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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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최제훈, 「그림자 박제」,『퀴르발 남작의 성』

- 다중인격의 기원과 종료



 다중인격은 정신병이고 따라서 치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병이라고 명명되는 지점은 어디에 있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탄생시킨 다중의 인격이 스스로의 통제권 밖으로 달아날 때, 즉 내 안에 형성된 다른 인격이 나 몰래 무엇인가를 하게 될 때 정신병적 행위가 드러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인격적 행위는 공유된 신체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들어오게 된다. 내 안의 다른 인격의 과도한 자아형성 의지와 타인의 시선이 닿을 때 그는 정신병자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중인격은 단순히 정신병으로 취급되기에는 아쉬운 지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적인 요인에 대한 것이다. 최제훈의 「그림자 박제」의 주인공은 “톰”이라는 인격을 스스로 창조하여 자신의 숨겨진 잠재성을 극대화 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운 자기 계발적인 행위이다. 그림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항시 자신의 곁에 있는 것, 즉 잠재되어 있는 어떠한 것이다. 이것을 박제 할 때 잠재된 무언가는 실체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되고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죽음을 뛰어 넘는다는 종교의 힘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의 근원적인 힘은 신과 나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는 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신을 긍정하지 않을 때 종교는 형성될 수 없다. 신자의 신에 대한 긍정은 곧 자신의 긍정이 되고 이는 초월적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실패와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신의 절대적 의미 아래 신자의 삶은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어도 신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고 시궁창인 오늘 그 너머를 바라보는 힘을 갖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에 의해 창제된 것들(새로운 자아 혹은 신앙)이 자신을 앞도하게 될 때 문제는 발생된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림자 박제」의 화자가 톰의 인격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기러기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가 됐고 외로웠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탄생되는 인격들-제리와 파악되지 않는 그림자-은 그 때문이다). 화자가 자신의 인격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끝내 살인에 닿게 된 것은 다중인격 형성의 씨앗 자체가 난도질 된 화자의 상처 속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던 다중인격 형성은 그 태생적 한계(치명적 상처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때문에 잔혹한 끝에 이르게 되었다. 신을 긍정하는 종교의 힘도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즉, 신을 통한 자기긍정의 신앙적 태도가 도를 넘어 스스로 신의 도구(몰이해에서 비롯한)로 전락하게 될 때, 종교는 잔혹해지며 타인에 대한 접근이 사랑의 힘이 아니라 폭력에 의한 것이 되고 만다.


 영화 <아이덴티티>는 함께 여행 온 일행들이 잔인하게 서로를 살해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다.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 관계들은 단 한명의 생존자만을 남길 때 까지 계속 죽여야 한다. 최후의 1인을 가려야 하는 이 잔혹한 살인 게임은 사실, 다중인격의 치료과정이다. 하지만 최후의 1인이 다른 인격을 창제한 본래적 인격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다중인격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것이고, 다중인격이 형성됨은 독자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인격의 공유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인격의 치료 과정이 깊은 슬픔을 갖게 하는 것은 상처받은 자신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고 다시금 삶에 의미를 찾게 해주었던 따뜻하고 소중했던 존재(개별로 존재하는 인격들-다중인격)를 죽여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어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신의 위로로 구원을 받았을 때 그녀는 광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신에게 다시금 배신을 당한 그녀(몰이해1))는 신을 저주하고 죽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 행위가 더욱 가슴 아프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유도 다중인격 치료의 고통(위로가 되어준 존재를 죽여야 하는)과 별반 다르지 않다.


