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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아웃케이스 없음
벤 스틸러 감독, 벤 스틸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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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벤 스틸러: 성장하는 관계와 여전한 자리의 가치를 흥미롭게 포착한 영화



1


월터는 ‘라이프’잡지사에서 16년째 포토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프로필에 특기할 만한 사항을 도무지 쓸게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월터는 종종 멍이 나갑니다. 멍이 나간 그는 상상의 세계를 펼치죠. 그 세계에서만큼은 그 어떤 영화의 주인공보다 용감하고 로맨틱하며 담대합니다. 물론 그런 월터의 상상이 대담할수록 현실은 곤궁해 보이기만 하죠.


무기력해 보이기만 하는 월터에게 중요한 두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중 하나는 회사의 합병에 의한 잡지의 폐간입니다. 단 한 번의 출간만을 남겨두게 되죠. 그런 탓에 잡지의 사진작가인 션 오코넬은 자신의 최고 사진(삶의 정수)을 폐간호를 위해 월터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월터는 그 중요한 사진을 잃어버립니다. 합병에 의한 구조조정의 압박이 밀려오는 것도 모자라 그 동안 하지 않았던 치명적인 실수에 빠진 것이죠. 


또 하나의 사건은 사랑입니다. 월터는 직장동료인 셰릴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녀는 아들 하나를 둔 이혼녀로서 잡지사에 들어온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은 직원이었습니다. 월터는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온라인 매칭 사이트에 가입하기도 했죠. 어쨌든 이 두 사건으로 인해 월터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력을 잃어갑니다. 대신 상상이 점점 현실화되는 과정을 갖게 되지요.


월터는 포토에디터로서의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잃어버린 사진(월터는 오코넬이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고 여깁니다)을 찾으러 떠납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작품을 찍는 오코넬을 추적하게 되죠. 그 과정은 대담한 기상이 필요했고 소심한 월터는 주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셰릴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용기를 냅니다. 직업소명과 사랑이 그의 상상을 현실로 끌어 내려갑니다.



2


이 영화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월터의 상상 속 장면들, 세상에서 가장 담대한 산악인이 되어 셰릴에게 로맨틱한 고백을 하는 씬이나 혹은 재수 없는 새로운 상사와 결투를 벌이는 모습 등은 유머러스하게 그려집니다. 그리고 오코넬을 만나기 위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히말라야를 여행하면서 접하는 풍광은 절경입니다. 양손에 돌을 쥐고 보드를 타며 대자연을 활강하는 모습도 굉장히 인상적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월터의 상상 속 세계나 오지 여행의 대자연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월터의 삶의 자리였죠.


사진작가 셴 오코넬의 미지의 사진. 라이프 잡지의 마지막 표지 모델. 그것은 포토에디터로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월터였습니다. 빤한 연출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럼에도 이 영화가 대단해지는 순간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하고 소심한 소시민의 성장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성장 영화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별 볼일 없는 남자가 묵묵히 견디고 있었던 삶의 자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정수’였던 것이죠.



3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무기력한 현실과 과감한 상상 사이의 간극을 바꾸면서, 즉 그 너비를 좁히면서 상상을 현실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이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다만 연출적으로 과한 느낌을 주기는 합니다. 터무니없는 월터의 상상만큼이나 현실 속 도전들도 인위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보면서 중간에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 장면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인지 월터의 상상 속인지 말이지요. 감독은 이런 착각을 일정부분 주기 위해 의도한 것 같은데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만취한 헬리콥터 운전자에게 의탁하는 장면이나 이어 상어가 있는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 마침 그 때 터지는 화산을 방문하게 된다거나하는 등 종횡무진 벌어지는 여행 속 사건들이 다분히 작위적입니다.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게끔 딱 차려져 있는 아이슬란드의 파파존스나 셸터의 아들에게 줄 보드를 얻게 되는 과정도 과하게 극적이죠. 셴 오코너를 찾는 바로 그 때 마침 만나는 눈표범도 그렇고요. 게다가 오코너는 이 순간을 자신만을 위해 보낸다며 기다리던 눈표범을 사진에 담지도 않죠. 순간을 잡지 않고 그냥 보낸다는 철학(?)은 영화의 마지막에 월터가 셰릴에게 써먹기도 하지요.


