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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연상호 감독, 권해효 외 목소리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리뷰] 사이비 [2013], 연상호
- 사이비만 사이비인가, 우리는 사이비가 아닌가
많은 분들이 추천하시던 연상호의 <사이비>를 드디어 저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작이었던 <돼지의 왕>도 괜찮았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보다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기독교 열심자라 남달리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댐 건설이 결정되면서 자신들의 고향이 수장될 상황에 놓여 있는 작은 마을에 사이비 종교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을 희망으로 변환시키는 ‘구원’이라는 종교성이 마을을 지배해 갈 때, 한 남자는 이를 부정하며 초인 같은 투쟁을 보입니다. 그의 분투하는 쟁의는 눈부셨지만, 진실을 얻는 대가는 파국이었습니다. 종교는 다시 그의 불행을 회수하여 노년의 그를 굴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절을 받습니다.
이 세계에서 유일했던 그 남자는 ‘믿음’을 의심했지만, 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믿는 사이비에 대한 ‘믿음’은 의심했지만, 자신의 믿음, 다시 말해 ‘팔자소관’은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의 딸이 자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사이비를 통해 붙잡을 때, 그는 그녀의 불행을 팔자로 규정합니다. 희망을 잃은 그녀는 십자가를 자살 도구로 사용하여 마지막 끈을 놓습니다.
<사이비>는 ‘사이비’를 소재로 다루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종교성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를 사이비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손쉽게 구분하여 밀쳐낼 수 없습니다. 불행을 구원을 위한 장치로 설정하고 믿음에의 강요를 추진하는 것은 우리 세계의 일종의 공식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기행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타개하려 합니다. 그 불행은 우선적으로 국가폭력의 도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댐의 건설은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국가의 사실상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해체를 낳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는 흩어지기를 강요당합니다. 바로 이 불행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영화에서 ‘사이비’는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하나는 지금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게끔 하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죽음 이후에도 그것이 계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사기였고, 후자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 역시 사기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마을의 문제는 ‘사이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 자체가 악질적입니다. <사이비>는 ‘사이비’의 틈바구니에서 성장하고 경쟁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어머니와 딸이 부여잡는 바짓가랑이는 그 자체가 사이비입니다. 폭력의 완화를 위한 사이비 믿음은 손쉽게 다른 사이비로 이전되고 맙니다. 폭력의 사이비에서 사랑의 사이비로 전이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적인 여러 인물이 있지만, 특기할만한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는 애당초 사이비였던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사이비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목적을 위해 사라진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대의를 두고, 불의한 수단과 방법에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할 무엇이 아니라 당장 행해져야 할 무엇입니다. 유예된 신의 나라는 조롱 받게 되고 사이비로 전락할 명분을 허락합니다. 종교적 인간의 유약함은 의심 없는 당위의 세계에서 파국이 회수해 갑니다.
의심받지 않는 종교성은 불행이란 양식을 먹고 자랍니다.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불행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종교는 건강미를 뽐냅니다. 건강해진 종교는 피폐해진 신자들에게 미소를 건네며, 불행해질 대로 불행해진 신자들은 그 미소를 믿게 됩니다. 억울하게도 그 믿음은 행복에 닿게 합니다. 종교적 믿음의 효과, 아이러니입니다.
행복한 신자입니까? 이건 사이비입니다. 진실을 얻은 이성인입니까?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종교든, 이성이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사이비의 양식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유일한 한 남자도 사이비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독단적 가부장의, 팔자소관이라는 사이비 믿음. 진실은 항상 부분적으로만 진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일그러진 믿음을 향해, ‘다시 사랑’을 외칠 것이고, 이성주의자들은 일그러진 세계를 향해, ‘다시 회의’를 지향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복귀와 믿음에의 반복과, 비판적 이성의 작동과 회의에의 지향은 어디로 항해해나갈까요? 그 항해의 여정이 어떠하든, 서로가 서로에게 사이비,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사이비,가 아닌지를 도리어 묻는, 그런 항해가 되길 열심해 봅니다.
★★★★ (8.8/10)
추신.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영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