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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5월
평점 :
품절
[독서감상] 알리 러셀 혹실드,『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결혼 이후의 ‘나’를 상상해 보기
1
울리히 벡이 잘 규정했듯이 “산업사회는 언제나 단지 반만이 산업적이고 반은 봉건적”입니다. 왜냐하면 “산업사회의 설계는 출생의 장벽을 넘어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성의 불가분한 원리들을 하나의 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보했으며 그것들을 다른 성에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남성이 독점해왔고, 여성은 ‘핵가족’이란 재생산 체제 안에서 유보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자본은 이러한 여성조차 노동시장으로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그녀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직업경력을 왜 경시했느냐는 이혼법정의 질문을 그저 참고 넘겨야”했고, 한편으로 “가정사와 관련해서는 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는 상황에 놓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울리히 벡은 다음과 같이 예견합니다.
“개인주의화의 동학이 가족 내부로 확장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한다. 삶의 단계들 사이의 시간 축에 따라개인적 삶에 대한 가족의 속박은 허술해지고 결국 속박할 수 없게 된다. 가족 있음과 가족 없음의 극단 사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이고, 이행 중에 있는 전체적으로 다원적인 생애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늘어나는 추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생애를 성찰적 방식으로 느슨하게 하고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새로운 ‘시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2
혹실드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연된 혁명을 끝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남성들이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지연된 혁명”이란 “변화한 여성과 변하지 않은 직장·사회 간의 (이러한) 긴장”을 말합니다. 벡도 앞서 여성의 이중고를 이야기했었지요.
물론 남성의 가사 분담은 기존의 산업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어렵습니다. 혹실드도 “남편과 아내 간의 불공평한 가사분담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은 남녀 양성의 사회적 불평등함, 즉 이들 부부의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생활 외부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자본이 여성의 노동력을 가사 밖으로 이미 끌어냈기 때문에, 남은 것은 ‘산업사회의 성역할 이데올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실드는 여성도 이제는 노동시장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가사를 전적으로 부담할 수 없고, 따라서 남성도 함께 가사를 꾸려야 한다는 실상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연구가 빛나는 점은 왜 그것이 ‘지연’되고 있는지를 사례연구를 통해 면밀히 논증한데 있습니다. 그 ‘논증’을 통해 수사적 당위와 현실적 갭이 얼마나 각기 다른 욕망 사이를 오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 사회 역시 이제는 맞벌이가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저의 선배들이 이미 그런 길을 갔고, 저도 앞으로 몇 년 뒤면 그 길을 따르게 되겠지요.
우리는 ‘달라진 사회적 공기’ 속에 노출되어 왔기에 많은 경우 ‘평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닐 테고 여전히 확고한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요.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건 부부가 된 당사자 간의 이념적 갈등(전통주의/평등주의)이겠지요. 혹실드도 “요즘은 가사에 대한 가치관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조건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혹실드의 연구에서 보았듯이 어떤 한 부부가 오늘날의 보편적 지향(평등주의)에 비추어 볼 때, 여성 억압적인 가정으로 보일 지라도 그들 부부가 ‘전통주의’적인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행복한 부부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적인 부부가 그 지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불행해 질 것입니다. 따라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①부부가 가사에 대한 가치관이 같으냐 뿐만아니라 ②그 가치관에 합당한 실천(가사분담)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당위적 지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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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친했던 누나들한테서 농담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일섭이한테 시집갈껄.”이라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아마도 제가 만만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이 후회의 한복판에는 ‘가사분담’의 문제가 있고, 저는 왠지 그 ‘가사일’을 잘 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유약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실드의 책을 보면서 특히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은 가사분담이 ‘가치관’에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도 이러한 현상을 종종 보곤 합니다. 무척이나 가부장적인 성향을 보였던 형(전형적인 예비군 아저씨의 포스를 풍기던)이 의외로 가사일을 열심히 한다던가, 혹은 반대로 대단히 수평적인 지향을 주창하던 선배가 가사일은 완전히 등한시하는 경우라든가 말이지요. 누님들의 뒷담화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모릅니다.
누나들은 “일섭이는 결혼해도 변하지 마라”고 연신 당부를 했고, 제가 일종의 롤모델로 생각했던 형들조차 ‘생색내기용 가사’에 머무는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혹실드의 사례연구들은 ‘현실적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5
많은 경우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는 사회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전통적 성향의 부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자기 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혹실드의 사례연구에서 보듯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 바쁘고, 이미 직장일 만으로도 녹초가 되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부여되어왔던 방식으로 가사도 전담해야만 하고, 남자는 어쨌거나 더 우월한 수입에 기대어 이를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부부간의 가사분담의 문제를 원만하게 풀기위해서는 사회적 변화 역시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거창한 사회개혁을 각 개인이 당장에 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야망을 버리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야망은 더 많은 직장일을 강제하고 이는 스스로를 녹초로 만들어 가사를 등한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등한시 되는 가사일에서 부부는 ‘사랑’과 ‘행복’ 모두를 놓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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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역시나 스스로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만, 상상해보고 준비할 수 있을 따름인 것 같습니다. 저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물질적, 지위적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저로서는 건강한 관계가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 ‘사랑’에 기반한 ‘행복’에 연연하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