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문제 

 중학생 때 였다.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학생, 이건 혼자봐야해."라며 빨간 띠를 두른 비디오를 검은 봉지에 둘둘말아 주었다. 영화는 빨간 띠를 두를만큼 야하지 않았다. 동성애라는 소재를 빼면 초등학생이 봐도 될 정도로 '건전'했다. 파란 폭포가 피아졸라의 탱고에 맞춰 바람에 흩날렸고 동성애는 폭포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평범한 연애처럼 보였다.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출생의 비밀'이나 '동성애 비난', '둘을 갈라놓는 제3자'가 없어서 나는 뭘 보는지도 모른 채 영화를 봤다. 


어느 날 보영이 헤어진 연인 아휘를 찾아간다. 두 손에 피를 철철 흘리는 보영을 아휘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보영이 손을 쓰지 못하니 아휘는 하나부터 열까지 보영을 돌봐준다.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보영의 손이 나을수록 아휘는 불안하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보영은 아휘를 떠날테니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보영이 담배가 없다며 밖에 나가려고 하자 아휘는 담배를 잔뜩 사와 말한다. "담배는 여기 있으니 나갈필요 없다고." 그리고 보영의 여권을 숨긴다. 일을 끝내고 집에 온 아휘는 보영이 집에 없는 것을 보고 불안이 현실이 됐음을 직감한다. "보영이 집에 있는 몇 달이 가장 행복했다."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의 욕망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내게만 속해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싫다. '사랑'은 '소유의 욕망'이다. 문제는 우리가 타인을 온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다. 육체는 소유할 수 있어도 이 의식은 강제로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물건과 다른 지점이 '의식'에 있어 의식없는 소유는 진정한 소유일 수 없다. 



보영이 아파서 집에 머무는 동안 아휘는 보영의 몸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영의 의식은 끊임없이 밖을 향한다. 아휘는 보영의 의식을 붙잡을 수가 없다. 단지 아픈 동안 만큼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안도할뿐이다. 그런데 만약 보영도 아휘를 사랑한다면? 보영이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아휘에게 복종한다면 둘은 행복할까. 아니다. 아휘가 사랑한 보영은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이지, 영혼을 잃어버린 자유를 포기한 노예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식으로든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연인들은 애무를 한다. 적어도 애무를 하는 동안 의식은 몸에 갇힌다. 살갖이 닿는 상황에 의식이 머물기 때문이다.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이 때뿐이다. (딴 생각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탐크루즈와 니콜키드먼이 주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 남편인 하포드가 아름다운 부인 엘릿스에게 자신은 질투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단다. 엘리스는 바닥에 앉아 천천히 얘기를 시작한다. 둘이 예전에 함께 갔던 호텔 식당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장교를 기억하냐며. 장교가 호텔에 들어오던 날 그를 보고서 심장이 뛰었다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봤을 때 사랑했다고. 그가 호텔을 떠난 것을 알고서 안도(relieved)했다며. 하포드는 아내의 얘기에 충격을 받는다. 


겉으로는 함께 있고 사랑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이 결코 스스로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복종과 지배의 문제 

그래서 완전한 복종이란 없다. 사람은 누구도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지 않는데, 누군가 복종을 한다면 그것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복종을 해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한다. 그럼 왜 복종을 하는가. 

불공정 거래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회사가 밀어내기를 하면 대리점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밀어내기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절할 것이냐. 받아들이면 불공정한 거래를 '선택'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스스로 '자유'를 선택해 주인으로 남는다. 그런데 밀어내기를 거절해 자유를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거절하는 것은 결국 대리점에게 폐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누릴 주체가 없으면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대리점주의 선택권은 '복종'과 '자유'가 아니라 '복종'과 '죽음'이다. 살기 위해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고 이 복종은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된 것이 아니다. 

근대에 계약은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대중소기업이 맺는 계약서는 겉으로만 '평등'이지 실은 평등이 아니다. 한쪽에만 불리한 계약서를 동의하에 작성한다는 것은 실은 강제된 복종이다. 약자는 죽지 않으려고 불공정한 계약서에 동의을 할뿐이다. 


