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사랑‘에 대해 리포트를 써야 한다. 플라톤 『향연』의 8번째 화자가 되어 연설을 작성해야 한다. 수업을 통해 ‘사랑‘이 단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그것을 좀더 확장시켜 무언가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어리석음』에서 아비탈 로넬이 사랑에 대해 적은 이야기도 떠올랐다.
어리석음은 때때로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공허를 초래하고, 치명적 목적지를 향해 가는 지루하고 무딘 쾌락들을 촉진한다. 무기력과 죽음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어리석음의 형태들은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 돌이킬 수 없는 기력 상실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어리석음이라는 는 것이 삶을 촉발하는 순간이 있는가? 다시 말해, 어리석음에 내린 금지가 풀리는 것은 언제이며 마침내 우리가 어리석을 수 있는 것은 언제인가? 예컨대 우리가 사랑에 빠진 그때, 우리가 서로를 유치한 이름과 애칭으로 부르면서 애교어린 말투로 우리 자신만의 어법에 언어적 변형을 불러오는 그때, 사랑은 공개적으로 어리석음이 허용되는 몇 안 되는 자리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폴 발레리의 「에밀리 테스트 부인의 편지」를 보면 사랑은 이렇게 정의된다. ˝사랑은 함께 어리석은 짐승이 되는 특권에, 곧 무의미와 야수성의 완전한 허용 속에 자리한다.˝ 사랑은 어리석음의 공유, 황홀경의 언어라는 그 야수 같은 자유분방함으로의 하강이 ˝사용 허가된˝ 상태를 지칭한다. 완전한 굴복으로서의 사랑은 함께함being-with이 어리석에 넘쳐흐를 통로를 열어준다. 사회적 지성과 분별 있는 활동을 명문화하는 법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랑의 장면들이 진행되는 동안 중지된다. 이는 또한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우리는 진짜로 무너지고 터무니없이 멍청해야만 한다는 것, 또는 어리석음이란 오직 사랑만이 허가하고 해방시킬 힘을 지닌 인간 정서의 억압된 기반이라는 것을 뜻한다.(『어리석음』, 149-150쪽)
나는 로넬의 이 책으로 문학동네의 독자 모니터링 명단에 기입될 수 있었다. 그때 담당 편집자님은 자신이 여태껏 만든 책 중에 최고로 손꼽는다고 하였다... 그런 소중함 그런 경험들 어떤 생산과 자신의 투여 편집과 디자인 물성을 지닌 무엇 그리고 그것을 좋아해주는 사람들. 그런 책들 좋고 그런 책들 만든 사람들 그런 기쁨들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사랑에 대해 글을 써야하고... 아마 이상한 말을 할 테고... 그래도 로넬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