월터를 착각에 빠지게 하기 위해, 셰릴의 집에 방문한 그녀의 전남편을 보여주는(남편은 셰릴을 다정하게 ‘허니’라고 부르죠) 모습도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줬습니다. 셰릴은 남편이랑 끝났다고 분명하게 말하는데, 적어도 그 장면만큼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죠. 셰릴이 애매하게 양쪽에서 간을 보는 것이면 모르겠지만요. 물론 이런 것들은 작은 아쉬움들일 뿐입니다.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고 흥미롭습니다. 중간 중간 삽입된 패러디 장면들, 예를 들어 그린란드에 갔을 때 빌리게 되는 자동차의 색깔 등은 영화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빨간차와 파란차 중 빨간차를 고르게 되는 건 영화 <매트릭스>의 그것이죠. 진실을 선택하게 되는 빨간약 말입니다. 앞서 제가 상상일지 현실일지 혼선이 왔다고 했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현실이겠거니 했었답니다.


어쨌든,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충분히 제 몫을 해냈고, 또 재밌는 영화라고 총평하고 싶네요. 성장하는 관계와 여전한 자리의 가치를 흥미롭게 포착한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였습니다.



★★★☆ (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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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연상호 감독, 권해효 외 목소리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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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이비 [2013], 연상호

- 사이비만 사이비인가, 우리는 사이비가 아닌가

 

 

많은 분들이 추천하시던 연상호의 <사이비>를 드디어 저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전작이었던 <돼지의 왕>도 괜찮았었는데, 이번 작품은 그보다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기독교 열심자라 남달리 인상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댐 건설이 결정되면서 자신들의 고향이 수장될 상황에 놓여 있는 작은 마을에 사이비 종교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불행을 희망으로 변환시키는 ‘구원’이라는 종교성이 마을을 지배해 갈 때, 한 남자는 이를 부정하며 초인 같은 투쟁을 보입니다. 그의 분투하는 쟁의는 눈부셨지만, 진실을 얻는 대가는 파국이었습니다. 종교는 다시 그의 불행을 회수하여 노년의 그를 굴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절을 받습니다.

 

이 세계에서 유일했던 그 남자는 ‘믿음’을 의심했지만, 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믿는 사이비에 대한 ‘믿음’은 의심했지만, 자신의 믿음, 다시 말해 ‘팔자소관’은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의 딸이 자신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사이비를 통해 붙잡을 때, 그는 그녀의 불행을 팔자로 규정합니다. 희망을 잃은 그녀는 십자가를 자살 도구로 사용하여 마지막 끈을 놓습니다.

 

 

 

<사이비>는 ‘사이비’를 소재로 다루지만,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종교성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영화를 사이비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손쉽게 구분하여 밀쳐낼 수 없습니다. 불행을 구원을 위한 장치로 설정하고 믿음에의 강요를 추진하는 것은 우리 세계의 일종의 공식입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기행각’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행을 타개하려 합니다. 그 불행은 우선적으로 국가폭력의 도래와 관련이 있습니다. 댐의 건설은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국가의 사실상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해체를 낳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는 흩어지기를 강요당합니다. 바로 이 불행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영화에서 ‘사이비’는 두 가지를 약속합니다. 하나는 지금의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게끔 하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죽음 이후에도 그것이 계속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사기였고, 후자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 역시 사기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 마을의 문제는 ‘사이비’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님’과 ‘성님’의 관계 자체가 악질적입니다. <사이비>는 ‘사이비’의 틈바구니에서 성장하고 경쟁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어머니와 딸이 부여잡는 바짓가랑이는 그 자체가 사이비입니다. 폭력의 완화를 위한 사이비 믿음은 손쉽게 다른 사이비로 이전되고 맙니다. 폭력의 사이비에서 사랑의 사이비로 전이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문제적인 여러 인물이 있지만, 특기할만한 사람은 목사입니다. 그는 애당초 사이비였던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사이비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목적을 위해 사라진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대의를 두고, 불의한 수단과 방법에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할 무엇이 아니라 당장 행해져야 할 무엇입니다. 유예된 신의 나라는 조롱 받게 되고 사이비로 전락할 명분을 허락합니다. 종교적 인간의 유약함은 의심 없는 당위의 세계에서 파국이 회수해 갑니다.

