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식수 라이브 이론
이언 블라이스.수전 셀러스 지음, 김남이 옮김 / 책세상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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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궁금증으로 추켜든 책. 엘렌 식수 읽기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옮긴이의 말이 맞겠지만 식수를 전혀 알지 못하면 접근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엘렌 식수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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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그녀는 "쓰기란 그 상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성찰한다(p.7). 말하자면, 쓰기란 기억하기의 행위, 있었던 것. 있는 것, "5분 후에는" 사라질 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의 행위인 것이다.  - P132

아니요. 전 계획하지 않아요. 제가 계획하는 것은 계획하지않는 것이죠. 심지어 그것조차도 계획하지 않아요. 전 아무것도알지 못한 채 어떤 책의 시작점으로 가죠. 그것의 성별도 모르고요. 그것이 무엇이 될지, 괴물이 될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몰라요… 전혀요. 저는 그저 느낌만 갖고 있어요. 매우 이상한 느낌이요. 신뢰 같은 것. 마치 제가 약속 장소로 가면 그것이 올 것이라고 믿는 그런 느낌이요. 그게 다예요. 누가 될지, 어떻게 될지, 무엇이 될지 모르죠. 오랜 세월 제가 지니고 있는 앎의 유일한 조각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이에요. 그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 P190

만일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있다면, 만일 (버지니아 울프가 언젠가 말했듯이) 독자에게 건네질 "순수한 진리의 덩어리"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써라‘일 것이다. 식수의 ‘이론‘은 타자가스스로에 대해 글을 쓰고 읽도록 고무하는 것이다. 식수의 발자취를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여정, 자신만의 탐색을 시작하는 것, 자신만의 질문을 찾고 탐구하는 것이다.  - P194

<출구>에서 식수는 역설적 방식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규정한다. "오늘날 글쓰기의 여성적 실천을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제한되거나 코드화되거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Sorties. p. 92). 즉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를 이론화 불가능한 것‘으로 ‘이론화한다. 하나의 개념을 요모조모 따지고 분석하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단 하나의 유일한 명료한 것으로 만드는 방식이 본래적 의미의 이론이라면, 여성적 글쓰기는 그에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식수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론화한다. 기존의 개념화와 선형성, 팔루스적 경제를 따르는 이론이 아닌 이론으로서 말이다. - P200

그러나 많은 여성 작가들이 심지어 자신의 신체적 경험, 여성으로서의 경험이언어화된 적이 없고, 자아를 제대로 인식할 기회도 없이 살아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타자를 인식할 자아를 구성하는 일이다. ‘결여된 성적 주체가 아닌 온전한 성적 주체, 타자를 남성적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자아를 말이다. 그러므로 글쓰기가 시작되는 자아의 탐색이 나르시시즘적이라 해도, 그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듯 남성이 자신의 완전함과 사랑에 빠지는 식의 나르시시즘일 수 없다. 그것은 자아의 파편들 사이를 개미처럼 기어 다니며 다시 이어 붙이고 다시 잘라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타자성을 인식하는 나르시시즘이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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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비극과 고통을 바라보는 첫 번째 단계는 내가 그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시에 내 고통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남에 의해서 내 고통이 함부로 다루어지지  않도록  저항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고통의 문제는 결과적으로 일종의 윤리적인 문제가 됩니다.
비극이건 고통이건 이는 현재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사건이고, 누군가에 의해서 함부로  대상화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어떤 비극도 고통도 단순히 개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어떤 고통에도 나의  책임이 일부 있을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대상화하거나 연민하면서 남의 일로 밀어내지 않는 것. 고통과 비극이 나의 조건이기도 하며, 이를 이겨내고 극복하는 힘 역시 온전히 나에게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비극과 고통을 바라보는 출발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 P111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베르그송은 웃음이 감정적으로 차단된후에나 가능한 지성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관심한 관객의 입장으로 삶을 대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감정을 배제하고 바라보면 많은 드라마가 희극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무서운 말 같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닥친 비극조차 드라마의 관객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있다면, 감정적인 개입없이 그냥 남의 일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느 순간 나의 비극은 희극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희극성이 순수한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 P124

호이징하는 놀이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특별한 행위이며예술, 운동경기, 지식, 정치, 전쟁, 법률에까지 놀이의 원리가 스며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놀이란 ‘간접적이며 실제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가 놀이 자체의기쁨에 있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놀이란 목적이 없어야 하고 일상생활에 묶여 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목적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해서 하는행위들이 놀이입니다. 그래서 놀이는 그 자체로 자유로워야 하며일상적 삶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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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시 - 광신의 언어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이민경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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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사람은 오로지 착취의 대상일 뿐 진정성은 어디에도 없다. 헌신적이고 선한 사람들을 상대로 가스라이팅하는 인간들의 뇌는 어떻게 생겼을까. 읽을수록 사람이 싫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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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아이디어를 믿도록 허락한다. 언어가-문자 그대로이든 비유적이든, 선의든 악의든, 정치적으로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든- 한 사람의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러한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는 관념적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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