 초월적 힘에 대한 요구는 비정상적인 계기로 인해 작동한다. 초월적 힘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함으로서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행위 자체가 살고자하는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태생적으로 상처 입은 씨앗에 대한 치료가 그저 자기 내적으로 초월의 힘에 의지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중인격적 관계든 신과 자신과의 관계든, 그것이 고립된 울타리 속에서 틔운 새싹이라면 언제 자신을 삼킬 괴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개별적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상처 입은 자신의 마음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한다. 자의적인 자기애적 집착은 상처를 끊임없이 곪게 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고 또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이 상처를 진정으로 아물 수 있게 하는 힘이라서 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매번 초월의 대상을 찾아 멤 돈다. 그 대상이 종교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문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매개가 고립된 초월 의지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삼켜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기러기 아빠의 ‘톰과 제리’처럼 말이다.






1) 살인자는 신에게 용서 받지 않았다. “만일 네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제물을 그대로 두고, 그를 찾아가서 먼저 화해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도록 하여라(마태복음 15장 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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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 펭귄클래식 72
루이스 캐럴 지음, 이소연 옮김, 존 테니얼 그림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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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루이스 캐럴,『거울 나라의 앨리스』

- 당혹감을 해소하기



1

일단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당혹감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전개가 계속되는데도 소설(동화)은 그 상황들을 논리적으로 해명하지 않은 채 가볍게 지나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히 구조적인 틀에 의해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큰 틀로 보면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거울 나라에서 앨리스는 퀸이 되기 위해 전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앨리스가 왜 퀸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전진과 거꾸로 사이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전혀 해명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말장난의 연속은 몽롱함을 유지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2

어쨌거나 이 동화는 ‘잠이 들고, 꿈을 꾸고, 잠을 깨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거울 나라는 바로 그 ‘꿈을 꾸는’ 세계의 일이지요.


3

꿈에서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 세계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던질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질문을 던지며 회의를 갖게 된다면 꿈은 끝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그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꿈은 끝이 납니다.


4

제가 꾼 두 가지 꿈을 이야기 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세계를 견디지 못해 끝이 난 꿈입니다.

*

저는 한 동네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처음엔 안락한 고향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익숙한 집들이였고 익숙한 골목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저를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뭔가 조금씩 제가 생각했던 익숙함에 균열이 일었습니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조금씩 다르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계단이 없었던 것 같은데 계단이 있었고, 원래는 옥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붕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숨어 있었고 대신 고양이만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조금 지친 저는 뜬금없이 올려진 계단의 끝자락에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너편에 있던 정원 딸린 예쁜 집에 호랑이 3마리가 서성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갑자기 웬 호랑이라니.

저는 놀란 눈을 다독이며 계단을 내려가 그 집 앞으로 걸어갔습니다(다행히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호랑이는 고양이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원집의 문 앞에서 그것들은 그저 귀여운 고양이 3마리였습니다. 갸우뚱한 눈을 추스르며 다시 멀어져 봤습니다. 고양이는 다시 점점 호랑이로 변해갔습니다. 순간 배회하며 봤던 많은 고양이들이 생각이나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회에 계속 참여했던 내 곁의 고양이는 여전히 제 곁에 있었습니다. 정원집의 창문에서 겁에 질린 채 저를 바라보는(혹은 제 곁의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을 발견하는 순간 철렁히는 가슴에 힘입어 꿈에서 깼습니다.


5

두 번째 꿈입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던져 추방당한 이야기입니다.

*

즐거운 캠프파이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막연하게 교회 수련회에 와있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계 교회 수련회의 끝은 항상 캠프파이어로 막을 내린 경험이 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부드러운 손들을 붙잡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문득 밤이 너무 어두운데 하늘은 너무 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달이 두 개였던 것입니다. 꿈속에서 저는 그것이 충격이라기보다는 ‘어라?’에 가까웠고 막연하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겁고 익숙했던 세계가 갑자기 다소 낯선 세계도 바뀌게 된 것입니다.

예쁜 미소의 만류를 거절하고 조금 걸어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특히나 가까웠던 누나 한 명이 따라와 제 옆에 앉았습니다. 제 손을 잡은 누나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뭔가 낯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달이 원래 두 개인 것이 맞는지, 이 모임은 무슨 모임인 건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따위의 말을 했습니다. 누나는 이상한 생각을 한다면서 계속 놀러가자고 제 팔을 자신의 가슴에 둘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이름이 뭐였지? 그리고,

“누나는 누구세요?”

