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자들은 정신박약과 가난과 폭력이 유전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들은 미국의 몰락을 이끌 수도 있는, 여러 세대에 걸친 결함이자 위협이었다. 우생학자들은 민족주의, 백인성, 부를 통해 정의되는건강을 회복하여 국가를 치유하고자 애썼다.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시설에 수용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이민자들이 국경에서 돌려보내졌다.
언제나 손에 잡힐 듯하기만 한 치유를 기다리며 자원과 에너지와 언론의 관심을 낭비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삶을 유예하며 살아갈 위험을 감수 해야 한다. 치유에 대한 믿음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몸에 대한 기억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의 몸에 대한 바람에 우리를 묶어 놓는다. 특히 그러한 바람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치료기술에 기반하고 있을 때, 우리의 몸-마음은 쉬이 환상이자 투영 projection이 되어버린다.
결함이 있다 defectiveness는 말은 치유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고 정당화한다.
우리의 몸-마음은 하나도 빠짐없이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받고 정상 혹은 비정상, 가치 있는 것 혹은 버려도 되는 것, 건강한 것 혹은 성치 못한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의 몸-마음은 우리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다주고,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또 때로는 그저 약간의 개선을 위해서 의료와 의료기술을 필요로 한다(혹은 그렇다고 믿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 대부분은 의료산업 복합체에 의지하며, 그 권위에 걸려든다.
장애를 사회적 정의의 문제로 선언하는 것은 중요한 저항의 행위였다. 장애는 마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사로 없는 계단에, 시각장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자와 오디오북의 부재에, 난독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교육 방식에 있었다. 이러한 공표를 통해 장애 정치는, 장애의 문제를 개인의 몸-마음이 아닌 이 세계에 두는 다른 사회변화운동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세상에 지나치게 사소한 순간은 없다.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은 없다. - P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