 

의심받지 않는 종교성은 불행이란 양식을 먹고 자랍니다.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불행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종교는 건강미를 뽐냅니다. 건강해진 종교는 피폐해진 신자들에게 미소를 건네며, 불행해질 대로 불행해진 신자들은 그 미소를 믿게 됩니다. 억울하게도 그 믿음은 행복에 닿게 합니다. 종교적 믿음의 효과, 아이러니입니다.

 

 

 

행복한 신자입니까? 이건 사이비입니다. 진실을 얻은 이성인입니까? 그 역시 사이비입니다. 종교든, 이성이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사이비의 양식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유일한 한 남자도 사이비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독단적 가부장의, 팔자소관이라는 사이비 믿음. 진실은 항상 부분적으로만 진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일그러진 믿음을 향해, ‘다시 사랑’을 외칠 것이고, 이성주의자들은 일그러진 세계를 향해, ‘다시 회의’를 지향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복귀와 믿음에의 반복과, 비판적 이성의 작동과 회의에의 지향은 어디로 항해해나갈까요? 그 항해의 여정이 어떠하든, 서로가 서로에게 사이비,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사이비,가 아닌지를 도리어 묻는, 그런 항해가 되길 열심해 봅니다.

 

 

★★★★ (8.8/10)

 

추신.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영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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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연필로 명상하기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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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소중한 날의 꿈 (2011), 한혜진, 안재훈.

- 폐허가 된 그 때의 성 앞에서, 소중한 날의 꿈.

 

 

아직도 이따금 작가지망생으로서의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모르지만, 제 창작에 애정을 갖고 있던 분들이었죠. 그 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저는 점점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되었고, 지금은 작가지망생의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 앞에 민망한 생각만 듭니다.

 

내가 꿈꾸던 세계와 현실세계의 괴리 앞에 조급한 마음이 밀려옵니다. 내가 뭘 모르고, 별에게 우주의 안부를 묻던 그 날들이 지금은 아늑하게만 느껴집니다. 소년이던 그 때, 매점보단 달 앞에서 찾는 친구의 어깨들을 토닥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누구에겐 간절한 탈출의 숫자였을 스물(20)이 저에겐 순수의 종말로 다가왔습니다. 어른이 되어 세상과 타협해 살아가는 가식과 허위의 세계가 제가 쌓은 성을 뭉갤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유약했던 자기방어가 측은한 사랑의 계기들이 되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10대의 말미에 악착같이 지키고자 했던 순수가, 이제는 그 날을 여전히 이상적으로 기억하는 외부의 사람에 의해서만 환기되는 20대의 말미에 와 있습니다. 서른(30)을 앞둔 저는 스물을 앞둔 10대 때의 제가, 그렇게 간절히 유의했고 두려워했던 그 일들이 이미 벌어진 것인지 가늠이 되지도, 더 이상 연연히 되지도 않는 무뎌짐 속에 있습니다.

 

나의 세상과, 실제 세상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 성을 빠져나와 이리 저리 밟던 자국들도 이제는 흐트러져갑니다. 그 때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게 무어라 할지 두려워하던 시절도 이미 너무 예전처럼 느껴집니다. 유치하고 순진했다고 생각했던 그 때를 털어내고 변혁의 기치를 달릴 때, 같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친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네가 성장했고 더 나아졌다고 확신하지만, 내가 볼 때 너는 겉멋만 늘었고, 속은 더 약해졌다.”고. 그 소리를 들었던 당시 저는 울컥 치밀어 올랐고, 납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소중한 날의 꿈>을 보니, 약간은 제 ‘소중한 날의 꿈’이 기억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그것은 어른이 되어버린 제가 볼 때 명백한 치기이겠지요. 하지만 그 치기가 세운 성이 폐허가 된 지금, 저는 정녕 더 강하게 성장한 것일까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고,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급급해하는 지금의 저는, 어쩌면 폐허가 된 성에서 오히려 뭔가를 찾아야 할 시기에 와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간절했던 내 안의 성을-

‘소중한 날의 꿈’을 세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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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일본영화) - 할인행사
쿠보츠카 요스케 출연 / 스타맥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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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go)>
- 이 영화가 ‘연애영화’인 이유.

