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했지만 아니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마음의 기억이라고 흔히들 만하지만 마음은 고통과 노동에 부대껴 닳아 버리고 피곤의 무게에 짓눌려 더 빨리 잊는다. 잃어버렸던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를 표시할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이 기억을 하면 못 쓴다.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현재에 바싹 붙어서 지내야 했다. - 87p
이젠 아무도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삼촌도 더 이상 죽고 없는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가 자취를 찾아갔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에 쪼들리지 않았지만 습관이 들어서 그리고 또 삶의 고통을 견디어 온 사람들 특유의 불신 때문에 여전히 궁핍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동물적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이란 또한 그 뱃속에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불행을 규칙적으로 낳아 놓곤 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지금 그의 주위에 말없이, 추억마저 비우고 오직 몇 가지 알 수 없는 영상들에만 충실한 채 허리가 굽어져 가지고 앉아 있는 그들 두 사람은 이제 다 같이 죽음의 바싹 가까이에서 다시 말해서 항상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 138p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사라졌어도 지금껏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의 이미지를 새겨 놓은 것이다. 하루 종일토록 순진 무구함과 탐욕 속에서 거침없이 뛰어다녔던 그 동네, 그러나 날이 저물어 길거리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할 때면, 나직한 발소리와 어렴풋한 목소리를 내면서 어떤 이름 모를 그림자가 하나 피에 젖은 영광인 양 약방집 전등의 붉은 불빛에 젖은 채 불쑥 나타날 때면 그리하여 갑자기 겁이난 아이가 식구들이 있는 곳을 찾아 가난한 자기 집을 향하여 달려갈 때면, 돌연 신비하고도 불길해지던 동네의 감미롭고도 좀체로 지워지지 않는 그 이미지를 말이다. -140p
그렇게도 완벽하게 이길 줄은 몰랐다가 너무나 빨리 찾아온 승리에 어떨떨해진 자크에게는 주위에서 축하해 주는 말이나 벌써부터 미화되고 있는 무훈담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만족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고 또 자존심상 어느 면은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푸른 들에서 나오면서 뮈노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가 때린 사람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자 돌연 어떤 어두운 슬픔의 감정으로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리하여 그는 남을 이긴다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 못지않게 쓰디 쓴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159p
그들은 자식을 낳아 놓고 사라졌다. 이렇게 그들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오늘 자크 자신이 그렇듯이 과거도 윤리도 교훈도 종교도 없는 채 이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그것도 밝은 햇빛 속에서 어둠과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 된 것을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덧없는 도시들을 건설해 놓고 나서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남들의 가슴 속에서도 영원히 죽고 마는 주워 온 아이들인 것이다. 마치 인간들의 역사가, 가장 해묵은 대지 위를 끊임 없이 전진해 가고 나서 그렇게도 보잘것 없는 흔적들만을 남겨 놓은 그 역사가 기껏해야 발작적인 폭력과 살인, 갑작스러운 증오와 폭발, 그 고장의 강들처럼 갑자기 불어났다가 갑자기 말라 버리는 피의 물결이 전부였다가 그 역사를 진정으로 만든 사람들의 추억과 더불어 끊임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모두 증발해 버리듯이 말이다.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혼자서 배우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채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197p
연극의 주제 또한 중요하다. 최악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바로 버림받아서 혼자이긴 해도 다른 사람들이 불행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만큼 혼자는 아닌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행복의 순간들은 때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끝없는 슬픔 속에서도 우리를 팽창시키고 떠받쳐 올려 주는 그런 순간들인 것이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행복이란 흔히 우리의 불행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신은 고통의 곁에 치유하는 약을 두었듯이 절망의 곁에는 자기 만족을 두었다.- 29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