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히 제목의 할머니와, 여러 ‘논쟁적인’ 페미니즘 저서를 출판한 현실문화이기에 읽었다. 내게 할머니들이 갖는 이미지는 특별한데 이를 테면, 존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그의 또 다른 책 『철의 시대』의 할머니, 마하스웨타 데비와 그녀의 소설 「곡쟁이」, 박완서의 소설들(특히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과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그 남자네 집』의 여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스피박, 『지구화 시대의 미학교육』의 서론을 쓴 스피박. 이들 할머니들은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할머니들이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의 예술감독을 맡았고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 전체를 아우르는 서문격인 「귀신, 간첩, 할머니, 예술가의 협업」에서 박찬경은 할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할머니가 ‘여성과 시간’을 생각하는 계기로 쓰일 수 있는 말이라면,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뎌온 증인으로서의 할머니는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한 기억의 보고다. 그녀의 ‘배제된’ 육체를 던져 공권력에 저항할 때, 할머니는 경찰을 난처하고 당혹스럽게 하는 특이한 정치미학의 주체가 된다. 전설의 ‘마고할미’와 같은 거인 할머니나, ‘산해경’과 ‘요지연도’에 등장하는 서왕모(西王母)는 초능력 할머니로, 마음만 먹는다면 섬과 육지를 거뜬히 한걸음에 건너간다. 이것은 노재운의 지팡이가 출처로 삼는 세계다. 20-21
한국에서 ‘옛 할머니’는 자손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비는 이미지를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다. 근대에 들어 기도의 수동성과 초월성에 대한 유물론자의 대대적인 비판을 거쳐왔지만, 한국의 심산유곡에는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대부분은 여성들이며, 아줌마 할머니들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권력에 가장 무력한 존재이겠지만, ‘옛 할머니’가 표상하는 인내와 연민은 바로 그 권력을 윤리적으로 능가하는 능동적인 가치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에 최승훈+박선민의 검은 비닐봉지가 그 약한 떨림 속에서 말하는 바는 그런 무력함의 역설적인 힘으로 보인다. 오티 위다사리(Otty Widasari)의 비디오 속의 무슬림 여성이 평화로운 공원을 혼자 가로질러 도달하는 폭포도 그 힘의 진원지다. 21
여기서 할머니는 부정의 계기로서/써 호명된다. “권력에 가장 무력한 존재”, “특이한 정치미학의 주체”, 그리고 무엇보다 “‘옛 할머니’가 표상하는 인내와 연민”. 왜 할머니는, 여성은 인내와 연민일까? 그것이 남성의,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하도록 하는, “그 권력을 윤리적으로 능가하는 능동적인 가치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권력에서 ‘가장’ 소외되었다고 하는 자들을 도리어 그 권력을 허물 수 있는 하나의 작은 계기, 내파의 가능성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할 때 그들은 어떤 형태로, 어떤 구성으로 어느 위치에 서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나이든-생식기능을 상실한-경제력마저 없는-여성을 소외시킨 그 권력이나, 그들을 그저 ‘윤리적 가능성’으로 호명하는 우리나 사실은 좌우뿐이 바뀐 거울상은 아닐까.
조한혜정은 「동트기 전의 어둠, 외롭지 않은 안티고네들」에서 다음을 서술했다.
이분들이 그 암울한 시대를 어렵다고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새벽’의 시간으로 먼저 이동함으로써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분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식민지 상황과 어둠의 질서를 낙후시키며 자신들끼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갔던 것이다. “‘할머니’는 권력에서 가장 먼 존재이자, ‘귀신과 간첩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온 증인이다”라는 이 전시회의 취지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을 너무 집중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권력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고 누가 누구에게 주고 또 받으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내 할머니들은 일제에도, 가부장제에도 권력을 일임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삶의 주인이었고 서로를 돌보면서 ‘권력’을 만들어갔다. 147
이 두 할머니의 이야기는 근현대 ‘동아시아의 여성의 시간’을 전형적으로 재현하고 있지 않다. 고독한 유령, 한 맺힌 말을 품고 있는 유령의 삶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일 지배세력에 빌붙었던 시간을 재현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어진 역사 안에서 좀 다른 시간대를 살았고 후손에게 기성 질서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그분들은 동트기 전 어둠을 어둡지 않게 살아낸 ‘돌연변이’였던 것 같다. 할머니들이 살았던 백 년 전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지금,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새벽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형성이 아니라 돌연변이에 대한 상상과 변신의 감각이 아닐까? 147-148
조한혜정의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목소리와 행위력을 지닌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손쉬운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에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것을 지녔다, 기보다는 서술자가 그들을 그와 같은 방식(혹은 그와 같지 않은 방식)으로 재현하고자 한 것이다. 할머니들은 현 권력-체제를 뒤엎을 수 있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특이성 같은 것을 담지한 자들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을 이어볼 수 있는 선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 그리고 유념해야 할 마지막 문장.
내가 다시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나는 틸리 올슨의 『수수께끼를 내 주세요』와 크리스틴 브룩-로즈의 『후기』와 『삶, 그 끝』에 관한 읽기들을 넣을 것이다. 이 소설들은 텍스트적 실천과 아무 관계없이 나이 먹기, 죽어가기, 이야기하기와 함께 일반적인 윤리적-정치적인 것을 대담하게 무대화한다. 이 소설들이 여성 노인들의 텍스트라는 것은, 폐경기 여성들이 재생산적 규범성에 차가운 시선을 돌릴 수 있다는 보보-요인(Bobo-factor) 때문일까? 포스트-규범적인 퀴어다움(queeredness) 때문일까? 쿠체(J. M. Coetzee)가 자신의 『철의 시대』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텍스트들에 있는 작가의 흔적으로서 나이 든 여성 주인공들을 선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일까? 아마도 바로 이 영역에서 문학적인 것은 여전히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지구화 시대의 미학교육』, 서론 22-23)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할머니라는 단어, 혹은 이미지만으로 이야기가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핵심은 할머니 안에(혹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권력을,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원리에 비껴 설 수 있는 능력-그러나 이 능력은 그들이 손쉽게 선취했다기보다는 남성사회가 그들을 여성으로, 생식능력을 상실한 여성으로 자애로운 제스처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울 때 함깨 치워버린 능력이기도 하다. 자신을 구성시킨, 자신들에게 강요된, 하지만 또한 스스로 선택한 규범과 권력규칙들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능력, “차가운 시선”. 할머니들에게 어떤 윤리적인 에너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것은 할머니들에게 내재한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어쩔 수 없이 취득하게 된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의 특이성singularity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납작해지는-스피박의 제유와 같은-, 깊이 없는 자기 확장의 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유의해야 할 스피박의 마지막 문장,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뒤로 물러나는 것이지만, 오히려 힘 빼기의, 희망 혹은 절망보다 희망-없음이 지닐 수 있는 담백함과 허세, 사심, 사명 없음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