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은 「팬텀 이미지」에서 “나는 일이 겹치는 걸 좋아하고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서히 일의 중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어디로든 가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고 적었다.

 보리스 그로이스는 『코뮤니스트 후기』에서 “이런 실천의 행위에 있어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것은 어느 시점에선가 종결을 지을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점”이라고 적었다.

 야곱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건너편에서 무슨 일인가가 먼저 일어나야만, 그런 다음 우리가 그걸 볼 수 있습니다. 별빛이 우리 눈을 찌른 뒤에야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올라갈 겁니다. 내일이고 모레고 계속 노력할 것이고요. 아도르노, 이 사람은 도무지 손을 놓질 못합니다. 바로 그래서 미학자인 것이지요. 그러나 벤야민이나 칼 바르트는 그런 식의 나이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고 적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에서 “모순적인 가르침들은 늘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는 그것들을 듣는 법을 배우고 게임 속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정할 때, 또 우리가 결정하는 대로, 우리가 그 이중구속을 말하자면 하나의 구속으로 부수어버렸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는 곧 변화에 착수해야 한다는 점을, 혹은 과제이건 사건이건 일들이 바뀔 것이라는 점을 안다. 이 점을 알 때, 윤리적, 정치적, 법적, 지성적, 미학적 결정들을 수반하는 전형적인 정서는 후회와 가책, 적어도 불편함이라는 스펙트럼이다.”라고 적었다.

 김예령은 「너울너울 잠잠」에서 “어떤 출발은 온갖 종류의 원천적인 결격으로부터만, 무언가를 도저히 제 것으로 맡을 수 없다는 뼈아픈 자각으로부터만 가능해진다. 중요한 건 점점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라고 적었고 「없이」에서 ““어쩌면 표현이 불가능한 행위라는 확신에 그 두 손이 묶여 있지 않”아서, 그래서 시작하지 않을 도리조차 없을 때 시작되는 시작이 그들을 밀고 간다. 그들이, 자신들의 원인들을, 필시 중요로웠을 숱한 가능성들을, 관계들을, “유예중인 자유”를 지운다. 그것들이, 남는다. 오, 그란 리피우토. 없이, 기다린다.”고 적었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내가 좋아하는 글들을 모아놓으면 꼭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지만 원래 그런 건 불가능하므로 언제나 그렇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아지고 그런데 이 기분은 뭘까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분명 이런 글들에서 에너지를 얻어 뭔가 애틋해지고 따뜻해지는 기분에 휩싸였지만 요즘은 그런 건 없고 그냥 예전에 내가 이런 글들을 보며 좋아하고 이런 구절 앞에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못한 채 나의 즐거움을 조용히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귀여운 장면들이 떠오르고 그런 것이 좋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참 중심이 잡혀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는 또 다시 중심에서 멀어지고 탈각되고 그렇게 또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시간도 그리거나 펼쳐내지 못한 채 그렇게 가만히 있다.

 다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시작점은 정지돈이 말했듯 어쨌든 가만히 있을 순 없고 타우베스의 말처럼 무언가에 점진적으로 수렴하겠다는 의지와는 단절한 채 그로이스의 말처럼 종결을 지으면서 그래도 뭔가를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고민하며 스피박과 김예령을 불러냈다. 모든 환영과 환상을 털어내고 그 어떤 건축물도 없는 흙바닥 위에서 어쨌든 무언가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는 건 정말 쉽지 않지만 이들은 결국 무언가를 하고 있고 또 그것을 잘하고 있다. 환상을 털어내고 또 다른 환상들이 계속해서 끼어든다. 어쩌면 애초에 문제 같은 건 없었고 거울에 비친 민낯의 내가 가장 마지막의 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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