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어머니와 ‘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긴장 관계를 부채질하는 것은 현대의 죄책감이라는 특별한 부담이다. 그 죄책감은 이전의 많은 전례에서는 흘러나올 수 없다. 원주민세대도, 농장의 여성도, 노예화된 사람도, 새로운 이민자도, 고용주계층 아래 있는 이들도 기원이 아니다. 그 죄책감은 내 생각에, 다른 일은 모두 집안의 하인에게 맡기고 육아에만 신경 쓴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감상주의적 환상에서 유래한다. - P334
서구식 요람은 흔들리고 아기침대는 흔들리지 않지만 그중 어느 것도 원주민 여성들이 했듯 아기를 여기저기로 옮기기 위해서나 밖에서 공동 노동하는 동안 아기를 넣어두기 위해서 설계되지 않았다. - P366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 그들이 느끼고 목격하는 세계에 대해 정확한 목소리를 낸다. 빅토리아 시대의 한 아이는 죽음에 대해 물었다. "하느님이 착한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때, 그들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가나요?" - P387
1920년대 시카고와 뉴욕의 아이 보는 하녀들은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것으로 돈 받는 거잖아요." "이리 와서 나한테 이 책 좀 읽어줘요." "당신이 어떻든 하녀일 뿐이잖아요. 당신이 말하는 걸 내가 따를 필요는 없어요." "나에 대해 아무것도 없잖아요"라는 말은 애보는 하녀의 해석에 따르면, ‘당신은 내게 뭘 하라고 말할 권리가 없어요‘라는 뜻이란다. 아기는 아무리 힘들어도 모욕을 주지는 않았다. - P388
나는 어머니의 권위와 경험에 기초한 정책도, 모성주의를 보수적인시대의 페미니즘으로 보는 것도 경계한다. 그러나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명사를 동사로,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엄마 노릇 하기‘라는 행동으로 바꿔보라. 전망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하에서 모든 종류의 돌보는 이들-입양모,생모, 고용된 위탁모, 또는 여성, 남성, 레즈비언, 게이 , 성전환자,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외치는 돌봄에 대한 옹호는 실제로 광범위한 연합체를 구축할 수 있다. 21세기는 우리의 발밑에서 여전히 요동치고 있다. - P396
역사적 망각은 우리를 묶는 직물에 구멍을 남긴다. 오로지 지나치게 쉽게 반복의 강요에 의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은 잘못된 지위를 차지한다. 오래된 잘못된 확실성에, 혹은 보편적인 것에호소하는 것은 오류를 계속 유지시킨다. 지금 너무 쉽게,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했고 항상 이래야만 했던 것이 된다. 잊어버리는 것, 과거를 잃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역사적인 기억하기는 사안을 더 크게 만들고, 더 열린 결말을 만든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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