그 질문의 뒤로 캠프파이어 군중의 귀들이 밀려왔습니다. 캠프파이어의 세계는 균열이 났고, 군중들은 모두 벤치 뒤에서 저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망연자실해하며 잡아당기는 그들의 아귀 속에서 ‘이것은 꿈이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세계에서 추방되었습니다.


6

라캉은 인간이란 자기 인생에서 두 번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야 ‘정상적인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상성’은 자기기만을 통과하고 또 그것을 유지함으로서 가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보면서 느낀 그 당혹감은 그 ‘정상성’ 이전의 것을 상기시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자기기만 이전의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앨리스의 ‘거울나라’에서 제 꿈들이 떠올랐던 것도 그 둘이 같은 성격을 가진 세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시하게 여기는 ‘정상성’은 매일밤 우리가 꾸는 꿈속에서 매번 의심받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7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면서 느낀 당혹감을 제 나름 추적해 봤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전혀 당혹감으로 다가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이 동화를 읽고 재미를 느끼는 아이들, 그리고 어른임에도 역시나 당혹감은커녕 즐거움을 느끼는 어른들, 그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네요. 그런데-어쩌면,

그들의 생각을 듣겠다는 저의 이 ‘생각’도 ‘정상성’의 강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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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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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오쿠다 히데오,『공중그네』

-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기


1


얼마 전 정치 글을 한편 쓴바 있습니다. 제목은 “'경기동부연합=종북좌파=통합진보당=나라를 북한에 팔아넘길 놈들'이 사실일까?”였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①통합진보당이 진짜 북한을 숭배하는 종북주의자들의 소굴이라면 보수진형은 무기력한 빨간딱지 붙이기는 집어치고, 간첩신고를 하세요. ②자신을 종북세력으로 모는 보수진형과 그러한 프레임에 공포를 느끼는 국민들의 시선이 억울하면, 진보진형은 그 사안을 충분히 드러내 놓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타파해 가세요.


그런데 이 글을 올린 몇 몇 커뮤니티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저를 진보의 X맨이라고 규정하면서 들통 났으니 새누리당이나 빨아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 주위 사람들 때문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민주당의 한계를 이해하게 됐음에도 "진보는 종북이라서 찍어주기 좀 그렇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민주당이 대안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마지막 희망이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민주당에 걸어본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계속 양당체제처럼 정당이 운영되고 진보는 선택지에서 그냥 배제됩니다. '종북'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딱지 때문에요. 그래서 저는 "진보가 진짜 종북인가?"라고 따져 묻고 이것을 돌파했으면 합니다.” “'경기동부연합=종북좌파=통합진보당=나라를 북한에 팔아넘길 놈들'이라는 프레임이 아주 자연스럽게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서(공포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 이것이 허상임을 깨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북'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얼굴을 붉힌다고 해결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진보가 자신에 대한 종북딱지를 치워낼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해명이후 저의 입장이 그 자체로 인정받는 순간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비난조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커뮤니티에서는 아예 강등 제제를 받았습니다. 진보적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X맨 소리를 듣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보수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강등처리 되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감기몸살이 나 종일 누워있었습니다.



2


오쿠다 히데오의『공중그네』에는 신경증을 앓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회적 출세를 위해 자신의 본 성격을 끊임없이 죽이다가 병이 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무의식적 질투 때문에 병이 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치의였던 이라부는 스스로 ‘대책없는 아이같음’의 모습을 보이며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돕습니다.


신경증을 앓은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속이 좁아서? 세속적 욕망과 타고난 욕망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통제에 대한 기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이 나의 통제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크게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의 통제 안에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저의 정치글에 대한 비난을 수구꼴통 세력에게서 받았다면 저는 그러려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은 것은 그들이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이라는 저의 착각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제 통제 밖에 있는 것이었음에도 저는 그 반응을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인물들도 이 통제 가능성에 대한 오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충분히 그 사람의 문제를 알고 있고, 또 나의 잘못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간극은 자신의 통제 밖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 이성의 통제 밖으로 신체가 뛰어 버립니다.


