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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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피를 머금은 혁명이 아닌, 재미와 행복을 머금는 혁명을 꿈꾼다.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혁명’의 이미지는 피를 머금고 있는 폭력 위에 서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우석훈은 ‘혁명’을 로망으로서 가지고 온다. 그리고 혁명의 호출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세대, 즉 88만원세대를 위한 것이었다. 

 왜 나는 ‘혁명’의 이미지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있었을까. 혁명이란 항상 억압받고 고통 받던 자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만약 내가 왕자이거나 대자본의 소유자라면 혁명에 대한 혐오가 유효하겠지만, 나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평민이 아니던가. 어쩌면 나도 모르게 각인된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이거나 혹은 겸손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윤리관이 혁명을 밀어내게끔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혁명’은 폭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적 요구는 당연히 권력가와 기득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밟히게 된다. 피의 향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혁명세력군 안에서도 혁명이라는 대의 앞에 개인의 주체성이 탄압받고 억압받는다. 혁명은 기득세력의 총질 앞에 피를 흘리게 되고, 혁명세력 내의 대의적 폭력 안에서 썩게 된다. 역사 속의 혁명가들은 순교자가 되거나 독재자가 되었다. 

 그런데 우석훈이 가져오는 ‘혁명’은 사뭇 다르다. 그가 말하는 ‘혁명’은 마치 놀이를 통한 상상력의 실현처럼 느껴진다. 그가 꼽는 최고의 혁명가가 다름 아닌 코코샤넬이다. 샤넬은 여성 통제 수단으로서의 의상을 여성 해방의 의상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렇기에 우석훈은 샤넬을 “여성을 해방시킨 전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혁명, 즉 “남자들의 정치적 혁명은 역사 속에서 아픔만을 남겨 준 채 사라졌지만, 샤넬이 이뤄 낸 혁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용히”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선은 쫄지 말아야 한다(“쫄지마 안죽어!”). 쫄지 않아야만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안 들린다고? 그럼 지금 네가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뭔데?). 만약 쫀다면 “마음의 소리 따위 개나 줘버려”가 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는 “너 그런 식으로 하다간 경쟁에 뒤쳐서 루저가 될 거야.”라고 위협하면서 무한경쟁의 게임에 끊임없이 참여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작가 박민규는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팬클럽』에서 자발적으로 경쟁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깐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태도의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떤 꼴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들은 믿기 힘들게도 “다들 잘 산다”가 되었다. 물론 그들은 예전에 비해 적은 소득을 얻게 되었기에, 형편없이 작은 집에서 살게 되고 그닥인 자동차를 타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보다 풍요로운 시간 속에서 많은 ‘사랑’을 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박민규는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무한비난과 조롱 속에서도 무한경쟁의 게임을 종료하고 자발적으로 나올 수 있는 ‘말도 안 되게 용감한 사람, 즉 쫄지 않는 사람’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나는 이 시대를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은 ‘재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깐 뭘 해도 답이 없어 보이는 이 시대에 그래도 지속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 요소가 ‘재미’라는 것이다. 물론 ‘재미’ 운운하다가 인생 망칠 수도 있다. ‘음악’에의 재미를 추구하려고 학교를 때려 치고 그 길에 매진한다고 해도 모두 서태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의 성취가 이 시대에 돈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도 있고, 하고 싶어서 추구했지만 도통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깐, 나처럼 ‘재미’운운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 따위 개나 줘버려” 같은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재미를 동력으로 삼은 지속가능성의 힘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 시켜준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 하며 살아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만, 그건 만고 내 생각이고 사실 내 인생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이런 나에게 “너는 돈이 너를 쫓아다니지 않으면 내가 너를 부양하게 될 것 같다.”라고 핀잔을 준다. 

 내가 보편적 사회복지, 최저연봉제의 실효성 획득, 북유럽식 복지국가의 구현 등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실 이러한 나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 길이 실은 자본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일 경우, 그 사람은 꿈 때문에 말라 비틀어 질 수도 있다. 물론 진정한 꿈이라면 가난을 벗 삼아 꿈의 행복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인간이란 원래 육체적 나약함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간사하게도 꿈을 자신이 배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은 달성함으로서 가치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당장에 나를 행복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그런 재미와 닿아있는 것이어야 한다. 꿈은 자칫 잘못하면 마약과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기에, 끊임없이 ‘재미’와 ‘행복’에 견주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이 삼천포의 구멍가게로 빠졌는데, 남은 잔 비우고 다시 돌아오자. 어쨌거나 나는 “이렇게 조용”한 혁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샤넬의 혁명성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것에 ‘즐(KIN)’을 때리고, 쫄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해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자기만족적 쾌락이 아닌 자신의 철학을 패션으로 구현해 냈기에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지금의 현실로 환원해본다면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철학을 요구하는 이 사회에 ‘즐’을 때리고, “넌 망하게 될 거야. 이제 막 사는구나. 경쟁하지 않으면 발전 따위 할 수 없어. 스펙 안 쌓고 뭐하니? 결혼 안 할 거냐? 요즘 연봉 3000이하면 선도 안 들어온단다.” 따위에 쫄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재미있게 하면서 지속가능한)을 천착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 혼자 좋아하면서 꺄르르 대는 덕후스러운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활동으로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사회적 파급력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이 시대의 ‘혁명가’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혁명가’는 샤넬급을 말하는 것이고, 그냥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실천의 정도와 파급력과 관계없이 모두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박민규가 말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야구”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우석훈이 말하는 “이렇게 조용히”의 혁명가들, 그리고 매번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다중”의 그들이며,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갱신해 갈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그 힘의 동력이 항상 ‘재미’와 ‘행복’을 머금고 갔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는 것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야”라는 소리를 듣는 내 생각이다. 아,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확신한다(음, 음! 거기, 웃지 마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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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11-02-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두괴즐 2011-09-01 20:43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