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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독후감] 최제훈, 「그림자 박제」,『퀴르발 남작의 성』
- 다중인격의 기원과 종료
다중인격은 정신병이고 따라서 치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신병이라고 명명되는 지점은 어디에 있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탄생시킨 다중의 인격이 스스로의 통제권 밖으로 달아날 때, 즉 내 안에 형성된 다른 인격이 나 몰래 무엇인가를 하게 될 때 정신병적 행위가 드러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인격적 행위는 공유된 신체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들어오게 된다. 내 안의 다른 인격의 과도한 자아형성 의지와 타인의 시선이 닿을 때 그는 정신병자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중인격은 단순히 정신병으로 취급되기에는 아쉬운 지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적인 요인에 대한 것이다. 최제훈의 「그림자 박제」의 주인공은 “톰”이라는 인격을 스스로 창조하여 자신의 숨겨진 잠재성을 극대화 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운 자기 계발적인 행위이다. 그림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항시 자신의 곁에 있는 것, 즉 잠재되어 있는 어떠한 것이다. 이것을 박제 할 때 잠재된 무언가는 실체화 되는 과정을 겪게 되고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죽음을 뛰어 넘는다는 종교의 힘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의 근원적인 힘은 신과 나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는 신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신을 긍정하지 않을 때 종교는 형성될 수 없다. 신자의 신에 대한 긍정은 곧 자신의 긍정이 되고 이는 초월적 힘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이 실패와 고통으로 점철되더라도 신의 절대적 의미 아래 신자의 삶은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어도 신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고 시궁창인 오늘 그 너머를 바라보는 힘을 갖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에 의해 창제된 것들(새로운 자아 혹은 신앙)이 자신을 앞도하게 될 때 문제는 발생된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림자 박제」의 화자가 톰의 인격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기러기 아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가 됐고 외로웠다.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자신이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탄생되는 인격들-제리와 파악되지 않는 그림자-은 그 때문이다). 화자가 자신의 인격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끝내 살인에 닿게 된 것은 다중인격 형성의 씨앗 자체가 난도질 된 화자의 상처 속에 심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 할 수 있었던 다중인격 형성은 그 태생적 한계(치명적 상처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때문에 잔혹한 끝에 이르게 되었다. 신을 긍정하는 종교의 힘도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즉, 신을 통한 자기긍정의 신앙적 태도가 도를 넘어 스스로 신의 도구(몰이해에서 비롯한)로 전락하게 될 때, 종교는 잔혹해지며 타인에 대한 접근이 사랑의 힘이 아니라 폭력에 의한 것이 되고 만다.
영화 <아이덴티티>는 함께 여행 온 일행들이 잔인하게 서로를 살해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다.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 관계들은 단 한명의 생존자만을 남길 때 까지 계속 죽여야 한다. 최후의 1인을 가려야 하는 이 잔혹한 살인 게임은 사실, 다중인격의 치료과정이다. 하지만 최후의 1인이 다른 인격을 창제한 본래적 인격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다중인격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것이고, 다중인격이 형성됨은 독자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인격의 공유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인격의 치료 과정이 깊은 슬픔을 갖게 하는 것은 상처받은 자신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고 다시금 삶에 의미를 찾게 해주었던 따뜻하고 소중했던 존재(개별로 존재하는 인격들-다중인격)를 죽여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영화 <밀양>에서 아들을 잃어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가 신의 위로로 구원을 받았을 때 그녀는 광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신에게 다시금 배신을 당한 그녀(몰이해1))는 신을 저주하고 죽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 행위가 더욱 가슴 아프고 이중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유도 다중인격 치료의 고통(위로가 되어준 존재를 죽여야 하는)과 별반 다르지 않다.
초월적 힘에 대한 요구는 비정상적인 계기로 인해 작동한다. 초월적 힘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함으로서 어떤 것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행위 자체가 살고자하는 발버둥이다. 하지만 그 태생적으로 상처 입은 씨앗에 대한 치료가 그저 자기 내적으로 초월의 힘에 의지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중인격적 관계든 신과 자신과의 관계든, 그것이 고립된 울타리 속에서 틔운 새싹이라면 언제 자신을 삼킬 괴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개별적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상처 입은 자신의 마음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한다. 자의적인 자기애적 집착은 상처를 끊임없이 곪게 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고 또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러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이 상처를 진정으로 아물 수 있게 하는 힘이라서 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매번 초월의 대상을 찾아 멤 돈다. 그 대상이 종교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문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매개가 고립된 초월 의지라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자신의 양식으로 삼아 삼켜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기러기 아빠의 ‘톰과 제리’처럼 말이다.
1) 살인자는 신에게 용서 받지 않았다. “만일 네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제물을 그대로 두고, 그를 찾아가서 먼저 화해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도록 하여라(마태복음 15장 23~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