우리는 ‘쿨’함을 가장한 냉소적 어른이 되었거나 혹은 끊임없이 경쟁과 승리의 쟁취를 통해서만 자기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면 어때. 틀리면 어때. 좀 못하면 어때. 함께 재밌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기각되기 시작된 순간은 언제 부터였을까요. 흔히 점점 많은 것에서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 대접은 여전히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통제 할 수 없는 대상으로 부터의 대접 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더욱 세속적 권력에 목을 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접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말이지요.


칸트는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항상 목적으로 다루고 결코 수단으로 다루지 말라.”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사실상 타인에 대한 통제 가능성의 이면에는 수단화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으로 대한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다시금 인간을 상호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파편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를 독립된 목적체로서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316쪽.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통제 가능성에 대한 기만을 자각하는 것, 순수한 자기 실천이 목적이 될 수 있는 것. 저는 이 문제들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첨단의 문명은 다시 신경증 환자들을 낳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는 반쯤은 정상인으로, 반쯤은 정신병자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로부터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경우에는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거나 혹은 내세에 천척하기도 합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나의 인정은 나 아닌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녀의 인정은 나 혹은 다른 그가 필요한 일이지요.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타인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는 인간, 질문을 던지는 ‘우리’. 저는 그것에 희망을 걸어봅니다. 신경증 환자들이 이라부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투명한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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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 이야기
알리 러셀 혹실드 지음, 백영미 옮김 / 아침이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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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알리 러셀 혹실드,『돈 잘 버는 여자, 밥 잘 하는 남자』

- 결혼 이후의 ‘나’를 상상해 보기



 

 

1

울리히 벡이 잘 규정했듯이 “산업사회는 언제나 단지 반만이 산업적이고 반은 봉건적”입니다. 왜냐하면 “산업사회의 설계는 출생의 장벽을 넘어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성의 불가분한 원리들을 하나의 성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보했으며 그것들을 다른 성에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는 남성이 독점해왔고, 여성은 ‘핵가족’이란 재생산 체제 안에서 유보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자본은 이러한 여성조차 노동시장으로 불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능하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그녀들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직업경력을 왜 경시했느냐는 이혼법정의 질문을 그저 참고 넘겨야”했고, 한편으로 “가정사와 관련해서는 왜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는 상황에 놓여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울리히 벡은 다음과 같이 예견합니다.


 

“개인주의화의 동학이 가족 내부로 확장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한다. 삶의 단계들 사이의 시간 축에 따라개인적 삶에 대한 가족의 속박은 허술해지고 결국 속박할 수 없게 된다가족 있음과 가족 없음의 극단 사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이고, 이행 중에 있는 전체적으로 다원적인 생애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늘어나는 추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성과 여성의 생애를 성찰적 방식으로 느슨하게 하고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새로운 ‘시도’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2

혹실드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행복한 결혼 생활”이 가능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연된 혁명을 끝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남성들이 가사를 분담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지연된 혁명”이란 “변화한 여성과 변하지 않은 직장·사회 간의 (이러한) 긴장”을 말합니다. 벡도 앞서 여성의 이중고를 이야기했었지요.

