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와의 랑데부
아서 C. 클라크 지음, 박상준 옮김 / 아작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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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SF 하면 생각하게 되는 스토리가 있다. 이는 그동안 읽었던 소설이나 봐왔던 영화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 것일텐데,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개념의 범위를 흔들어놓았던 SF 작품이 단 한권 있었는데, 바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책, <라마와의 랑데부>가 두번째가 되었다. 특히 이 책은 1973년에 쓰여진 이야기인데, 지금으로부터 거의 50여년 전에 외계의 문명에 대해 이렇게나 아름답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절대 상상력을 남발하지 않은 절제미를 갖춘 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시간적 설정은 서기 2130년, 이미 태양계의 대부분의 행성과 위성에는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고 세상은 더 이상 지구 안에서 나라로 쪼개지는 것이 아니고 행성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구 대표, 수성 대표, 달 대표, 화성 대표...이런 식으로 각 행성에서 온 대표들로 구성된 우주자문위원회가 달에 위치한 행성연합본부에서 태양계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식이다. 어느 날 태양계에 진입하여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 한 소행성을 탐지되고 조사 결과 이 소행성은 4분의 자전주기를 가진 40킬로미터 길이의 원통형의 인공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들은 여기에 라마라는 이름을 붙이고 라마가 그대로 이동할 경우 태양계에 미칠 위험과,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 거주할 정도로 우주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외계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라마와의 랑데부를 결정하게 된다.

  

   노턴 선장이 이끄는 인데보 호가 그 임무를 맡게 되는데, 이야기의 대부분은 노턴 선장과 선원들이 라마를 탐험하는 과정과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의 뒤를 바싹 붙어 따라가면서 어떤 신기한 혹은 대단한, 그것도 아니면 위험한 문명과 만나게 되나 조바심을 내게 되는데, 일반적인 SF의 등장하는 외계인이나 외계 문명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등장할 듯 말 듯 하면서 한껏 긴장과 호기심으로 부풀어 오른 상상력을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라마 전체를 압도하는 침묵과 고요가 이 이야기를 이끄는 주된 동력이고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을 이야기를 다 읽고 난 지금에야 하게 된다.

  

   노턴 선장이 스스로에게 다짐한, 라마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깨고 마지막으로 런던이라 이름붙인 지역의 밀봉된 건물의 벽을 잘라내고 들어간 곳에서 거대한 유리 신전을 발견한다. 각각의 유리기둥 안에는 라마인들의 물건이라 생각되는 것들이 3차원 입체 영상의 홀로그램으로 카달로그처럼 보관되어 있는데, 라마인들이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우주복을 통해 대략적인 라마인들의 신체적 특징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라마인들의 '방주'인 셈이다. 노아의 방주는 방주에 있던 생물들만이 살아남은 반면, 라마의 방주는 그들의 원형을 담아 우주로 보내 언젠가 적당한 장소를 만나게 되면 정착해서 바다를 자양분 삼아 보전된 원형에서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작가는 라마인들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노턴 선장 일행은 유리신전에서 정작 라마인들의 원형은 발견하지 못한 채, 인데버 호는 라마와 작별해야 할 시간을 맞이한다.

  