겉으로는 갑에게 복종하지만 실은 자유를 갈망하는 을의 의식은 이중적이다. 하지만 갑도 행복하지만은 않다. 갑은 자신이 갑이라는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을의 인정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 '거짓'이다. 복종하는 사람의 말은 강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에게서 나온 인정만이 진짜 인정이다. 


적어도 갑이 자유를 가진 주체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갑을의 관계를 상생으로 바꿔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원래 노-사는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회사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노동자는 회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힘이 한쪽으로 기울어 "당신 아니라도 우리는 괜찮다."며 회사가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꼴이다. 균형이 무너져서 곳곳에서 말도 안되는 지배-복종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 남의 생명을 위협하며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런 불공정 거래를 근절해야 한다. 균형의 추를 다시 돌려놓아야 을도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갑이 깨달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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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 P.51

 

이라고 되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2년  전 썼던 노트를 재활용하려고 꺼냈더니 이런 글이 있다.

글솜씨는 타고나는 거다. 엉덩이의 힘도 받쳐줘야 하겠지만.

 

" 그것은 '마법적인 머리카락' 자체의 힘.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머리카락이 인간의 신체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랄만한 변성 작용의 힘이다. 머리카락에 가해지는 모든 조작- 자르기, 면도하기, 멋내기 등-은 과거의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사람을 불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문화권에서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으로 배정된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모든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열등한 것에서 우월한 것을 추출해내는 경이로운 행위의 도구가 된다.

 

창조 행위는 쓰레기의 분리와 처리 행위에서 절정, 완성, 진정한 성취에 이르게 된다.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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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가. 미식가 친구를 따라 압구정 현대백화점을 찾았다. 푸드코트 음식치고 맛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별 기대 안했다. 대기번호 오백번인가를 받고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고나서야 소문난 '팥빙수'를 먹을 수 있었다. '맛'만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 화덕 피자와 냉동피자의 차이라고할까나. 몸에 좋을 건 없지만 달달한 맛으로 먹는 팥빙수가 아니라 영양을 골고루 갖춘 건강 음식같았다. 밍밍한 '웰빙'이 아니라 구수한 '옛맛' 말이다. 맛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서  8000원을 주고 먹을 맛은 아니었다.) 비결은 '팥'에 있는데 친구말인 즉 팥을 전라도 어디에서 공수해와서 백화점 지하에서 직접 쑨단다. 장사가 하도 잘돼서 체인하나를 더 내기로 했다는데, 차라리 바퀴베네처럼 전국체인을 만들지 싶었다. 그런데 백화점 입점도 주인을 겨우 설득했다나.

 

요즘 백화점들이 '맛집'을  입점시키려고 이태원, 홍대, 가로수길 등등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어떤 가게는 백화점 직원이  몇 년을 설득해서 겨우 입점시켰다고 한다. 대게 가게 주인들은 백화점 입점을  꺼리는데 그들은 양질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싶지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체인을하면 음식의 질이 떨어져 가게 이미지도 상하고 관리하기도 힘들어서 섣불리 입점하지 않는다. 이렇게 소문난 맛집들이 맛의 '비법'을 쥐고 혈육에게만 전수하는 사이 우리들은 대기표를 쥐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주인장들은 누구를 위해 그 맛을 독점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독점'을 깨는 데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질' 저하다. 프로야구 10구단 창단을 반대하는 이유도 질저하였다. 실제 로스쿨 도입으로 새내기 법조인의 수가 배로 늘자 이들이 갈 곳이 없어 6급직에도 지원자가 속출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로스쿨 졸업자들끼리 아무리 취업자리가 없어도 질떨어지는 곳에는 지원을 말자는 결의를 하고 실제 6급에 붙은 사람은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진실유포죄'에서 박경신은

 

