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편의점에 가다'편  

‘보편적인 노래’가 있다. 밴드 ‘브로컬리 너마저‘는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같은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들의 노래는 음반으로 MP3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사랑 받고 있다. 이 보편적인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는 역시나 평범한 존재인 우리들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인 작가 김애란의 「달려아 아비」(창비, 2005)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나는 편의점에 간다.’가 사람들에게 주목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주인공 ‘나’가 들르는 편의점이 내가 들르는 곳이고, 큐마트에서 파란조끼를 입고 바코드를 찍어대는 점원이 바로 나다. 김애란은 그저 그런 존재인 우리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가 누구나가 될 수 있는 그런 존재 말이다.

김애란이 보는 편의점은 그저 그런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혼자 사는 ‘나’가 늦은 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찾는 곳이며, 싸구려 모텔 방에서 섹스를 한 어린 커플이 컵라면을 먹는 곳이다. 편의점은 그들에게 일상을 제공한다. 팔을 긋기 위한 면도기나 약을 털어먹기 위한 생수, 데운 만두를 먹으며 잠시 쉬어갈 여유까지. 편의점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들이 잠시 쉬기 위해 찾아드는 간이역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러나 영원하지 않은 휴식을 주는 곳이다. ‘나’는 자신이 얻고 싶은 휴식을 얻기 위해 삼각형 대열을 이루고 있는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큐마트’를 돌며 전전한다. 그곳은 없는 것 빼곤 다 있다. 이름만 빼고.

그곳에서는 누구도 이름을 묻지 않는다. 아니, 이름을 묻지 않길 바란다. ‘철수’가 되느니 차라리 ‘아저씨’나 ‘사장님’으로 불리고 싶다. 그래서 정작 누군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한다. ‘나’는 국문과 학생으로, 식품학과 학생으로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세븐일레븐의 주인이 내미는 친절을 피해 퉁명스런 여주인이 있는 패밀리마트로 도망간다. 그녀의 무뚝뚝함이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한다. 그렇다. 보통의 존재인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멋쩍게 인사하느니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 것이, 알아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존재인 우리에게도 이름이 있다. 이름이란 내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나’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아저씨’나 ‘사장님’이 아니라 바로 ‘철수’라고 불릴 때 그는 대중의 하나가 아니라 의미를 띈 개체가 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도 보통의 존재가 아니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간들로 모여 있다.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남자는 늦은 밤 떡볶이를 사러 온 손님에게 ‘대학을 나왔다’고 말한다. 이로써 자신은 떡볶이를 파는 남자가 아니라 떡볶이를 파는 대학 나온 남자가 된다. 열쇠를 맡기기 위해 찾은 큐마트에서 ‘나’는 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 실망한다. ‘나’는 그저 그런 손님이 아니라 ‘디스를 사고, 삼다수를 사가는 여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편의점에서는 이름으로 불리길 꺼려하는 걸까.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드는 편의점은 의미를 갖고 싶지도 주고 싶지도 않은 장소다. 손님은 돈으로 일상을 구입하고 주인은 돈을 받고 서비스를 주면 그만이다. ‘나’는 친절한 편의점 주인이 건네는 호의를 거절했다. 자신의 정보나 주인과의 친분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처럼 소비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인이 다른 손님에게 건네는 친절을 보고 그곳에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반면 큐마트의 말없는 청년에게는 오히려 ‘나’가 먼저 다가갔다. 그 무뚝뚝한 청년에게 자신이 특별한 손님이자 혹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김애란이 편의점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익명성과 대중성으로 인해 개인이 사라진 현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편의점은 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여기서 필요한 인간은 사는 손님과 파는 주인이지 그 손님이 어떤 손님인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히 소통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은 감춰진다. 사람들은 행여나 곤란한 입장에 서게 될까봐 타인 앞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선을 적절히 유지하는 데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파는 물건들이 사람간의 관계를 단절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식당은 어머니가 해주는 밥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밥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구입하는 일상, 예를 들어 삼각 김밥이나 도시락은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것으로 누가 그 밥을 만들었는지 모르며 그 밥을 만든 사람도 누가 이 밥을 먹게 될지 모르며 관심도 없다. 그곳에 ‘정’이 있을 리 만무하다.

김애란이 제 1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했던 작품, 「달려라, 아비」의 마지막에 실린 단편 ‘노크하지 않는 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똑같이 생긴 방 5개에 여자가 한 명씩 들어가 산다. 여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만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화장실을 쓰고 빨래를 한다. 이들은 1번방, 2번방, 3번방과 같이 이름이 아닌 번호로 서로를 지칭한다. 여기에도 역시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곳에서 어떤 희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 특별한 사람이고 싶지만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소란스런 틈을 타 복권을 훔치면서도 동시에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소녀의 교복 치마를 내려주는 모자 쓴 남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의 모습은 구조적인 문제이지 본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꽤나 심각한 이러한 내용들을 김애란은 오히려 발랄하고 재미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주제는 무거워도 글은 가볍게 읽힌다. 초록과 분홍색의 표지마저도 앙증맞게 느껴져 마치 만화책 같다. 그런데 행여나 독자들이 신나게 읽고 휙 넘겨버리지 않을까 싶다. 재미가 있어 되도록 많은 독자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두시간만에 읽고 넘겨버릴 만큼 저자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가볍지 않다. 치밀하지 않은 묘사도 이에 한몫 한다. 좀 더 진지한 서술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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