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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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응 하고 대답했지만 아니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 파묻힌 기억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것은 마음의 기억이라고 흔히들 만하지만 마음은 고통과 노동에 부대껴 닳아 버리고 피곤의 무게에 짓눌려 더 빨리 잊는다. 잃어버렸던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를 표시할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이 기억을 하면 못 쓴다.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현재에 바싹 붙어서 지내야 했다. - 87p  

 

이젠 아무도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삼촌도 더 이상 죽고 없는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가 자취를 찾아갔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에 쪼들리지 않았지만 습관이 들어서 그리고 또 삶의 고통을 견디어 온 사람들 특유의 불신 때문에 여전히 궁핍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동물적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이란 또한 그 뱃속에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불행을 규칙적으로 낳아 놓곤 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지금 그의 주위에 말없이, 추억마저 비우고 오직 몇 가지 알 수 없는 영상들에만 충실한 채 허리가 굽어져 가지고 앉아 있는 그들 두 사람은 이제 다 같이 죽음의 바싹 가까이에서 다시 말해서 항상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 138p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사라졌어도 지금껏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하나의 이미지를 새겨 놓은 것이다. 하루 종일토록 순진 무구함과 탐욕 속에서 거침없이 뛰어다녔던 그 동네, 그러나 날이 저물어 길거리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할 때면, 나직한 발소리와 어렴풋한 목소리를 내면서 어떤 이름 모를 그림자가 하나 피에 젖은 영광인 양 약방집 전등의 붉은 불빛에 젖은 채 불쑥 나타날 때면 그리하여 갑자기 겁이난 아이가 식구들이 있는 곳을 찾아 가난한 자기 집을 향하여 달려갈 때면, 돌연 신비하고도 불길해지던 동네의 감미롭고도 좀체로 지워지지 않는 그 이미지를 말이다. -140p 

 

그렇게도 완벽하게 이길 줄은 몰랐다가 너무나 빨리 찾아온 승리에 어떨떨해진 자크에게는 주위에서 축하해 주는 말이나 벌써부터 미화되고 있는 무훈담이 잘 들리지도 않았다. 만족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고 또 자존심상 어느 면은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푸른 들에서 나오면서 뮈노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가 때린 사람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을 보자 돌연 어떤 어두운 슬픔의 감정으로 그의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이리하여 그는 남을 이긴다는 것은 남에게 지는 것 못지않게 쓰디 쓴 것이기 때문에 전쟁이란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159p 

 

그들은 자식을 낳아 놓고 사라졌다. 이렇게 그들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오늘 자크 자신이 그렇듯이 과거도 윤리도 교훈도 종교도 없는 채 이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그것도 밝은 햇빛 속에서 어둠과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 된 것을 행복해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덧없는 도시들을 건설해 놓고 나서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남들의 가슴 속에서도 영원히 죽고 마는 주워 온 아이들인 것이다. 마치 인간들의 역사가, 가장 해묵은 대지 위를 끊임 없이 전진해 가고 나서 그렇게도 보잘것 없는 흔적들만을 남겨 놓은 그 역사가 기껏해야 발작적인 폭력과 살인, 갑작스러운 증오와 폭발, 그 고장의 강들처럼 갑자기 불어났다가 갑자기 말라 버리는 피의 물결이 전부였다가 그 역사를 진정으로 만든 사람들의 추억과 더불어 끊임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모두 증발해 버리듯이 말이다.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혼자서 배우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채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4~197p 

 

연극의 주제 또한 중요하다. 최악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바로 버림받아서 혼자이긴 해도 다른 사람들이 불행 속에 빠져있는 우리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만큼 혼자는 아닌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행복의 순간들은 때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끝없는 슬픔 속에서도 우리를 팽창시키고 떠받쳐 올려 주는 그런 순간들인 것이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행복이란 흔히 우리의 불행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 신은 고통의 곁에 치유하는 약을 두었듯이 절망의 곁에는 자기 만족을 두었다.- 2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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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고 배웠다. 10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교실에 앉아 쏟아지는 아침잠을 몰아가며 EBS교육방송을 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교감이 들어와 졸고 있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우기 시작했다. 그때 구석 진 자리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교감은 학생의 손에 들린 책이 EBS교재가 아닌 걸 알고는 다가가 훈계를 주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학생은 여전히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빛이 약간 상기된 교감이 책을 뺏어 교실 구석으로 휙 집어던졌다. 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주워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에 교감이 또 책을 가로채 집어던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아, 딴 짓하지 말고 공부나해!” 모두들 숨죽인 가운데 학생이 다시 책을 주워와 펼쳤다. 그때 “찰싹!”하는 학생의 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해야지!”

