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자의 마음, 그럼에도 움직이는 헤자, 또 할머니들. 꿈의 마지막에서 자기는 이 기억으로 평생을 살 거라는 혜자의 말, 그리고 준하의 말 없음, 그저 표정들. 다음날 혜자는 가볍게 일어나 행위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 유쾌한 진창 앞에서.


노인들의 몸, 노인들의 무력함, 그거 보고 그거 알게 된다. 알게 되기보다는 내가 혜자가 된다. 젊은 혜자가 늙은 혜자가 되듯 미래의 시간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하루가 다르다는 말.


오히려 늙어버렸기에 볼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늙어-버렸기에. 주어진 진창에서 움직이려 허우적댄다. 체조하는 혜자, 주먹질하는 혜자. 혜자, 또 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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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마지막 기말 고사를 본다. <프랑스 비평> 수업인데, 타과 전공생으로서 오직 담당 교수님만을 보고 들은 수업이다.(김예령 선생님 사랑해요.) 아무튼 두 텍스트를 읽었는데 지금은 낭시의 L’intrus를 읽고 있다.

나는 예전에 낭시를 참 좋아했고 버틀러를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모르겠고 지금은 또 감수성이 완전히 납작해졌다고 생각하는데(그 무엇에 대해서든), 그건 다만 예전엔 누군가를 좋아했어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한다.(그렇다면 사랑의 감정,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데 애초에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내가 완전히 타자에게로 열리고, 타자를 보면서 내가 허물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그의 몸에 내 손끝을 접촉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도리어 ‘나’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전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한다. 우리가 타자 앞에 서게 될 때, 어떤 마음의 흔들림의 지속과 함께, 그리고 그를 시각적이든 촉각적이든 청각적이든 그에게/그를 향해 접촉toucher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일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그는 나와 독립된 하나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나 또한 외부와(그게 무엇이든) 결코 동화되지도 통합되지 않는 어떤 물질, 혹은 영혼(낭시의 「영혼에 관하여」에서 낭시는 몸은 곳 물질, 혹은 mass이며 나아가 영혼이라 한다..)이라는 것. 그러니까 타자의 타자성과 나 자신의 타자성, 결코 온전히 조화, 화합될 수 없는 두 존재, 그런 것들.

“그렇기에 우리는 몸에 대해 말하면서 마치 어떤 타자를 대하듯, 어떤 무한히 타자인 타자, 무한히 바깥인 타자를 대하듯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_「영혼에 관하여」

어떤 열림과, 그것은 언제나 닫힌 것을 상정하는 것이고, 열린다는 것은 언제나 완전히 열리지 않는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열림은 결코 완전한 허묾, 휘발, 표백 그런 것과는 오히려 반대에 서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짚어내야 할 지점은 무엇일까? 나라는 타자? 내 안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타자성? 결코 흡수하거나 전유할 수 없는 타자?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하는 것? 어디일까? 일단 생각은 여기서 멈춘다…(하지만 여기서 스피박이 서발턴을 향하는 비서발턴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존재-형식, 즉 자기 제유synecdoche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스피박은 오히려 차이를 제쳐둘 것을 요청한다. 차이를 제쳐둔다는 것은 곧 타자와 자신 사이의 그 무수한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박의 자기제유는 낭시의 접촉toucher 그 다음의 이야기일까 그 전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동시적인 이야기일까? 물론 나는 이 영역에 명쾌한 답, 명쾌한 공식 따위가 없음을 알고, 만일 그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무례한 답변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의 욕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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