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야를 넓혀서 생각하면 한제국이 성립된 후의 중국은 일정한 방식 아래 주변 여러 국가와 정치적 관계를 맺고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다. 이 세계를 동아시아 세계라고 부르는데, 지구상이 일체화되는, 즉 근대세계가 성립하기까지 지구상의 각지에 존재했던 여러 세계, 예를 들면 지중해 세계라든가 이슬람 세계라든가 유럽 세계 혹은 남아시아 세계와 나란히 하나의 세계였다.

이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며 그 특징은 한자문화권이라고도 부르듯이 중국문화를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가 중국문화권으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들어갈 주변 국가와 중국과의 사이에 일정한 형식을 가진 정치적 관계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한자의 전파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본래 한자란 중국말을 표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글자로, 글자 하나 하나는 중국어로서의 음과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언어가 다른 한반도나 일본에는 전파되기 어려운 문자였다. 그럼에도 한반도나 일본에 한자가 전파된 것은 당초에는 한국어나 일본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로서 채용된 것이 아니라 중국어 그 자체를 문자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정이란 당시의 상태에서 생각해 볼 때, 교역이라든가 중국문화의 이입 때문이 아니라 중국과의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로서 한자를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자로 된 외교문서를 해독하고 작성하는 일이 급했던 것이다. 한국 고대의 이두라든가 일본의 만요가나(萬葉仮名)와 같이 한자를 이용하여 그 민족의 언어를 표기한 것은 그 다음 단계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세계라는 역사적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는 우선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관계의 성립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정치적 관계의 성립은 바로 전한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외관계는 일정한 형식을 동반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역시 그 형식의 실제와 성격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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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진제국이라는 통일제국은 시황제의 천하통일에 의해 홀연히 출현한 것은 아니다. 춘추시대 후기 이후에 중국 사회의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군현제가 출현하여 전개되고 군주권의 강화와 관료제의 발전이 있었으며, 더욱이 그 밑바탕에는 지배층 및 피지배층 모두에 씨족제의 해체라고 하는 사회구조의 변용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동 속에서 새로운 정세에 재빨리 적응하여 진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 정책을 진행하였고 시황제의 천하통일은 마지막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하통일이 결코 쉽게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성장 과정은 극히 불행했고, 왕위계승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가 천하통일을 할 때 시행한, 위에서 말한 새로운 정책 입안에는 훌륭한 기획자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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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교양강의 - 사마천의 탁월한 통찰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1
한자오치 지음, 이인호 옮김 / 돌베개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진 제국 시황제가 천하일통을 이루기 전부터 한 제국 무제가 흉노를 친 후까지, 시대를 이끈 여러 인물을 평가함으로써 일찍이 그들을 이야기한 사마천과 『사기』를 다시 읽는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의 다루지 않아서 아쉽지만, 중국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중화사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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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라는 책의 성격에 관해 주목해야 할 점이 네 가지 있습니다.

첫째, 『사기』는 중국 최고의 역사책입니다. 『사기』는 『좌전』左傳의 탁월한 서사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그러므로 반고는 『사기』를 평하여 "글은 직설적이고 기록은 자세하며, 헛되게 찬미하지 않고, 잘못을 숨기지 않았다"며 실록實錄이라 결론지었습니다. 당나라 역사학자 유지기劉知幾는 『사기』를 가리켜 사마천의 사학史學, 사재史才, 사식史識이 십분 발휘된 저술이라고 칭찬했고, 중국 현대 문학의 태두 노신魯迅은 "역사가의 절창"史家之絶唱이라 극찬했습니다.

둘째, 『사기』는 중국 최고의 문학서 중 하나입니다. 본격적인 인물 전기의 효시가 되었고, 후세의 산문이나 소설 그리고 전기문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셋째, 『사기』는 백과사전처럼 그 이전의 문화를 집대성한 저작입니다. 『사기』는 문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중국 문화를 연구할 때 어느 분야를 전공하든 간에 『사기』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넷째, 『사기』는 사마천의 ‘일가지언‘一家之言, 말하자면 개인적인 저술입니다.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는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기』를 저술한 최대 목적은 사마천이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나 사상을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런 의도는 순황荀況이 『순자』를 저술한 것이나 동중서가 『춘추번로』를 저술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마천은 다만 역사의 형식을 빌려서 발표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 역사의 개념으로 『사기』를 읽으면 『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요컨대 사마천은 역사를 매개로 삼아 치국의 방략을 피력한 것입니다.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사기』를 쓴 것이 아닙니다. 『사기』에는 사마천의 입장과 관점이 담겼으며 삶과 처세의 문제에서도 사마천의 견해와 개성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기』를 읽는다는 것은 사마천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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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항우는 실패했습니다만 실패했어도 성공한 인물로 다가옵니다. 비록 죽었지만 독자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결국 유방은 승리했고 성공했지만 사마천의 인정과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위대한 역사가입니다. 비록 항우를 무척 동정하고 좋아했지만, 항우가 유방에 미치지 못한 점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 항우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백히 지적했습니다. 사마천은 유방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의 원대한 포부와 지략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사마천을 통해 항우가 결코 유방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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