그러나 고전문학 평론가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그린비, 2007)에서 학교가 말하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란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학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학교는 공부에 때가 있다고 한다. 젊었을 때 하지 않으면 공부의 시기를 놓친다는 의미다. 이 거짓말 때문에 학생일 때는 죽어라 공부해도 졸업한 순간부터 공부와 담을 쌓는다. 학교는 또 독서와 공부는 별개라고 가르친다. 독서는 취미로 하는 것이며 공부야말로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식을 배우는 행위이다. 그래서 논술을 위해 책을 읽자고 외쳐도 이 독서는 자기 목적적이라기보다 논술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학교는 서비스와 시설이 좋으면 공부실력도 좋다는 인식을 퍼뜨리고 있다. 대학들이 학내에 더 화려한 건물 짓기에 여념이 없는 현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부인가.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야말로 진정한 공부법이라고 한다. 쿵푸를 하듯 몸으로 단련하고 이것으로 일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바로 호모 쿵푸스의 공부다. 그럼 이 공부는 어떻게 하나. 일단 앎의 코뮌을 찾아야 한다. 학교는 제도나 시스템으로 작동하지만 앎의 코뮌은 스승과 학문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평생지기가 될 스승을 만나야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학문을 익힐 때는 묵독보다는 암송과 구술이 좋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 기억하기도 쉽고 구술능력도 좋아진다. 무엇보다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만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군림, 감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이기 때문이다. 책 중에서도 특히 고전이 중요하다. 고전을 통해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이로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 심급‘인 글을 써야 한다.

누구 말이 사실일까. 만약 고미숙의 말대로 학교가 거짓말을 한다면 도대체 왜, 학교는 거짓말을 하는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이반 일리히는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이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이 문구는 고미숙은 물론 학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용된다. 그런데 학교는 어떤 곳인가. (문명의 산물인)학교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일꾼으로 만들어내는 존재다. 사회는 질서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인 인재가 필요하다. 학교는 이런 요구에 부합해 학생들을 교육시킨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은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필요하다. 입학이나 취업에 있어 불이익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누구에게나 같은 것(교과서)을 가르치고 같은 문제(수능)를 내야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더 윤택한 삶을 살기위해 공부에 열중하고 학교는 더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하려 혈안이다. 당연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십대에만 필요하고, 독서와는 별개일 수 있다.

과연 이를 두고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는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실용적인(실생활에 필요하다는 실용의 의미가 아니라 수능과 취업을 위한 실용이라는 뜻) 공부를 강요했을 뿐이다. 만약 학교가 거짓말을 했다면, 논술평가를 대비해 다독을 권하는 요즘 학교에 대해서 고미숙은 할 말이 없을 게다. 대학입시와 로스쿨 전형에서 논술평가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학교는 변경된 평가기준에 맞춰 이번에는 주입식교육에 더해 책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까지 가르치고 있다. 2014년 수능개편안에서 국영수의 비중이 커지자 몇몇 학교들이 국영수의 수업 시간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진 사탐, 과탐, 제2외국어의 수업 시간을 줄였다. 결국 학교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공부와 공부법은 거짓말이라기보다 단지 학교의 기능과 목적에 따른 것으로 봄이 더 합당하다.

그렇다면 학교에 대한 비판은 달라져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로봇 같은 일꾼을 배출해내는 학교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일리히처럼 아예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함이 맞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의 내용과 그 방법에 대해 비판하려면 학교가 아닌 일등만 인정하는 사회나 일등해도 먹고 살기 힘든 경제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자기수양을 위한 공부가 공부인줄 몰라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문제라도 더 맞추려면 방과 후라도 수능문제집을 붙잡고 있어야하고 회사에서 오래 버티려면 퇴근 후라도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한다. 사람들이 책에 애정을 갖지 못하는 현상은 책을 읽을 여유를 주지 않는 경제적 여건과 자기 수양적 공부보다 학위를 인정하는 사회 인식의 탓이 크다. 이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학교는 계속해서 현 구조에 부합하는 교육 방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학교가 말하는 공부와 방법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고미숙은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라고 했다. 즉 공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한다는 의미다. 맞는 말이다. 남을 의식하고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희생하는 자에게 결코 행복한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말대로 욕심을 버리고 자기수양적 공부를 하면 오히려 내면이 풍요로워지고 더 큰 기쁨이 찾아올 것이라는 데 의심이 없다.

