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고 배웠다. 10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교실에 앉아 쏟아지는 아침잠을 몰아가며 EBS교육방송을 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교감이 들어와 졸고 있는 학생들을 일일이 깨우기 시작했다. 그때 구석 진 자리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교감은 학생의 손에 들린 책이 EBS교재가 아닌 걸 알고는 다가가 훈계를 주었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학생은 여전히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얼굴빛이 약간 상기된 교감이 책을 뺏어 교실 구석으로 휙 집어던졌다. 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주워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에 교감이 또 책을 가로채 집어던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아, 딴 짓하지 말고 공부나해!” 모두들 숨죽인 가운데 학생이 다시 책을 주워와 펼쳤다. 그때 “찰싹!”하는 학생의 뺨을 내려치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해야지!”

그러나 고전문학 평론가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그린비, 2007)에서 학교가 말하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란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학교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학교는 공부에 때가 있다고 한다. 젊었을 때 하지 않으면 공부의 시기를 놓친다는 의미다. 이 거짓말 때문에 학생일 때는 죽어라 공부해도 졸업한 순간부터 공부와 담을 쌓는다. 학교는 또 독서와 공부는 별개라고 가르친다. 독서는 취미로 하는 것이며 공부야말로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지식을 배우는 행위이다. 그래서 논술을 위해 책을 읽자고 외쳐도 이 독서는 자기 목적적이라기보다 논술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학교는 서비스와 시설이 좋으면 공부실력도 좋다는 인식을 퍼뜨리고 있다. 대학들이 학내에 더 화려한 건물 짓기에 여념이 없는 현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부인가.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야말로 진정한 공부법이라고 한다. 쿵푸를 하듯 몸으로 단련하고 이것으로 일상을 바꿔나가는 것이 바로 호모 쿵푸스의 공부다. 그럼 이 공부는 어떻게 하나. 일단 앎의 코뮌을 찾아야 한다. 학교는 제도나 시스템으로 작동하지만 앎의 코뮌은 스승과 학문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평생지기가 될 스승을 만나야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학문을 익힐 때는 묵독보다는 암송과 구술이 좋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면 기억하기도 쉽고 구술능력도 좋아진다. 무엇보다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만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군림, 감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입구'이기 때문이다. 책 중에서도 특히 고전이 중요하다. 고전을 통해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이로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 심급‘인 글을 써야 한다.

누구 말이 사실일까. 만약 고미숙의 말대로 학교가 거짓말을 한다면 도대체 왜, 학교는 거짓말을 하는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이반 일리히는 “학교는 사람들을 체계적이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이 문구는 고미숙은 물론 학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용된다. 그런데 학교는 어떤 곳인가. (문명의 산물인)학교는 그야말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일꾼으로 만들어내는 존재다. 사회는 질서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인 인재가 필요하다. 학교는 이런 요구에 부합해 학생들을 교육시킨다. 체계적인 교육과정은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필요하다. 입학이나 취업에 있어 불이익을 당하는 자가 없도록 누구에게나 같은 것(교과서)을 가르치고 같은 문제(수능)를 내야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더 윤택한 삶을 살기위해 공부에 열중하고 학교는 더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하려 혈안이다. 당연히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십대에만 필요하고, 독서와는 별개일 수 있다.

과연 이를 두고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는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실용적인(실생활에 필요하다는 실용의 의미가 아니라 수능과 취업을 위한 실용이라는 뜻) 공부를 강요했을 뿐이다. 만약 학교가 거짓말을 했다면, 논술평가를 대비해 다독을 권하는 요즘 학교에 대해서 고미숙은 할 말이 없을 게다. 대학입시와 로스쿨 전형에서 논술평가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학교는 변경된 평가기준에 맞춰 이번에는 주입식교육에 더해 책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까지 가르치고 있다. 2014년 수능개편안에서 국영수의 비중이 커지자 몇몇 학교들이 국영수의 수업 시간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진 사탐, 과탐, 제2외국어의 수업 시간을 줄였다. 결국 학교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공부와 공부법은 거짓말이라기보다 단지 학교의 기능과 목적에 따른 것으로 봄이 더 합당하다.