물론 남성의 가사 분담은 기존의 산업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어렵습니다. 혹실드도 “남편과 아내 간의 불공평한 가사분담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은 남녀 양성의 사회적 불평등함, 즉 이들 부부의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생활 외부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자본이 여성의 노동력을 가사 밖으로 이미 끌어냈기 때문에, 남은 것은 ‘산업사회의 성역할 이데올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실드는 여성도 이제는 노동시장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가사를 전적으로 부담할 수 없고, 따라서 남성도 함께 가사를 꾸려야 한다는 실상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연구가 빛나는 점은 왜 그것이 ‘지연’되고 있는지를 사례연구를 통해 면밀히 논증한데 있습니다. 그 ‘논증’을 통해 수사적 당위와 현실적 갭이 얼마나 각기 다른 욕망 사이를 오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

우리 사회 역시 이제는 맞벌이가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세대와는 확실히 다른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저의 선배들이 이미 그런 길을 갔고, 저도 앞으로 몇 년 뒤면 그 길을 따르게 되겠지요.

우리는 ‘달라진 사회적 공기’ 속에 노출되어 왔기에 많은 경우 ‘평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닐 테고 여전히 확고한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요.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건 부부가 된 당사자 간의 이념적 갈등(전통주의/평등주의)이겠지요. 혹실드도 “요즘은 가사에 대한 가치관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조건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혹실드의 연구에서 보았듯이 어떤 한 부부가 오늘날의 보편적 지향(평등주의)에 비추어 볼 때, 여성 억압적인 가정으로 보일 지라도 그들 부부가 ‘전통주의’적인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들은 행복한 부부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적인 부부가 그 지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은 불행해 질 것입니다. 따라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①부부가 가사에 대한 가치관이 같으냐 뿐만아니라 ②그 가치관에 합당한 실천(가사분담)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당위적 지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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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친했던 누나들한테서 농담으로 “이럴 줄 알았으면, 일섭이한테 시집갈껄.”이라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아마도 제가 만만해서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이 후회의 한복판에는 ‘가사분담’의 문제가 있고, 저는 왠지 그 ‘가사일’을 잘 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유약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실드의 책을 보면서 특히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은 가사분담이 ‘가치관’에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도 이러한 현상을 종종 보곤 합니다. 무척이나 가부장적인 성향을 보였던 형(전형적인 예비군 아저씨의 포스를 풍기던)이 의외로 가사일을 열심히 한다던가, 혹은 반대로 대단히 수평적인 지향을 주창하던 선배가 가사일은 완전히 등한시하는 경우라든가 말이지요. 누님들의 뒷담화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모릅니다.

누나들은 “일섭이는 결혼해도 변하지 마라”고 연신 당부를 했고, 제가 일종의 롤모델로 생각했던 형들조차 ‘생색내기용 가사’에 머무는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고, 또 한편으로는 나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혹실드의 사례연구들은 ‘현실적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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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는 사회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전통적 성향의 부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자기 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혹실드의 사례연구에서 보듯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 바쁘고, 이미 직장일 만으로도 녹초가 되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부여되어왔던 방식으로 가사도 전담해야만 하고, 남자는 어쨌거나 더 우월한 수입에 기대어 이를 정당화합니다. 따라서 부부간의 가사분담의 문제를 원만하게 풀기위해서는 사회적 변화 역시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거창한 사회개혁을 각 개인이 당장에 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외로 ‘야망을 버리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야망은 더 많은 직장일을 강제하고 이는 스스로를 녹초로 만들어 가사를 등한시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등한시 되는 가사일에서 부부는 ‘사랑’과 ‘행복’ 모두를 놓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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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역시나 스스로 겪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만, 상상해보고 준비할 수 있을 따름인 것 같습니다. 저의 꿈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함께 행복하게 잘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물질적, 지위적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저로서는 건강한 관계가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무엇보다 ‘사랑’에 기반한 ‘행복’에 연연하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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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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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김애란,『두근두근 내 인생』, 창비, 2011.

- ‘유유자적한 화자’를 앞세워 ‘쿨’한 감동을 주는 소설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이자 많은 매체에서 2011년 최고의 한국소설로도 꼽힌『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습니다. 재밌게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깊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그냥, 그냥, 그랬습니다. 많은 분들이 찬사를 보냈기 때문에, 저는 아쉬웠던 점들을 꼽아보고자 합니다.