그러나 이는 옳을지는 몰라도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다. 특히 제도권내의 교육이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말은 위험하다. 인간은 사회제도 안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생각의 나무, 2009) 같은 책을 읽고 학교 교육에 반감을 가진 학생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학교를 거부하거나 신념에 반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이어간다.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은 일자리를 찾거나 검정고시 학원으로 향한다. 당장은 학교를 거부해도 결국은 사회 제도 내에 재진입하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으며 이에 자퇴경험은 더 큰 부담이 된다. 대안학교도 마찬가지다. 사회전체가 학벌과 경제력에 가치를 두고 있는 한 다른 가치를 갖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도 좋을 리 없다. 자신이 하는 공부가 쓸데없고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학교에 대한 이해관계나 현실적인 설명 없이 학교를 비난하는 태도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다.

고전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고미숙은 자신이 주장한 공부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 설립한 ‘연구공간수유+너머’에 식당을 지었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스스로 고전이 아니라도 호모 쿵푸스가 되는 공부법이 여럿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미숙은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영화 만들기 등의 체험학습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대안학교에서 책 읽는 풍토를 마련하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런데 체험학습만큼 몸으로 익히는 공부가 어딨을까. 자전거 타는 법을 글이나 말로 배우는 것보다 한번이라도 직접 타보는 일이 더 좋은 공부법이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방식의 공부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고전 읽기만을 권하는 것은 학교가 수능공부만을 고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교나 독서만이 공부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공부를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독선적인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고미숙은 공부에 대한 성찰 없이 맹목적이거나 단지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결코 학교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학교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 불황과 청년실업난이 연일 신문과 텔레비전을 장식하는 현 상황에서 고전이 진정한 공부이니 고전을 읽으라는 말도 입시에 치인 아이들에게 수긍이 갈 리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공부하면서도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깨달아 갈 수 있는 공부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 ‘교과서를 읽거나 수업을 들을 때는 비판적인 자세로 임하라.’ ‘문제가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화를 꽤하라’ 등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제도의 그물망 속에 얽혀 살아가야 한다면 학교 밖에서 앎의 코뮌을 찾기보다 학교를 앎의 코뮌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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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과 읽어야 하는 책을 읽는 것이 다르듯이  누구도 보지 않을 글을 써 내려가는 것과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다르다.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주체는 나다. 책을 읽는 이유도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읽어야 하는 책을 고르는 주체는 타인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행위는 타인의 욕구과 맞닿아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한 글, 일기장은 내 감정을 가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설명하거나 설득할 이유도 대상도 없다. 독자는 나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쓸때는 '타자'라는 대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가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을 써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에는 형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형식에 맞춰 글을 쓰다보면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넘어가지 말아야 할 선을 두고 상념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넘어가지 않으면 선 안에 생긴 여백으로 완성도가 떨어지고 넘어가면 형태를 잃어버리고만다. 반면 형식을 벗어난 글은 자칫 유아론에 빠지기 쉽다. 나만이 알아보는- 어린왕자의 모자처럼 말이다. 물론 글을 잘쓰는 전문가는 굳이 형식을 신경쓰지 않고도 한편의 완성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글에는 분명 형식이 있다. 단지 형식에 맞춰 글을 쓰지 않았을 뿐, 형식이 없는 것도 무시한 것도 아니다.  

나의 지론은 이것이었다. 형식에 맞추어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 기본이 있어야 즉 형식이 있는 글을 쓸 줄 알아야 이 기술을 변용해 더 다양한 글을 써 내려가 갈 수 있다.그래서 일단은 형식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초보자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형식까지 맞추려면 글을 쓰기 전 겁부터 집어먹을 것이다. 엔 라모트는 '당신은 일단 무슨 문장이든지 써볼 필요가 있다. 내용은 뭐라도 상관없다. 시작이 반이라고 종이 위에 쓰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글쓰기 수업, 웅진윙스)고 했다. 모든 글은 형편없는 초고에서 시작하기에 일단은 쓰고, 고쳐쓰기 과정에서 형식을 만들라는 말이겠다. 결국, 형식을 고려하되 처음부터 형식을 만들어 내용을 끼워 맞추지 말고, 내용을 먼저 쓰고 형식을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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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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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 가다'편  

