이 검찰에서 밝혀내야 할 이 사건의 핵심의혹이다. 온갖 자료를 뒤지며 수사를 했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누굴까? 송두율! 그래서 그들은 일단 구속부터 하고 송 교수에게 묻기로 했다. “송두율, 당신이 여기에 잡혀와 조사를 받는 이유를 대라.” 얼마나 황당한가. 초현실주의 예술가를 가진 나라는 더러 있어도, 초현실주의 검사를 가진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이 밖에 없을 게다.

송 교수를 구속하려면 제대로 된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자기들이 장담했듯이 그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북한의 권력 서열 23위라는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떠들썩하게 그 난리를 치고도 검찰에서는 그 부분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한 모양이다. 이렇다할 확증도 못 잡았으면서 검찰은 덜컥 구속 영장을 신청했고, 무슨 이유에선지 법원에서는 덜렁 영장을 내주었다. 제 발로 걸어 고향에 들어온 이 학자에게 ‘도주의 우려’가 있고, 국정원에 잠입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본 모양이다. 하긴, 초현실실주의 검사도 있는데, 초현실주의 판사라고 왜 없겠는가?

저들은 자기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송 교수에게 밝히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당신이 서열 23위 노동당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사람은 당신 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이 구속당해 마땅한 사유를 당신 스스로 밝혀라.”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모양이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져야 할 입증의 책임을 피의자(?)에게 떠넘기는 격이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수사권을 아예 송 교수가 넘겨받아, 검사들을 포승줄에 묶어놓고 마구 불라고 닦달을 하는 거다. 제일 먼저 너희들이 뭘 불어야 할지 스스로 불라고 하면 어떨까?

검찰은 예술만 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로 진출해 부조리극 연출을 하다가, 이제 종교계에까지 진출해 사제 개업을 했다. 고해성사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태극기 아래 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라. 이로써 검찰청사는 졸지에 성령 충만하고 은혜 넘실거리는 성전이 된다. 하기 싫다는 사람, 기어이 ‘전향’시켜서 황장엽처럼 반공부흥회장 찾아다니며 ‘간증’이나 하며 먹고사는 애국 전도사를 삼을 작정인가? 검찰의 임무가 기껏 이교도를 ‘대한진리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있단 말일까? 할 일 되게 없다. 시간이 막 남아든다. 거기도 구조조정 좀 해야겠다.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이라더니, 혐의 내용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구체적인 ‘행위’가 전혀 없다. 그래서 기껏 머릿속의 ‘생각’을 문제삼는 거다. 나리들께서 송 교수 저서의 이적성을 검토하겠단다. 자기들이 학술서적 심사위원씩이나 할 주제가 된다고 믿는 걸까? 무지 중에서 가장 무식한 무지가 이렇게 제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송두율 교수를 붙잡아 놓고 하는 짓은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야만적 의식이다. 좋게 말하면 골빈 보수층들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장수만세 위문공연, 나쁘게 말하면 허접한 혐의로 구속해 놓고 석방과 전향을 맞바꾸자고 흥정하는 야쿠자 협박질이다. 그만하면 됐다, 마이 무구따. 애먼 사람 그만 좀 괴롭히고 당장 풀어 주라.

비로그인 2004-05-0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 제 서재 보관함으로 담아 갑니다.
또한 초라한 회색인의 한 사람으로...용기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