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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도망치다 - 폭력에 내몰린 여성들과 나눈 오랜 대화와 기록
우에마 요코 지음, 양지연 옮김 / 마티 / 2018년 7월
평점 :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나는 마티 출판사를 좋아하고 사이드 선집과 『학교에 페미니즘을』을 출간했던 출판사이기에 관련된 또 다른 책이 나왔다는 것에 기뻤지만 책의 제목이나 부제, 출판사 소개글을 읽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일까 너무 힘들고 괴롭고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까
하며 편히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은 7월에 나왔고 나는 10월에 읽었다. 나는 무더운 여름을 보냈고 책을 읽었고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고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소설들에 생각했으며,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책을 계속 읽고 무

언가에 추동됨으로써 읽으면서 더욱더 나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이 결핍감은 무엇일까. 더 나아갈 수 있는데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 마하스웨타 데비의 「곡쟁이」, 박완서의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그 가을의 사흘 동안」, 『그 남자네 집』 같은 소설들.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의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에서 이소희씨의 글들, 특히 그녀의 마지막 글 「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내 삶을 가능하게 할 때」. 어떤 형식으로 글이 쓰여졌든 이 글들 모두에는 성판매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기꺼이 성판매를 시작하지 않았고, 어떤 여성은 성판매로 인해 임신을 하기도 하고 낙태를 하기도 하고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녀들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이 정말 여성들의 임파워링에 도움 될까. 자신의 경험을 한정된 언어로 힘들고 폭력적이었던 순간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말 도움 될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사람들이 만나서 우정을 쌓고 즐거웠던 순간도 있을 텐데. 그런 경험들은 의미 없는 경험으로 삭제되거나 심신미약 상태에서 가스라이팅 당해 느낀 것일 뿐이라고 도려내면, 그러면 그걸로 충분한 건가. 끊임없이 자신의 어떤 순간들을 부정, 외면해야만 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정말 그 사람의 임파워링에 도움이 될까.
더 많은 경험들을 담아낼 수 있을 새로운 틀, 접근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고통만이 있지는 않았는걸. 나의 강함, 나의 노력, 이곳에서 느꼈던 애정, 우정들을 그저 착취로 피해로 한정된 언어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이소희, 126-127)
박완서의 소설들에도 이상한 연대의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마담과 성판매 여성, 임신중절수술로 유명한 여성 의사가 한 테이블에 앉아 가족적인 분위기를 풍겨낸다든지, 자신의 소개로 미군부대에 취직하게 된 한 여성의 낙태 장면을 뚫어지게 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장면들.
우리는 흔히 소수자들을, 피해자들을 정말 피해 받은 이들로서 보호해야 하고 지켜내야 하며 그들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그것들이 일종의 공모된 우리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고 또 그것이 피해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의 것인 양 그렇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피해자들을 ‘피해자’로서 보호하고 지켜내려 할 때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행위성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해자다움은 오직 가해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만의 잔인함일까. 어쩌면 우리도 피해자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상상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맨발로 도망치다』의 저자 우에마 요코는 정말로 들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온힘을 다해 들었다. 그녀는 필요할 때면 개입하고 질문을 하기도 하였지만 마치 자신을, 혹은 자신 같은 이들이 그녀들을 구제하고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 어떠한 사명감 없이 그녀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든 아니든 그녀들의 생각과 감정을 교정한다든가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그녀들의 피해와 가해자들의 폭력을 납득시키고 이해시켜 깨닫도록 하지 않는다. 담담히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감상적이거나 (윤리적으로) 건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삶이나 그와 결부된 사회현상들을 분석하려고지도 않고 정말, 정말 그냥 잘 들으려 했다. 하나하나씩 읽다보면 그녀들에게는 정말 언어가 없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고 스스로 말하려고 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폭력과 빈곤 속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제3자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난의 목소리가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조사를 진행하면서 처음에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그녀들과 함께 보내다 보니 나 또한 그녀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아마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의도에서 이 책에는 어떤 학술적인 개념으로 그녀들의 인생을 분석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본 풍경과 시간을 따라가면서 그녀들의 인생을 가능한 한 정돈되 ‘생활사’의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우에아 요코, 208-209)
아야와는 이 원고를 아야의 방에서 함께 읽었다. 자신을 탓하는 아야에게 남자들이 나빴던 거지 아야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거듭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그 말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아야에게 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헝겊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원고를 읽는 내 목소리를 묵묵히 듣던 아야에게 “아야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자 아야는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우에마 요코, 210)
그녀들에게 너네 잘못이 아니야, 사회 구조 권력 지식 그런 걸 얘기해주더라도 그녀들을 어떤 말인지 이해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적는 우에마 요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지식인들에게 던졌을 때, 그리고 오랜 뒤 “서발턴을 연구하지 말고 배우라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우에마 요코는 정확히 이것을 하고 있다. 『학교에 페미니즘을』의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주도로 열린 학급 회의를 지켜보며 나는 교실의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며 “교사는 자정능력을 갖춘 아이들의 조력자라는 점을 깨달았다(83)”고 할 때의 마음들, 태도들. 힘없는 자들, 밀려난 자들의 행위능력을 인식하고 그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들. 그녀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언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고 자신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며, 그녀들을 단지 보호받아야 하고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때에도 언제나 사실 움직이고 행동하고 행위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것. 이때 그것을 지켜보던 자들은 단지 자신들의 지배와의 공모나, 타인의 번역불가능성, 차이에서의 윤리를 의식하며 자신을 대상화하여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을 타자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구원자나 구제자가 아니다. 이는 그녀들의 문제는 별거 아니며 그녀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도, 사회제도와 법, 그것들의 폭력성을 의문시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과 함께 그녀들의 행위능력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들로부터 타자와 함께 행동하는 법을 배우며 무엇이 진정 그녀들을 임파워링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수 있다. 『맨발로 도망치다』의 소재들은 분명 너무 괴롭고 끔찍하고 마주하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우에마 요코와 그녀들의 대화들을 읽다보면 무언가 웃기고 즐겁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에마 요코의 태도에도 기인하고 이 대화가 4년 동안 오래 이어졌다는 데에도 기인할 것이다. 그녀들은 그 온갖 폭력과 피해상황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행위하고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 여기서 사실상 ‘불구하고’는 우리들의 오해이고 본래부터 그들은 그러고 있었다는 것. 이와 같은 인식, 혹은 이것의 읽기가 나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나아가게 할지 모른 채 나는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이 놀라고 많이 웃었다. 일련의, 무겁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떤 지점들을 명확히 짚어낼 수 있는 책들을 출판하는 마티 출판사 너무 멋지고 본문 디자인도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