"우리나라의 인구 대비 법조인의 숫자는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낮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누리는 독점이윤은 지대하다... 로스쿨 정원 제한을 하루빨리 폐지하거나 획기적으로 늘이고 변호사 시험은 완전한 절대평가로 만들어야 한다. .. 법률소비자 보호를 목표로 하지 않는 모든 진입 규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고 한다. 검찰과 법원의 친정권적인 행동이 '특권층으로서의 정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보고 법조인의 수를 늘려 그 정체성을 없애자는 것이다. 법조인의 수가 많아지면 변호가 필요한 기업이나 사람들이 더 쉽게 그들의 지식을 활용할 수도 있다. 일반인의 생활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만큼 법조인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런다고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이 딴 데 가는 것도 아니고 게 중에 엘리트는 중수부에가거나 김엔장에서 스카웃해갈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일부 의대생을 따로 뽑아 정부 장학금으로 교육을 시키고 5년동안 의료취약 지역에서 의무 근무하게하는 장학의사제도도 같은 맥락이다. 초보 의사인 군의관을 지방 보건소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전문적일뿐더러 진료를 받기 힘든 지방사람들에게 병원 접근성을 높히는 것이 실력 뛰어난 대도시 병원 의사를 찾아가는 것보다 더 큰 의료혜택이다.

 

"이윤추구, 출세주의가 질서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전문가는 과학의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노동자나 농민의 전문적 향상을 저지하여 전문가들은 그 권위주의와 신비주의에 올라타고 특권적 지위를 영속화하려 한다."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모택동 일파의 말이다. 그들은 특권층의 지위를 없애고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려고 했다. (공과를 따지려는게 아니라) 이들은 의학의 대중화를 추구했는데 " 의학이란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50세로 죽을 것을 51세까지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귀한 두뇌와 거액의 돈을 쓸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 어쩌면 51세까지 살지도 모를 생명을 50세에서 버려야 하는 가난한 대중의 전반적 치료와 보건을 위한 인간의 기술"이라고 했다. 즉 희귀병치료보다 말라리아같은 대중을 위한 치료를 우선한다는 말이다.

 

우리야 북쪽에 희귀한 공산국가와 60년째 총부리를 겨누고 있어 '공산주의'하면 잡혀가기도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의 정치이념인 '국민주권'-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니까 국민의 인간적인 삶을 국가가 도모해주는 것이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둘 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좋은 질의 서비스를 모두가 누릴 수 없다면 아니 그런 서비스는 바라지도 않으니 어느정도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최저 생활'의 질을 조금 높여주는 국가적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다. 한쪽에 쏠린 독점을 푸는 것이 첫 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국민이 아닌 '자본'과 '개인의 능력'에서 나온 권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요즘, 그리고 무더위에 팥빙수가 그리워지는 요즘, 현대백화점 푸드코트에 있는 팥빙수 가게 사장님이 '비법'을 창업자들에게 전수해 대중들이 싼 값에 맛난 팥빙수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음 하는 바람이다. 한 오천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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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자주 마시다보면 질릴 때가 있다. 각성효과는 필요한데 커피는 쳐다보기도 싫을 때 에너지음료를 마시곤 한다. 카페인함유량이 더 많아서인지 각성효과는 확실히 에너지음료가 더 낫다. 하지만 특유의 가공한 듯한 맛과 왠지모르게 몸에 해로울 것 같은 느낌때문에 즐겨마시지는 않는다. 지난주는 아침마다 커피대신 '핫식스'를 마셨다. 실제로 능률이 얼마나 더 올랐겠냐마는 정신바짝차리고 오전을 보내고나면 뭔가 알찬 시간을 보냈다는 뿌듯함이 드는 건 사실이다. 커피든 에너지음료든 카페인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긴 각성제가 없다고해서 나만 능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어쩌면 없는게 모두의 건강을 위해서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다? 능력자의 하루는 오래간다!"

 

만약 카페인이 비싸서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음료가 아니라면 카페인을 구입할 여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능률이 달라질테고 그렇다면 카페인을 손에 쥔 사람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더 길어질 것이다. 그가 바로 능력자다. 일의 능률을 올려줄 물질을 구입할 여력이 있는 사람, 돈을 쥔 사람말이다. 그들의 하루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길다. 집에 가사도우미를 둘 여력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낼 확률이 높다. 비지니스석을 타고 출장을 가는 사람이 이코노미석을 타고 출장가는 사람보다 덜 피곤하기에 일의 성과도 좋다.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길에서 쓰는 시간과 에너지가 더 크다. 하지만 운전기사를 쓰는 사람은 주차를 하거나 차를 빼는 시간조차 절약한다. 이건희회장이 회의에 늦으면 임원들은 그를 기다리고 회장이 일찍 회의를 시작하면 늦은 임원들은 중요한 시간을 놓치는 것 처럼 능력자는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는다.

