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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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오쿠다 히데오,『공중그네』

-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한 거울이 되어주기


1


얼마 전 정치 글을 한편 쓴바 있습니다. 제목은 “'경기동부연합=종북좌파=통합진보당=나라를 북한에 팔아넘길 놈들'이 사실일까?”였습니다. 이 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①통합진보당이 진짜 북한을 숭배하는 종북주의자들의 소굴이라면 보수진형은 무기력한 빨간딱지 붙이기는 집어치고, 간첩신고를 하세요. ②자신을 종북세력으로 모는 보수진형과 그러한 프레임에 공포를 느끼는 국민들의 시선이 억울하면, 진보진형은 그 사안을 충분히 드러내 놓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에서 타파해 가세요.


그런데 이 글을 올린 몇 몇 커뮤니티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저를 진보의 X맨이라고 규정하면서 들통 났으니 새누리당이나 빨아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명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 주위 사람들 때문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민주당의 한계를 이해하게 됐음에도 "진보는 종북이라서 찍어주기 좀 그렇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민주당이 대안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마지막 희망이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민주당에 걸어본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다보니 계속 양당체제처럼 정당이 운영되고 진보는 선택지에서 그냥 배제됩니다. '종북'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딱지 때문에요. 그래서 저는 "진보가 진짜 종북인가?"라고 따져 묻고 이것을 돌파했으면 합니다.” “'경기동부연합=종북좌파=통합진보당=나라를 북한에 팔아넘길 놈들'이라는 프레임이 아주 자연스럽게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서(공포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 이것이 허상임을 깨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북'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얼굴을 붉힌다고 해결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결국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진보가 자신에 대한 종북딱지를 치워낼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해명이후 저의 입장이 그 자체로 인정받는 순간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비난조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커뮤니티에서는 아예 강등 제제를 받았습니다. 진보적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X맨 소리를 듣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던 보수 성향의 커뮤니티에서는 강등처리 되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감기몸살이 나 종일 누워있었습니다.



2


오쿠다 히데오의『공중그네』에는 신경증을 앓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회적 출세를 위해 자신의 본 성격을 끊임없이 죽이다가 병이 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무의식적 질투 때문에 병이 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치의였던 이라부는 스스로 ‘대책없는 아이같음’의 모습을 보이며 고통에 빠진 환자들을 돕습니다.


신경증을 앓은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속이 좁아서? 세속적 욕망과 타고난 욕망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통제에 대한 기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이 나의 통제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크게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의 통제 안에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저의 정치글에 대한 비난을 수구꼴통 세력에게서 받았다면 저는 그러려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은 것은 그들이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이라는 저의 착각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제 통제 밖에 있는 것이었음에도 저는 그 반응을 통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인물들도 이 통제 가능성에 대한 오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충분히 그 사람의 문제를 알고 있고, 또 나의 잘못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간극은 자신의 통제 밖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 이성의 통제 밖으로 신체가 뛰어 버립니다.


우리는 ‘쿨’함을 가장한 냉소적 어른이 되었거나 혹은 끊임없이 경쟁과 승리의 쟁취를 통해서만 자기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면 어때. 틀리면 어때. 좀 못하면 어때. 함께 재밌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기각되기 시작된 순간은 언제 부터였을까요. 흔히 점점 많은 것에서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 만큼 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 대접은 여전히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통제 할 수 없는 대상으로 부터의 대접 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더욱 세속적 권력에 목을 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접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말이지요.


칸트는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항상 목적으로 다루고 결코 수단으로 다루지 말라.”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사실상 타인에 대한 통제 가능성의 이면에는 수단화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으로 대한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다시금 인간을 상호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파편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를 독립된 목적체로서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316쪽.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통제 가능성에 대한 기만을 자각하는 것, 순수한 자기 실천이 목적이 될 수 있는 것. 저는 이 문제들에 대해 여전히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첨단의 문명은 다시 신경증 환자들을 낳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는 반쯤은 정상인으로, 반쯤은 정신병자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여전히 인정받고 싶어 하고, 누군가로부터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경우에는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거나 혹은 내세에 천척하기도 합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나의 인정은 나 아닌 누군가가 필요하고, 그녀의 인정은 나 혹은 다른 그가 필요한 일이지요.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타인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는 인간, 질문을 던지는 ‘우리’. 저는 그것에 희망을 걸어봅니다. 신경증 환자들이 이라부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도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투명한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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