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나의 삶에서 내가 그대 삶 속의 그대에게 씁니다
이윤 리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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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 부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세 번째 에세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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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을까. 운명론자는 운명이 미리 정해놓은 길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운명론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직관을 억누르고 그 직관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린다. 우리의 자아 가운데 혼자여야 행복하고 자유로운 부분은 사람들 사이에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 자아는 자신이 존재할 권리를 헛되이 애써 설명한다. 드라마를 피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렇게 피하다가 오히려 멜로드라마에 휩쓸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약해지고 수치심을 느끼고 두려워한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경고성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자아를 제거한 삶은 또 다른 종류의 경고성 이야기가 된다. 잊으려고 사는 삶은 기억하려고 사는 삶이기도 하다. - P51

내가 아는 작가들 가운데 자신이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며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밝힌 사람은 그레이엄 그린뿐이다. 나도! 나는 여백에 적었다. 고백한 상대가 죽은 사람이긴 했지만 내가 유일하게 나의 야심을 밝힌 순간이다. 내가 과연 잘 해내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개인의 삶이나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하고자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를 직면하는 일, 허상이 어떻게 허상을 낳고, 기억이 어떻게 기억을 미화하는지 이해하는 일이 글을 쓰는 이유로서 더 중요하다. - P86

소개글에서 맥피어슨은 팬케이크의 말년에 자신이 팬케이크과 거리를 두었다고 인정한다. 팬케이크가 보낸 소포를 몇 달이나 열어보지 않다가 그의 부고를 듣고서야 열었다고 했다. 예상대로 선물이었다. 편지도 한 장 들어 있었다. 팬케이크는 답장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썼지만, 물론 그런 말은 늘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팬케이크과 맥피어슨의 우정은 서로 이해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에 결별하는 양상을 띠고, 이것이 나의 마음을 몹시 어지럽힌다. 한 사람의 멜로드라마가 다른 사람의 멜로드라마를 피했다. 이런 침묵은 끝에 가서 승리하지 못한다. - P89

실제를 초월하려는 메타포의 욕망은 그 어떤 개인사도 빛을 잃게 만들고, 메타포를 창조한 사람들은 무언가를 밝혀내겠다는 야심에 눈이 먼다. 나는 메타포를 불신하는 마음에서 조지 엘리엇과 동지 의식을 느낀다. "진지한 사람이나 가벼운 사람이나 모두 메타포에 생각이 얽혀버리고 그 힘에 떠밀려 치명적인 일을 저지른다." 수년 전에 남편이 바로 이 위험을 걱정했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러나 모국어를 버리기로 한 나의 결정은 개인적이었다. 너무도 개인적이어서 나는 그 어떤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해석이 정치적이건, 역사적이건, 민족지학적이건. - P168

글을 쓰는 일이 헛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헛되다고. 삶도 마찬가지로 헛되다고. 자신의 사적인 언어로 타인과 소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외롭다. 그래서 공공 언어나 낭만적으로 부풀린 교감으로 그 공허를 채운다. 하지만 우리는 섣불리 의미를 짐작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타인과 서로 알아본 순간은 언어의 부족함을 외려 강조한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을 지속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그 순간을 좀먹는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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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바다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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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쓰려면 결국 내 곁의 존재들에 대해(혹은 오직 그들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 타인을 앞세워 혹은 타인을 통해 자기 이야기만 하는 글들 가운데 조용히 빛이 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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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가족만이 엄청난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모든 게 엄청나다. 본래의 것, 즉 물질의 핵심은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없으며, 중심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모든 사랑의 시작》에 대한 비판에서 말하는 이야기하기란, 추측건대 무언가를 지어내는 일을 뜻하리라. 하지만 무언가를 지어낸다는 건 나에게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하나뿐인 불가해한 현실로 들어가고자 하고, 내가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음을 쓰고자 하고, 현실이 대체로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 P124

오늘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이 문장은 나의 이야기들과 관련이 있다고. 나의 글쓰기와 관련이 있다고. 나는 이런저런 일이 끝났을 때, 그것이 끝나리라는 걸 내가 알 때, 그것에 관해 글을 쓰기가 더 수월하다. 마지막이란 지금 이대로 좋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어찌어찌 하나의 끝에 도달했다는 뜻일 뿐이다. 이 끝에서 일이 새로 일어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름 별장, 그 후》에서 나는 행복은 늘 그 이전의 순간이라고 썼다. 오늘날이라면 나는 이렇게 쓸 것이다. 행복이란 늘 그 이후의 순간이라고. 당신이 소위 행복을 이겨 내고, 행복을 무사히 모면하고,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깨닫고 행복을 다시 잃어버리고, 놓아주고 던져 버린 순간. 이것이 마지막이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이것이 내가 글을 쓰며 도달한 지점이다. 그렇다면 분명코, 그 이전이든 그 이후든 결국 그냥 똑같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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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는 연작시 「패터슨」을 쓰며 고심하던 중 동료였던 젊은 앨런 긴즈버그에게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었던 건 "정말 저 밖으로 나가 흙바닥에서 일하며 진정한 인페르노가 될 패터슨의 무언가를 파내는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옛 공장의 창자에서 나는 그것을 찾아냈는지 생각해본다. 그러고는 어두운 안쪽 공간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다. 음침하고 더러운 물이 얕게 고여 있다. 빈 진통제 플라스틱 약병이 뚜껑이 열린 채 웅덩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전 편지에서 언급했듯 긴즈버그 역시 이곳, "똑같은 녹투성이 카운티"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긴즈버그는 윌리엄스에게 보낸 답장에 "패터슨은 연민이 필요한 덩치 큰 슬픈 아빠일 뿐"이라고 썼다. "……그러니까," 그는 패터슨을 향해 더욱더 켜져가는 마음을 담아 덧붙인다. "지옥으로 내려간 밀턴만 떠올리지 마. 패터슨은 마음속에 피어난 꽃이기도 하니까."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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