 

마이클 샌댈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그는 오늘날 시장에서 돈으로 서비스와 재화만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까지 매매의 대상이 된다고 꼬집고 있다. 대리모를 돈으로 사거나 놀이동산에서 긴 줄을 서는 대신 돈으로 합법적인 새치기를 하는 것이 예다. 모임에서 지각이나 결석에 벌금을 부과하면 지각자가 '벌금'으로 자신의 과오를 상쇄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덜 느껴 지각자가 속출한단다. 돈으로 양심을 사는 것이다. '합법'화 하는 것이 법의 테두리안에서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받은 양 비도덕적인 행위를 양산하고 그런 행위에 거리낌이 없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능력자와 보통인의 격차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그들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닌 48시간인데 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있을까. 뭔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갖는다고 해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조선시대에 농민들도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단지 먹고살기 바빠 공부할 여력이 없었을 뿐. 가진 자들이 도덕과 양심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가난'과 '질병', '무지',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특히 둘을 연결해주는 '인간'이라는 바탕, 거기서 나오는 '도덕'이라는 양심이 상실된 사회는 전제 군주제, 절대 왕정때와 다를 게 없다.

 

사회계약서를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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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복거일 지음 / 알음(들린아침)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한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만약 1945년 해방 후에 살고 있었다면 북한과 남한 중 어디에서 살았을 것 같으냐고. 내가 만약 그 때 학생이었다면 나는 아마 ‘사회주의’사상에 끌려 북한으로 이사를 갔을 것이다. 뭘 잘 몰랐어도 ‘자유’보다 ‘평등’이 더 귀에 솔깃했으리라. 북한으로 넘어간 ‘가상’의 나는 북한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전제 군주제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잘못된 선택을 후회했을 것 같다. 그건 내가 원한 게 아니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는 북한을 ‘악’으로 규정했기에 나는 ‘악’의 편을 선택한 값을 톡톡히 치르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처럼 역사의 흐름에 큰 ‘획’을 긋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태어난 곳에서 어른들이 가르치는 전통과 관습을 몸에 익히고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게 개인의 일반적인 삶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과거가 되면 후대의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어 평가를 내리는데 이에 따라 ‘미개인’이라 불릴 수도 있고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건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으로 역사가 진행될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며 이런 것보다 자신의 안위와 공동체의 평화를 더 걱정하기 마련이란 점이다.

 

이런 시각으로 역사를 본다면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003년, 들린아침)에서 저자 복거일이 한 말에 수긍이 간다. 일제강점기에 공무직을 수행했던 경찰이나 교사, 공무원을 모두 친일파로 처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단 그들의 행위는 ‘친일’이라기보다 ‘친체제’적이다. 오랜 기간 계속된 식민통치와 막강한 힘을 가진 일본, 식민통치가 일반적인 제국주의시대를 살아야했던 그들이 ‘독립’을 꿈꾸기보다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야했던 그 사람들에 대해 지금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도덕적 근거나 권위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친일이고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 걸까. 저자는 학살과 같은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친일’행위가 어떤 것이냐다. ‘조선이나 조선 사람의 이익보다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행위’ 혹은 ‘식민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 분류해볼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한 사람의 행위를 무 자르듯 나누기가 불가능하다. 조선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이득을 준 행위,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였으나 조선인들의 권리 향상에 힘 쓴 행위, 이런 것들을 형평성에 맞게 처벌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법적인 문제도 들고 있다. 친일 행위가 그 당시의 법을 어기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처벌하는 것은 소급 입법이다. 그리고 단심제를 적용했다는 것도 문제다. 피해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처벌을 어렵게 한다. 이에 더해 저자는 친일파청산이 우리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효용성의 측면에서 반대한다.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은 보통 조선총독부 산하의 기관에서 일하던 관료들인데 이들을 모두 처벌하면 국가 운영이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했다고 평가받는 북한은 관료조직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

 

방대한 양의 근거를 갖고 조목조목 검토하는 저자의 증명 방식과 그 내용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증오의 물살을 낮추자’는 것도 한일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단, 두 가지 사실만은 지적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저자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 즉 가장 큰 전제이자 책의 논리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다.