 


  영화 <고>는 재일한국인 스기하라(본명 이정호)의 연애이야기이다. 연애란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을 말하는데 이는 서로를 알 때, 그리고 신뢰할 때 가능한 일이다. ‘수퍼 그레이트 치킨 레이스’를 달성하여 ‘또라이’로 전설이 된 그가 “차별이 무서워졌다.”고 고백하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 뻗은 주먹으로 만든 원에 대한 철학이 어떻게 변하는가? 사회가 강요할 때 개인은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기하라는 초급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열혈 마르크스주의자로 조총련 활동을 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조총련계 초,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 복싱 7위에 올랐던 복서였고 재일한국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의 태도를 아들에게 가르쳤다. 그것은 뻗은 주먹으로 만든 원에 대한 철학이었다. 원 밖은 적들이 우글대는 전쟁터이고 원 안으로 들어오려는 수많은 적의를 물리쳐 내는 것으로서 삶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기하라의 아버지는 느닷없이 하와이를 가자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느닷없는 결정이 아니다. 여행을 위해 한국국적을 취득하려고 했을 때 자신에 대해 아무런 검열을 하지 않는 행정직원의 태도에 분개한다. 하지만 그 분개는 결코 행정직원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흘러간 세월 위에 놓여진 자신의 신념에 대한 것이며, 비바람으로 닳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비를 맞으며 스페인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는 이념의 굴레를 던져버리는 제의를 벌이는 것이고, 이북에서 죽은 동생에게 게를 보내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흘리는 눈물은 자신의 세대를 삼킨 이념에 대한 인간적 회포다. 하지만 스기하라는 이것들이 모두 지긋지긋하다.

 

 아버지가 하와이를 가기 위해 한국국적을 취득할 때, 이념이 지긋지긋한 스기하라는 일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딱지는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스기하라가 이념 혹은 자신에 대한 규정을 지긋지긋해 하거나 말거나 원 밖의 세계는 그에게 적의의 주먹질을 뻗는다. 반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돌려차기를 하거나 특기할 만한 복싱실력으로 적의를 원 밖으로 내치는 것 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스기하라의 아버지가 ‘더 깨끗한 바다에 갈 걸’ 하며 운운했지만 이건 일본사회 안에서 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분노하지만, 우리 역시 이주자들을 똑같이 타자화하지 않았던가? 스기하라가 ‘재일’이라는 명칭의 폭력성을 고발할 때 우리는 ‘재한’의 폭력성에 식은땀을 흘려야 한다. ‘더 깨끗한 바다’는 있을지 몰라도 그냥 ‘깨끗한 바다’는 없다. 바다는 우리가 깨끗하게 만들어 가야한다. 나의 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조 할아버지와 너의 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증조 할머니는 결국 만나게 되며, 우리 앞바다와 너희 앞바다는 결국 같은 바다다. 스기하라의 친구 정일이는 “우리에게는 원래 국가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사실 국가라는 것 자체가 원래는 없던 것(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스기하라가 그렇기는 해도, 사회는 그러거나 말거나하며 팽개친다. 조선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변화의 비전을 갖고 있던 정일이가 조용히 그리고 무감각하게 죽게 되는 것 같이. 하지만 그럼에도 스기하라는 복수를 하지 않는다. 정일이가 원했던 것이 폭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수의 요청을 거부하고 다른 길로 나아간다. 깜박 잊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는 ‘연애영화’다.

 

 스기하라는 일본인 여자애 사쿠라이와 사랑에 빠진다. 조금씩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던 그들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그녀와 첫날밤을 보내며 몸을 섞는 그 때 스기하라는 자신이 재일한국인임을 고백한다. 그 말을 들은 사쿠라이는 충격을 받고 몸을 거부하게 된다. 그녀는 “중국인과 한국인은 피가 더럽다.”고 항상 아빠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는 이해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다며 ‘미안’을 얘기한다. 전설의 ‘또라이’ 스기하라가 “차별이 무서워졌다”고 고백하는 순간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며, 또 모든 것을 앗아간다.

