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이 모일 때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소설은 마카야라는 한 인물이 남아프리카공화국로부터 국경을 넘어 보츠와나로 도망치는 것에서 시작한다어떤 구체적인 갈등이 있었고 그가 무슨 연유에서 감옥에 있었으며 어떻게 하여 국경을 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처음부터 그렇다이 소설은 그 다음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마카야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따라 골레마음미디라는 마을로 가게 된다그곳에는 길버트라는 영국 출신 백인이 농업개혁을 위해 힘쓰고 있다둘은 힘을 합쳐 척박한 아프리카의 땅에 농작물을 심는 등그리고 무엇보다 마을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는 풍경을 그린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작가가 갈등과 고난을 갈등과 고난처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일이 잘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긴장이 문득문득 독자를 엄습하지만 사실 그와 같은 근심은 그저 섣부른 걱정이었음으로 드러난다마카야 또한 자신이 떠나온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있었던 사실이 암시되고 언급될 뿐 자세한 이야기는 서술되지 않는다우리의 시간이 그렇다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대개 걱정은 우리의 뜻 모를 기대를 기분 좋게 빗나간다서사는 갈등으로부터만 발생하지 않는다.


마카야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그렇게는 못 하겠어요내가 내 발로 막다른 골목에 들어왔는지 어쩐지도 모르겠고지금은 모든 것에 신물이 나 있을지 모르지만언젠가 정리되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든 할 거요.”

조시 애플비스미스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그래도 나는 당신을 위해 모험을 해보겠소.”(97)


깡마른 노인들이 옷을 벗고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바구니를 짜고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종교 없이도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에 죽어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저지르는 죄에 대한 책임감이 없게 만든 신들 없이도사람들은 살 수 있을 것이었다.(218)


마텐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서두르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박해를 받는 건 더이상 폴리나 세베소만이 아니었다골레마음미디 마을 전체였다그리하여 갑작스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 중심에 다 모여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그들은 각자 마음의 짐을 덜어내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결국 다들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286)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낯설었는데 결정적인 갈등이 없었다는 점갈등이 있어도 일이 수월하게 해결된다는 점슬픔이 엄습해도 그 감정에 도취되어 자기연민을 실행하는 인물이 없다는 점밭을 갈고씨앗을 뿌리고상품작물을 심고우물을 파고 관개수로를 설치하는 모습들이 자세히 서술되는 것을 읽어가며 독자들은 무언가가 격렬히 싸우고 사라지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무언가가 생겨나고 쌓여가는 튼튼한기분 좋은 중력감을 경험하게 된다이것을 단순히 유토피아이고 서정적이며 희망에 찬 소설이라 부르기보다는우리의 상상력을 더 확장시켜 근거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우리 자신을 빠뜨려 스스로 감성적 나르시시즘에 걸어 들어가는 포즈에 저항하며주어진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다부진 태도들을 떠올려보자애초에 우리는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섣부른 불안에 스스로를 연민하기에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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