 

“식민통치 시대 말기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의 통치를 당연하고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일본인이라 여기게 되었다."

 

친일파 처벌이 법을 소급적용하는 것이란 주장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법을 긍정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반민족처벌법에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건 식민통치 시절의 법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제국주의의 법을 긍정하는 데에는 조선인들이 일본 통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일본인이라 생각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물론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백보 양보해서 아무리 독립운동의 역사가 마치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발굴하기’처럼 애국, 민족주의를 위해 발굴된 역사고 대다수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현실에 맞춰 살았다고 해도 그들이 일본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힘들다. ‘존엄성’, ‘자유’, ‘인권’같은 이념들이 널리 퍼져 일본인과 조선인이 평등한 기회를 제공받고 조선인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은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700년간 받아 언어도 잃었지만 결국 독립했다. 유대인들은 이 천년이나 떠돌아다녔지만 ‘유대인’이란 민족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통치 하에서 억압받고 억울한 일을 겪는 조선인이 있는 이상 그 상황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체제에 순응하는 것과 체제를 당연시하는 것은 별개의 얘기다. 거기다 고작 35년에 자신을 ‘일본인’이라 생각했다는 것은 너무 큰 무리수가 아닌가 싶다.

 

두 번째는 식민지근대화론인데, 저자는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가 조선 근대화의 초석을 닦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유럽 제국들의 식민통치와 달리 일본의 식민 통치는 조선을 ‘채취적 사회’가 아닌 ‘정착적 사회’로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조선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 정책의 본질이 동화를 통한 제국 확장이었으므로 일본은 식민지들을 영구적으로 소유한다는 전제 아래 통치했다.” 근거는 법 체계 도입, 재산권 보호, 철도 건설로 사회의 결집력을 높이고, 상업 장려로 대외무역이 증가, 학교 교육과 직업 훈련으로 노동력의 질이 향상됐다는 점이다. 조선 말 정체 돼 있던 인구증가율이 식민통치기에 급격히 늘어난 것이 바로 조선인의 생활이 안정적이고 살만 했다는 걸 방증한다고 한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의 조선 식민 통치가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식민 통치가 없었다면 조선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못했거나 늦어졌으며, 고로 조선인들은 열등하다.’ 는 주장을 펴는 일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있는데 이는 단지 조선의 경제가 일제강점기동안 성장했다고 해서 참이 되는 명제가 아니다. 사실 이는 ‘가정’에 의한 결론으로 증명될 수 없는 명제이기도 하다. 다른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더라도 강제적 식민통치가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발 물러선 이들의 주장은 이런 의문을 남긴다. ‘경제는 성장했다. 통치는 잘 못 됐다.’라는 말을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그래서 일본에게 고마워하자는 건가? 새로운 견해가 없지 않은가.

 

 설령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식민통치는 눈곱만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일본은 일본을 위해 식민지를 건설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 결과적으로 조선인이 성장했다고 그 폭력이 덜 나빠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식민통치 때문에 우리사회가 안고 살아가야할 상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이다.

 

육이오 전쟁은 지난한 전쟁이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와르르 내려왔다 와르르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늦은 밤 군인들이 느닷없이 쳐들어와 “국군이요? 인민군이요?”라고 물으면 50% 확률로 생과 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나였다면 아마도 “당신과 같은 편이요.”라고 했을 것 같다. 이념도 중요하지만 이념 없이 사는 이들에게 이념을 강요하고 다른 이념을 지녔다고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니라면, 오늘날의 잣대로 그 때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것도 썩 바람직해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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