그렇다면 학교에 대한 비판은 달라져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로봇 같은 일꾼을 배출해내는 학교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일리히처럼 아예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함이 맞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의 내용과 그 방법에 대해 비판하려면 학교가 아닌 일등만 인정하는 사회나 일등해도 먹고 살기 힘든 경제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자기수양을 위한 공부가 공부인줄 몰라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문제라도 더 맞추려면 방과 후라도 수능문제집을 붙잡고 있어야하고 회사에서 오래 버티려면 퇴근 후라도 사람들과 술을 마셔야 한다. 사람들이 책에 애정을 갖지 못하는 현상은 책을 읽을 여유를 주지 않는 경제적 여건과 자기 수양적 공부보다 학위를 인정하는 사회 인식의 탓이 크다. 이 사회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학교는 계속해서 현 구조에 부합하는 교육 방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학교가 말하는 공부와 방법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고미숙은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는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라고 했다. 즉 공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한다는 의미다. 맞는 말이다. 남을 의식하고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현장은 전쟁터와 다름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희생하는 자에게 결코 행복한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말대로 욕심을 버리고 자기수양적 공부를 하면 오히려 내면이 풍요로워지고 더 큰 기쁨이 찾아올 것이라는 데 의심이 없다.

그러나 이는 옳을지는 몰라도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다. 특히 제도권내의 교육이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말은 위험하다. 인간은 사회제도 안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생각의 나무, 2009) 같은 책을 읽고 학교 교육에 반감을 가진 학생들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학교를 거부하거나 신념에 반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이어간다. 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은 일자리를 찾거나 검정고시 학원으로 향한다. 당장은 학교를 거부해도 결국은 사회 제도 내에 재진입하기 위해 애를 쓸 수밖에 없으며 이에 자퇴경험은 더 큰 부담이 된다. 대안학교도 마찬가지다. 사회전체가 학벌과 경제력에 가치를 두고 있는 한 다른 가치를 갖고 살아가기는 힘들다.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도 좋을 리 없다. 자신이 하는 공부가 쓸데없고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학교에 대한 이해관계나 현실적인 설명 없이 학교를 비난하는 태도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다.

고전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고미숙은 자신이 주장한 공부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 설립한 ‘연구공간수유+너머’에 식당을 지었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스스로 고전이 아니라도 호모 쿵푸스가 되는 공부법이 여럿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미숙은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영화 만들기 등의 체험학습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대안학교에서 책 읽는 풍토를 마련하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런데 체험학습만큼 몸으로 익히는 공부가 어딨을까. 자전거 타는 법을 글이나 말로 배우는 것보다 한번이라도 직접 타보는 일이 더 좋은 공부법이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방식의 공부법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고전 읽기만을 권하는 것은 학교가 수능공부만을 고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학교나 독서만이 공부라고 말하는 고미숙은 공부를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독선적인 태도에 가깝다.

아마도 고미숙은 공부에 대한 성찰 없이 맹목적이거나 단지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는 청소년들에게 쓴 소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결코 학교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학교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 불황과 청년실업난이 연일 신문과 텔레비전을 장식하는 현 상황에서 고전이 진정한 공부이니 고전을 읽으라는 말도 입시에 치인 아이들에게 수긍이 갈 리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공부하면서도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깨달아 갈 수 있는 공부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 ‘교과서를 읽거나 수업을 들을 때는 비판적인 자세로 임하라.’ ‘문제가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화를 꽤하라’ 등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제도의 그물망 속에 얽혀 살아가야 한다면 학교 밖에서 앎의 코뮌을 찾기보다 학교를 앎의 코뮌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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