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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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서평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주의하세요!

 

자신의 목숨보다 더욱 소중한 친구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잃게 되면 얼마나 우울할까?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쓰쿠루는 고등학교 시절 흔히 말하는 오총사처럼 그룹 멤버 5명과 함께 소중한 추억들을 쌓게 된다. 아카마쓰 게이(미스터 레드), 오우미 요시오(미스터 블루), 시라네 유즈키(미스 화이트), 구로노 에리(미스 블랙), 그리고 이름에 색채가 없는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 자신 혼자 이름에 색깔이 없어서 친구들 사이에 외로움을 느꼈던 쓰쿠루에게 어느 날 큰 시련이 다가온다. 자신과 친구들의 고향이었던 나고야를 떠나 도쿄에 대학을 가면서부터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친구들에게 연락이 모두 끊기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쓰쿠루에게 친구 아오가 연락이 와서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이유도 알 수 없이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친구들과 멀어진 쓰쿠루는 큰 절망과 함께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색채가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중립적인 마음으로 다시 인생을 살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자신이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고 관심이 있었던 철도 설계사로 일하게 된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16년 후, 도쿄에서 생활하며 만난 2살 연상인 사라와 사귀게 되고 쓰쿠루는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사라에게 들려준다. 사라는 쓰쿠루의 아픔 속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한 번 만나보는 것은 어떤지 제안한다. 쓰쿠루는 고민 끝에 용기를 내 친구들을 만나고 친구 한 명씩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과 비밀들을 알게 된다. 처음 만난 친구인 오우미에게 들은 이야기는 쓰쿠루가 16년 전 시로를 강간했다는 것, 시로의 말이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쓰쿠르를 버리게 된 것이라고. 그리고 시로는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누군가에 의해 목에 졸려 살인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쓰쿠루의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멤버 중 여자였던 구로를 만나기 위해 직접 핀란드까지 찾아가 구로가 말하는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친구들이 그러지 못했던 사연을 듣고 마음이 안쓰러웠다. 한때 서로가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여겼던 우정,  친구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구로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 역시 한때 어렸을 적 친구들과의 우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친구들 중에 유일하게 이름에 색채가 없었던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은 개성도 없고 친구들처럼 내밀 수 있는 재능 또한 없었기에 텅 빈 그릇처럼 자신을 깎아내린다. 그러면서 언젠가 친구들처럼 현재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라도 떠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땐 현재 대한민국의 청춘들 역시 자신들이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고 개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 있음에도 그저 빈 그릇만 담겨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빈 그릇이라도 아름다운 그릇이면 충분하다는 구로의 말을 들었을 땐 쓰쿠루와 나, 그리고 재능과 색채가 없다고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받을 수 있었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 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 p.51

 

나는 정말로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쓰쿠루는 그때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전해 여름, 친구 네 명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존재의 겉모습만은 겨우 유지되었지만 그마저 약 반년 사이에 크게 바뀌어 버렸다. 체형도 얼굴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이나 흐르는 물소리나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빛의 기운이나 계절의 꽃 색깔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 있는 것은, 이렇게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언 뜻 다자키 쓰쿠루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p.57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 넣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자기가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 - p.60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인데 섬세한 심상 풍경을 그리듯이 리스트를 치지요.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일반적으로 기교적이고 표층적이라는 평을 받아요. 물론 개중에는 기교 위주의 작품도 있지만 전체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내면에 독특한 깊이가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장식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어요. 특히 이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이 그래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에서 리스트를 올바르고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 p.80

 

요리사는 웨이터를 증오하고, 그 둘은 손님을 증오한다. 아널드 웨스커의 '부엌'이라는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자유를 뺴앗긴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그런 삶을 살기 싫어요.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육체를 벗어난다는 말과도 같아요. 자기 육체라는 한정된 우리를 벗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순수하게 논리를 비약시키는 거예요. 논리에 자연스러운 생명을 주는 거죠. 그것이 사고에서 자유의 핵심입니다. - p.83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예요. - p.85

 

분명 재능이란 건 때때로 유쾌하기도 해, 폼도 나고 남의 눈을 끌기도 하고 잘만 하면 돈이 되기도 해. 여자도 붙어. 그야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하지만 재능이란 말이야. 하이다, 육체와 의식의 강인한 집중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능을 발휘해. 뇌의 어느 부분에서 나사가 하나만 빠지거나, 아니면 육체의 어딘가 연결선 하나만 툭 끊어지면, 집중 같은 건 새벽 안개처럼 사라져 버려. 예를 들어 어금니 하나가 욱신거리기만 해도, 어깨가 심하게 결리기만 해도, 피아노는 제대로 칠 수가 없어. 사실이야. 난 실제로 그런 걸 체험했으니까. 고작 충치 하나 때문에, 뭉친 어깨 근육 때문에 모든 아름다운 비전과 울림이 확 사라져 버려. - p.104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 당하고 싶지 않을 것을 시각화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시각화하는 것이 어렵지 않는 것처럼,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 그 차이뿐이야. 단순한 방향성 문제에 지나지 않지. - p.225

 

기억을 감출 수는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어 - p.230

 

자, 여기 자네한테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하나씩 있어. 먼저 나쁜 뉴스, 지금 자네의 손톱 또는 발톱을 펜치로 뽑으려 한다. 안됐지만 이미 결정 난 일이다. 절대 뒤집을 수 없다. 그런 다음 나는 가방에서 아주 무섭게 생긴 커다란 펜치를 꺼내 보여 줘.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그놈을 보여주지. 그리고 말해. 다음은 좋은 뉴스란 손톱을 뽑을 건지 발톱을 뽑을 건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거야. 어느 쪽으로 할 텐가. 10초 내에 결정 해야 해. 만일 스스로 어느 한쪽을 정하지 못하면 손과 발 두 쪽을 다 뽑아 버릴 거야. 나는 펜치를 손에 든 채 10초를 카운터 해. '발로 하겠습니다.' 거의 8초가 지나서 그 친구가 말해. '좋아, 발로 정해졌어. 지금부터 이놈으로 자네 발톱을 뽑도록 하지, 그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 왜 손톱이 아니라 발톱을 선택했지?' 내가 물어봐, 상대는 이렇게 대답해. '모르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픈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니까 할 수 없이 발톱으로 한 겁니다.' 난 그 친구와 따스한 악수를 나누고 이렇게 말해. '진짜 인생에 온 걸 환영해.'라고, 웰컴 투 리얼 라이프 - p.246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게 있는 법이죠.  - p.308

 

누군가에게 떠밀린 건지, 아니면 제멋대로 떨어져 버린 건지, 그건 잘 몰라. 아무튼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나는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갑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봐. 배 위에서는 아무도, 승객도 선원도 내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몰라. 주위에는 붙잡을 것도 없어. 그때의 공포를 난 지금도 품고 있어. 자신의 존재가 느닷없이 부정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는 공포, 아마 그 때문에 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 - p.343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 p.363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나도 너도,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살아남은 인간으로서 질 수밖에 없는 책무가 있어. 그건,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거야. 설령 온갖 일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 - p.378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 p.381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 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p.388

 

세상에는 호감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아주 많다. 인생은 길고 때로는 가혹하다. 희생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무르고 쉽게 상처 입고 자르면 피가 흐르게 되어 있다. - p.434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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