   태양 궤도를 도는 또 하나의 행성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라마가 태양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마지막 모습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반짝이는 누에고치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태양으로부터 다음 여행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만을 오롯이 흡수한 채 멀어져 가는 라마의 마지막 모습에 허탈함과 경외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역시...인간의 사고는 우주의 다른 문명을 이해하기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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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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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처럼>을 읽고 단번에 다니엘 페낙의 팬이 되었지만, 세상에 읽을 책이 천지라, 이제서야 그의 다른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저자 자신이 열등생이었던 점을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열등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통 지금 잘나가는 사람이 자신은 열등생이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과장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요즘은 자신을 디스하면서 은근슬쩍 치켜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있어 믿음이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자는 진짜 열등생이었나 보더라. 알파벳 a를 외우는데 일년이 걸렸다는데! 저자의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걱정할 것 없어. 어쨌거나 이십육년 뒤면 알파벳은 완벽하게 알게 되겠지"...라고 하셨다니, 열등생 인정! 하지만 저자는 기적적으로 '익사의 위기'에서, '자살의 몸짓'에서 기어이 그를 낚아낸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선생님들한테 바치는 오마주일 수도, 아니 어쩌면 현재의 모든 열등생들을 구원하는 것이 선생님들한테 달려있다는 절실한 웅변일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금세 오고 날들은 반복되고 우리의 통학생은 여전히 학교와 집을 오가고, 그의 정신적 에너지는 학교에서 발설한 거짓말과 집에서 소용된 반진실, 학교에 제공한 설명과 집에 내놓은 합리화, 부모에게 그려 보여준 선생들의 초상화와 선생들 귀에 흘려놓은 집안 문제 사이의 거짓된 일관성의 미묘한 망을, 양쪽에 걸린 극소량의 진실을 짜내느라 진이 빠진다. 왜냐하면 부모들과 선생들은 결국 언젠가는 만날 것이고 그 피할 수 없는 만남을 생각하고 그 면담의 메뉴가 될 진정한 허구를 끊임없이 공들여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적인 활동은 모범생이 숙제를 잘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우리의 열등생은 지쳐간다.(p94)

 선생이 거짓말을 모른 척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좀 더 깊숙이 숨겨진 이유인데, 명석한 의식에 비춰보자면 대충 이런거다. 즉 그 아이가 교사라는 내 직업의 실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발전시키지도 공부시키지도 못한 채, 그저 내 반에 들여놓고 그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것이다....학생의 과거, 가족, 친구들, 교육제도 자체를 결집시키는 수많은 질문은 성적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명, 즉 '기초부족'이라는 설명을 양심적으로 작성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 그것은 뜨거운 감자다! (p97)

 

   요즘 우리네 학교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선생님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물어본다면 선생님들의 아우성을 듣게 될까? 물론 선생님들도 그 나름의 고충이 있고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들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정상적인 학생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선생을 필요로 하는 학생이 정상적인 학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생의 역할을 온전히 정당화 해주는 학생', '배우는 일 자체의 필요성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선생에게 배워야 하는 그런 열등생'이야 말로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학생인 것이다. (오호..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알아서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이 필요하기나 하는 걸까? 저자는 그런 선생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이들 각자는 자기 악기로 소리를 내고 있는 건데, 그걸 거스를 필요가 없어요. 좋은 학급이란 발맞춰 행진하는 군대가 아니라 모두 함께 같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요. 만일 그들이 땡땡거리기만 하는 작은 트라이앵글이나 브롱브롱 소리만 나는 갱바르드를 물려받았다면, 적절한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내는 그 모든 소리, 그들이 훌륭한 트라이앵글과 나무랄데 없는 갱바르드가 되는 일, 그래서 각자의 기여가 전체에 부여한 음악의 질에 자랑스러워하는 일이죠. 조화에 대한 감각은 그들 모두를 발전시키고, 조그만 트라이앵글은 마침내 음악을 알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제1바이올린만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은 음악을 체험하는 거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에요.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p162)

 

   교사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트라이앵글이나 캐스터넷츠를 연주하는 아이들을 못견뎌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상태의 아이들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의 상태에 빠져있는 교사들에게 일침을 날리는 직언이다. 이런 선생님한테만 우리 아이들이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일까.

 

"너희 선생들은 하나같이 똑같아! 너희에게 결핍된 건 무지한 상태에 대한 강의야!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온갖 지식의 경연대회를 통과했을 때, 그 때 너희가 갖춰야 할 최초의 자질은 너희는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파악해내는 능력이어야 해!" (p361)

 

 