1. 덜 매력적인 화자


- 저는 조로증을 앓는 작중 화자가 너무 착하고, 인생을 달관한 태도를 보여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졌습니다.


 김애란은 본 소설을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라고 명명했는데요. ‘어린 부모’와 ‘늙은 자식’의 설정과 그에 따른 의미화가 본 소설에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린 부모’에 비해 ‘늙은 자식’이 너무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고, 그래서 양자 간에 ‘어떤 긴장’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조장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어떤 긴장’은 작중화자가 좀 더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그리고 삶과 죽음 앞에 고군분투 할 때 발생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오욕칠정’1)으로부터 이미 달관된 영혼의 소유자였던 화자는 ‘어른 부모’에 비해 너무 인간적이지가 않아서, 인간적으로 너무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에 쳐해 있었지만 인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설정이 일종의 ‘쿨’한 감성을 소설 전반에 까는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깊숙하게 찌르며 다가오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 이야기의 의미화에 대하여.


- 저는 본 소설의 클라이막스를 이서하의 반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희귀병을 앓고 있던 화자에게 이서하는 완전히 새로운 외부와의 접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사기’임이 드러났음에도 소설은 그 사건을 그다지 의미화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PD 아저씨의 추정처럼 단지 소설지망생이 ‘미친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중년 아저씨 이서하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그의 태도와 너무나 손쉽게 ‘사기’를 넘어서는(얼마 간 게임 중독에 빠진다는 설정도 너무나 진부하고) 그의 모습에서 다시금 ‘소멸 된 오욕칠정’을 봅니다.

 이서하의 반전은 독자에게 ‘깜놀’을 선사하지만, 어떤 의미의 자장을 선사함으로서 소설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가장 핵심적인 플롯인데도, 전체 서사와 얼마나 유기적으로 혼합되어 의미의 자장과 파격을 주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 그리고 어머니와 PD 아저씨와의 은근한 섬씽을 그리기도 하지만, 이것도 그저 수상한 기류에 그치고 전체 서사와 별 상관없이 정리됩니다. 장씨 아저씨와 소주를 마시며 삶의 마지막 제의를 치르는 것도 전체 서사와 유기적으로 맞물려 의미화 되어간다기보다는, 그냥 소설적 장치로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배치된 것 같은 느낌이었고요.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남기는 소설이 지나치게 몽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를 임신하게 된 것을 부모가 숨기고 있었고(둘째 애가 등장하는 맥락에서의 인과성도 부족하고, 그것을 숨기는 부모를 이해하고 모르는 척 하는 화자도 왜 그래야 했는지, 그리고 하필 마지막에서야 알고 있음을 고백했는지에 대한 설득력도 매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또, 다 이해하고 마는 화자의 태도에서 발견되는 ‘정신승리’는 전체 서사와 또 어떤 맥을 가지고 의미화되고 있는지도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 설정자체가 ‘어린 부모’와는 다른 ‘늙은 자식’이었고, 그래서 ‘애’이고, ‘자식’이지만 모든 것에 있어 ‘유유자적’한 캐릭터였다고 당위를 요구한다면, 아쉽기는 하지만 저로서는 그냥 저냥 고개를 끄덕여야겠지요.


 사실 김애란은 그 명성에 비해 제가 아직은 그렇게 감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단편보다 장편을 선호하는 저의 취향 때문에 본 소설은 좀 더 기대를 한 것이 사실인데, 결과적으로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이 소설을 통해 감동을 받고 위안을 받았다고 하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 같긴 합니다. 다음번에는 저도 그 ‘감동’과 ‘위안’을 받은 ‘많은 분들’ 속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사람의 다섯 가지 욕심와 일곱가지 감정.(오욕:재물욕(財物慾)·명예욕(名譽慾)·식욕(食慾)·수면욕(睡眠慾)·색욕(色慾), 칠정:㉠.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 ㉡. 희·노·우(憂)·사(思)·비(悲)·경(驚)·공(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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