 

 자신의 아들에게 조금의 주저도 없이 주먹을 날리는 사람이 스기하라의 아버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원이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스기하라의 엄마, 즉 자신의 부인에게서이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다. 사쿠라이는 스기하라에게 다시 연락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추억이 있는 학교 교정으로 간다. 스기하라는 자신이 ‘재일’로 규정되는 폭력성에 대해 분개를 하며 원을 그린다. 자신은 “나는 나”라고 해도, 이 사회에서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가 된다. 그런 그에게 사쿠라이는 다가가고 손을 내민다. 스기하라가 뻗은 주먹의 원은 사랑에 의해 붕괴된다. 그는 주먹을 풀어 그녀를 끌어안는다.

 

 한 개인이 자신을 스스로 인식한다 해도, 사회는 그러거나 말거나를 내어놓는다. 정일이가 “국가”를 거부하고, 스기하라가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들먹이며 “증증증…”을 덧붙여도 사회로 부터의 규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규정의 균열은 사랑에 의해 열린다. 사랑은 사회가 그를 그러거나 말거나 하며 팽개칠 때, 그 조차도 끌어안는 무엇이다. 사회의 진보는 사랑에 달렸다.

 

 영화 <고>는 재일한국인을 둘러싼 이념과 사회와 학교와 가족과 편견과 또라이와 폭력과 복싱과 이해관계 따위가 뒤범벅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연애영화다. 사랑이 경계와 세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스기하라가 자신의 이름이 너무 이국적이어서 밝힐 수 없었던 그 두려움과 사쿠라이가 촌스러워서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이름 사이에는 현격한 무게의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별거 아니었음이 되는 건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이름’이 아닌 ‘향기’의 것이다. 이름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는다. ‘향기’는 사람에게서 난다. 기억나는가? 이 영화의 시작이 어디서 부터였는지.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中 -
(영화 <고>의 시작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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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et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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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시
- 나는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쨌거나 시를 쓰곤 했다. 내 놓을 만한 것은 못되었지만 어찌됐든 썼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시를 쓰게 되었던가. 돌아보면,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울게 했던 장면, 그리고 그 사람들. 나를 화나게 했던 그 사건. 그리고 무력함의 환멸.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면서, ‘시’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담패설과 뒹구는 시, 기술을 전수해 주는 교실 속의 시, 치장된 옷가지 위에 앉아있는 시, “죽어도 싸다”라는 소리를 듣는 시.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나의 이런 태도가 시를 특권화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이 맞다. 시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딴 세계의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우리들의 삶 속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하지만, 그 삶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영화 속 미자 할머니는 경기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생활보조금과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하며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인 그녀는, 그럼에도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를 즐겨 쓰고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이다. 그런 그녀는 평생에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시 쓰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웠던 손자가 자살한 여학생의 강간범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을 돈을 통해 합의로 무마시키려는 손자 친구들의 아버지들을 만나고, 게다가 자신은 돈도 없고, 의사는 자신보고 치매에 걸렸다고 하고, 피해자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아름다움을 떠들고. 

 쫓아오는 삶의 바람은 꽃과 살구와 레이스를 흔들다. 그녀를 흔든다.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미자 할머니는 더 이상 태평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시 창작 교실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죽은 소녀를 기어이 자신의 삶에 끌어온다. 함께 배드민턴 치던 손자가 경찰관에게 잡혀가도록 긁히는 마음을 견딘다. 그녀는 시란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부조리와 부도덕의 기만을 찢어 삶을 온전히 끌어안았을 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시 쓰기를 관둔지 꽤 오래 됐다. 사실, 관뒀다기 보단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해야 한다. 나는 그 동안 문학 전공자가 되었고, 문학이론을 공부하고, 창작론과 창작기법들을 배워왔다. 예전에 썼단 시들을 보며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그 시절을 부인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이에,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 버렸다. 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기검열의 강화”를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부조리와 부도덕의 기만’을 찢을 용기를 잃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시는 돈이 안 되잖아?”라고 말하는 나는,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어디에 버리고 온 것일까. 

 자신이 작가이기도 했던 이창동은 <시>를 통해 ‘범람하는 화려한 색깔과 소리, 향기’ 속에 사는 우리에게 ‘시가 죽은 시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화려함 속에 안도하고 있던 너와 내가  기만한 ‘죽음’을 보게 한다. 그새 벌써, 불편한 마음을 거절하고 다시 관성을 타고, 이 시대의 속도감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든다. 

 나는 그 때의 그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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