    선생님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마구마구 홍보해본다. <소설처럼>이 무작정 책읽기를 강요하는 부모에 대한 일침이었다면, 이 책은 날개가 부러져 기절한 제비를 되살리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하는 교사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일깨우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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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한빛비즈 교양툰 한빛비즈 교양툰 1
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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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때 생물 시간이 생각났다. 화학, 물리, 생물, 지구과학 중 그나마 좋아했던 과학을 고르라면 생물이었는데, 교과서에 나온 곤충 그림을 꽤나 그럴싸하게 따라 그렸던 기억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곤충을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바퀴벌레와 개미, 그리고 송충이를 제외하면 그렇다고 딱히 싫어하는 곤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가끔 혹은 매일 마주치는 곤충이라곤 저들밖에 없어서 곤충에 대해 아는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곤충 만화는 곤충에 대해 나 정도의 지식밖에 없는 사람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친절한 만화이다. 우선, 모르는 사람은 그림이 최고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무리 글 잘 쓰는 작가가 사실적 묘사를 해놓았다고 하더라도 한번도 보지 않은 곤충을 상상하기에 나의 상상력은 그리 풍부하지 않다. 하지만 그림을 본 순간, 마치 예전부터 알던 것처럼 순식간에 이해되면서 갑자기 곤충이라는 절지동물에 없던 흥미까지 생기게 된다.

   고생대부터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생겨나 물속에서 생활했던 곤충이 어떻게 식물보다 먼저 육지로 올라왔는지, 어떻게 육지의 삭막한 환경에 적응해 그 많은 종들이 살아남았는지 (현재 지구상에 약 120만종의 알려진 동물이 있는데, 그 중에 곤충이 80만종!이라고 한다), 때로는 실사 그림으로, 떄로는 의인화된 곤충 그림으로 어찌나 맛깔나게 설명하는지 어느 새 마지막장에 다다르게 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인터넷이나 챗팅 등에서 사용되는 줄임말 등을 과도하게 많이 사용해서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과,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 특히 일본어와 한국말을 섞어 사용하는 문장들이 자주 사용된다는 점이다(예를 들어 '닝겐도 적혈구와 튼튼데쓰네'라는 것..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가. 이렇게 쓰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곤충이란 무엇인가'라는 제4화 들어가는 장과 장을 구별하는 표지를 유시민 작가님의 <국가란 무엇인가> 책의 표지를 옮겨다놓고 '국가'를 '곤충'으로만 바꾸어 놓았는데,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터넷 연재 만화이고 좀 더 재미있게 연재를 해보려는 작가의 마음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출판이라는 과정을 거쳐 인쇄물로 나오는 경우는 다른 독자, 다른 환경,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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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지음, 안유정 옮김, 홍용진 감수 / 필요한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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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의 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전쟁사'를 내 맘대로 연상했다. 그래서 중세에 있었던 굵직한 전쟁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전쟁에서 각 나라 혹은 특정 민족이 지녔던 전략이나 전술, 사용된 무기, 그리고 그들 군대의 조직과 특성들에 관한 요약정리본이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중세라 하면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를 생각하는데, 이 책에서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가 있었던 378년부터 1515년 마리냐노 전투까지를 다루고 있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그 전까지 약 300년동안 로마인들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이었던 로마군단인 레기오 보병대의 전력과 효용성이 약화되는 시점에 동로마제국과 고트족간에 일어난 전쟁으로 고트족의 기병대가 동로마제국의 보병대를 쓸어버림으로써 보병대에서 기병대로의 이행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투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기병대에 눌려 하찮은 존재가 된 보병이 다시 살아난 것은 그로부터 천여년이 지난 14세기에 등장한 강력한 스위스군대에서인데 그렇게 종횡무진 절대 패할 것 같지 않던 스위스 군대가 프랑스의 포병 공격에 무너졌던 전투가 바로 1515년의 마리냐노 전투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저자는 전쟁의 기술과 전술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중세는 막을 내린 것으로 간주한 듯 하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교훈을 얻은 비잔티움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시작으로 과거 로마의 낡은 전쟁 기술과 이론을 포기하고 기병대를 중심으로 군대를 재편성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반면 비잔티움 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봉건시대의 시작으로 전략이나 지도자의 지휘능력보다는 무기의 탁월함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정도라서 '훌륭한 전투'라고 불릴만한 전쟁이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일반 역사 속에서는 십자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만큼은 십자군은 완전히 무시되도 좋을만큼 그 영향력이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이후 같은 동족이나 이웃으로 이루어져 탁월한 결속력과 기동력을 가진 스위스군이 단일무기를 가지고 난공불락의 보병대를 가지고 큰 승리를 거두는 동안, 스위스군대를 상대해야만 했던 다른 유럽 국가들은 기병이 우월했던 시기가 막을 내렸음에도 여전히 기병대를 고수함으로써 그로부터 한세기 이상을 스위스군대에게 명성을 내어주게 된다.