‘보편적인 노래’가 있다. 밴드 ‘브로컬리 너마저‘는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같은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들의 노래는 음반으로 MP3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사랑 받고 있다. 이 보편적인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는 역시나 평범한 존재인 우리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인 작가 김애란의 「달려아 아비」(창비, 2005)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주인공 ‘나’가 들르는 편의점이 내가 들르는 곳이고, 큐마트에서 파란조끼를 입고 바코드를 찍어대는 점원이 바로 나다. 김애란은 그저 그런 존재인 우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누구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김애란이 보는 편의점은 그저 그런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혼자 사는 ‘나’가 늦은 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찾는 곳이며, 싸구려 모텔 방에서 섹스를 한 어린 커플이 컵라면을 먹는 곳이다. 편의점은 그들에게 일상을 제공한다. 팔을 긋기 위한 면도기나 약을 털어먹기 위한 생수, 데운 만두를 먹으며 잠시 쉬어갈 여유까지. 편의점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들이 잠시 쉬기 위해 찾아드는 간이역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러나 영원하지 않은 휴식을 주는 곳이다. ‘나’는 자신이 얻고 싶은 휴식을 얻기 위해 삼각형 대열을 이루고 있는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큐마트’를 돌며 전전한다. 그곳은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이름만 빼고.

그곳에서는 누구도 이름을 묻지 않는다. 아니, 이름을 묻지 않길 바란다. ‘철수’가 되느니 차라리 ‘아저씨’나 ‘사장님’으로 불리고 싶다. 그래서 정작 누군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한다. ‘나’는 국문과 학생으로, 식품학과 학생으로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세븐일레븐의 주인이 내미는 친절을 피해 퉁명스런 여주인이 있는 패밀리마트로 도망간다. 그녀의 무뚝뚝함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한다. 그렇다. 보통의 존재인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멋쩍게 인사하느니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것이, 알아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존재인 우리에게도 이름이 있다. 이름이란 내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아저씨’나 ‘사장님’이 아니라 바로 ‘철수’라고 불릴 때 그는 대중의 하나가 아니라 의미를 띈 개체가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도 보통의 존재가 아니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간들로 모여 있다.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남자는 늦은 밤 떡볶이를 사러 온 손님에게 ‘대학을 나왔다’고 말한다. 이로써 자신은 떡볶이를 파는 남자가 아니라 떡볶이를 파는 대학 나온 남자가 된다. 열쇠를 맡기기 위해 찾은 큐마트에서 ‘나’는 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실망한다. ‘나’는 그저 그런 손님이 아니라 ‘디스를 사고, 삼다수를 사가는 여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편의점에서는 이름으로 불리길 꺼려하는 걸까.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드는 편의점은 의미를 갖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은 장소다. 손님은 돈으로 일상을 구입하고 주인은 돈을 받고 서비스를 주면 그만이다. ‘나’는 친절한 편의점 주인이 건네는 호의를 거절했다. 자신의 정보나 주인과의 친분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처럼 소비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인이 다른 손님에게 건네는 친절을 보고 그곳에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반면 큐마트의 말없는 청년에게는 오히려 ‘나’가 먼저 다가갔다. 그 무뚝뚝한 청년에게 자신이 특별한 손님이자 혹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애란이 편의점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익명성과 대중성으로 인해 개인이 사라진 현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편의점은 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인간은 사는 손님과 파는 주인이지 그 손님이 어떤 손님인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히 소통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은 감춰진다. 사람들은 행여나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될까봐 타인 앞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선을 적절히 유지하는 데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들이 사람간의 관계를 단절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식당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밥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구입하는 일상, 예를 들어 삼각 김밥이나 도시락은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것으로 누가 그 밥을 만들었는지 모르며 그 밥을 만든 사람도 누가 이 밥을 먹게 될지 모르며 관심도 없다. 그곳에 ‘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김애란이 제 1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했던 작품, 「달려라, 아비」의 마지막에 실린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생긴 방 5개에 여자가 한 명씩 들어가 산다. 여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만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화장실을 쓰고 빨래를 한다. 이들은 1번방, 2번방, 3번방과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서로를 지칭한다. 여기에도 역시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곳에서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 특별한 사람이고 싶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소란스런 틈을 타 복권을 훔치면서도 동시에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소녀의 교복 치마를 내려주는 모자 쓴 남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의 모습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본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꽤나 심각한 이러한 내용들을 김애란은 오히려 발랄하고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주제는 무거워도 글은 가볍게 읽힌다. 초록과 분홍색의 표지마저도 앙증맞게 느껴져 마치 만화책 같다. 그런데 행여나 독자들이 신나게 읽고 휙 넘겨버리지 않을까 싶다. 재미가 있어 되도록 많은 독자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두시간만에 읽고 넘겨버릴 만큼 저자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가볍지 않다. 치밀하지 않은 묘사도 이에 한몫 한다. 좀 더 진지한 서술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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