  

   밀덕이 아니라면 어렵고 지루하다고 생각될 지 모르나 군사적 사료가 많지 않고 체계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각 시대의 문학작품이나 역사가들이 기술한 짤막한 글들을 통해, 그리고 발견된 그림이나 무덤에서 발굴한 잔해를 통해 겨우 짐작정도만 할 수 있는 시기의 군사적 유물들을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가독성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역사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이 책에서 얻은 지식을 대입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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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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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시간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시간을 왜곡시켜 과거의 일이 현재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타임워프, 시간 여행을 하는 타임슬립,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 동일한 시간을 계속 반복하는 즉 특정 시간 속에 갇혀있는 타임루프 등,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재가 대부분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제외한다면 이 책은 제법 신선한 소재와 스토리를 지닌 작품이다. 

   톰은 1581년 3월3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다른 아이들과 다름 없이 평범하게 자랐는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본인의 신체의 시간이 보통 사람보다 엄청나게 느리게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끊임없이 노화해 가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속도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이가 들지 않게 보일만한 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439살이지만 이력서에는 41살로 기록한다. 시간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는 이들에게는 한가지 금기 사항이 있다.

 

음식과 음악과 샴페인과 10월에 누리기 힘든 화창한 오후는 마음껏 사랑해도 돼. 폭포의 황홀한 경치와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건 절대 안돼. 알아듣겠어? 사람들에게 집착하지마. 상대가 누구든 마음을 열어 주지도 말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 가게 될거야. 아주 천천히..

   

   바로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것만은 해서는 안될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보다 빠르게 늙어가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일을 겪는 건 그닥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보통 사람보다 늦게 나이들어가는 한 남자가 보통 여자를 사랑하는 로맨스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작가를 그 정도로 쉽게 봐서는 안된다.

   16세기 유럽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 그것도 늙지 않는 젊은 외모는 악마로 몰리고 그런 아들을 낳은 엄마는 마녀가 된다. 겨우 살아남아 신분을 숨긴 채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가는 생활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깨지지 않는 사이클 안에 갇'힌 것처럼 기진맥진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정착했던 곳을 떠나 또 다른 신분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망자 신세만으로도 버거운데, 마녀재판으로 엄마를 죽게 했던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쫓고 있다는 걸 알게된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처럼 다른 신체 시간을 가진 사람들의 소사이어티에 의해 죽음을 모면하게 되는데, 이 소사이어티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와 판타지의 경계 안으로 들어간다.

 

우린 역사의 보이지 않는 실들이야.

 

처음 들었을 때는 좋았지만 이제는 스스로 귀를 뜯어 버리고 싶을만큼 진절머리 나는 후렴을 가진 노래 속에 갇혀버린 기분이랄까.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였다....나는 이렇게 사는게 싫었다. 죽을만큼 외로웠기 때문이다. 이건 보통 외로움과 차원이 다르다. 사막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아는 사람들을 속속 잃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 자신마저 잃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과 함께 했을 때의 나를 잃어가고 있다고.

  

   그렇게 시간을 멈추고 싶어하던 톰은 결국 깨닫는다. 시간을 지배자로 생각하지 않을 때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야 할 현재에 집중할 때,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말이 아쉽기는 하다. 앞에 뿌려 놓은 떡밥 수거는 좀 천천히 해도 되었을법한데 너무 급하게 마무리하려다 보니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순식간에 급마무리되고 로맨스 소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저런 공상 속에 빠진다. 나 혼자 400년을 살고 싶진 않지만,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게 되면 정말 실감나게 가르쳐 줄 수 있지 않을까. 셰익스피어 초상화가 셰익스피어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도 알려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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