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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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일제‘라고 불린 어느 황제의 음성으로 듣는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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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트다운 - 도쿄전력과 일본정부는 어떻게 일본을 침몰시켰는가
오시카 야스아키 지음, 한승동 옮김 / 양철북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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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로부터 어느덧 5년이 지났습니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았을 그날의 참사가 남긴 상처는 지금까지 아물지 않았습니다. 핵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성 물질이 후쿠시마 곳곳에 뿌려졌고, 사람들이 떠난 그곳에는 주인을 잃은 동물들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5년 전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되새겨야 합니다.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사히신문』 출신인 오시카 야스아키[大鹿靖明] 기자의 『멜트다운』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에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순간을 시작으로 약 반년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저밖에 모르는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를 맡은 도쿄전력은 사고가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재난이 닥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지진에 이어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쳐 외부 전력을 잃자 순식간에 혼란에 빠집니다. 전기가 끊겨 원자로를 식힐 냉각수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서 멜트다운(Meltdown), 즉 원자로의 노심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사고인 노심 용융이 발생할 위기에 놓입니다. 현장을 지키던 직원들이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일분일초가 다급한 그때 도쿄전력의 회장과 사장은 제자리에 없었습니다. 사고 당시 가쓰마타 쓰네히사[勝俣恒久] 회장과 시미즈 마사타카[清水正孝] 사장은 각각 중국과 지방에 가 있었습니다. 물론 가쓰마타 회장과 시미즈 사장은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별로 도움이 안 됐겠지만, 회사의 '머리'인 두 사람이 여행을 즐기느라 자리를 한꺼번에 비웠다는 사실에서 이들을 비롯한 도쿄전력 중역들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도쿄전력은 멜트다운 직전에도 바닷물을 원자로에 붓기를 망설였고, 심지어 이 사실을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발전소 건물이 잇따라 폭발하자 도쿄전력은 사고 수습은 뒷전으로 미루고 달아날 궁리부터 하였습니다. 도쿄전력이 현장의 정보를 숨긴다는 것을 뒤늦게 안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본사로 직접 찾아가 도쿄전력의 높으신 분들을 꾸짖지 않았다면, 이들은 정말 다 달아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쿄전력 사람들은 사고의 '피해자'인 자신들을 총리가 격려하기는커녕 질책하자 되레 총리에게 반감과 증오심을 품었습니다.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고밖에 할 말이 없으나, 이 뒤틀린 마음이 나중에 자기 발목을 잡을 줄은 간 총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총리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야 할 전문가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인 마다라메 하루키[班目春樹] 교수는 몇 번이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며 간 총리를 안심시켰지만, 마다라메 위원장의 말과 달리 폭발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본 한 관료가 저게 뭐냐고 마다라메 위원장에게 따지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습니다.


"그때 마다라메 위원장은,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의 기억에 따르면, (나중에 자주 보여줬지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우왓!"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잠시 머리를 감싸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후쿠야마 관방 부장관이 "이건 체르노빌 같은 사고인가요?" 하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자초지종을 목격한 시모무라 내각심의관에겐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것이 일본 원자력 최고 전문가의 모습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 현장(연합뉴스)



오히려 사고가 일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라기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답답한 상황이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이 부른 재앙에 가까웠습니다. 처참하면서도 황당한 일들을 몸소 겪으면서 간 총리는 일본을 바꿔야 한다고 마음먹습니다. 비록 간 총리는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하며 무능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3·11 이후 일본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반성한 몇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하마오카 핵 발전소의 가동을 멈췄고, 탈핵을 위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러나 간 총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존재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산업성은 핵 발전소 사고를 책임지는 관청이었지만, 거기에 속한 이들은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전력 회사들과 이해관계로 얽힌 경제산업성 관료들은 간 총리의 탈핵 노선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도쿄전력에 면벌부를 줘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에게 간 나오토는 자기들의 영역을 침해하려는 미운 총리일 뿐이었습니다. 간 총리는 조직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제산업성의 소장파 관료들을 등용하여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큰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와중에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인들은 권력 다툼에 정신을 빼앗겨 총리를 흔들었습니다.


간 총리를 더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가 해수 주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언론 보도였습니다. 이 보도는 거짓이었지만, 그와 관계없이 간 총리가 받은 타격은 컸습니다. 간을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오보 뒤에 전 총리이자 현 총리인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있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리고 앞뒤를 따져 볼 때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아베에게 거짓 정보를 흘린 이는 도쿄전력 관계자일 가능성이 컸습니다. 피해자 의식에서 헤어나올 줄 모르는 도쿄전력은 자기들을 가해자 취급하는 간 정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웠습니다. 적반하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뻔뻔하니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온갖 공작에 시달린 간 내각은 끝내 무너졌고, 그로부터 약 1년 뒤 정권은 아예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원자력촌(原子力村)'이라고 부르는 '핵 마피아'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셌습니다.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시카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체르노빌과 함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가져다 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책임을 진 사람은 관할관청인 경제산업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을 분리해 환경성으로 이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을 뿐, 그 다음에는 단 한 사람도 책임을 추궁당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순탄하게 출세하고, 세간의 잣대로 봐도 상당히 높은 퇴직금을 손에 쥐었으며 순조롭게 낙하산 인사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런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가스미가세키의 A급 성청인 경제산업성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간 정권은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지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본인들보다 더 낫기를 바라지만, 지난 역사에서 대형 사고를 처리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고사하고 소도 외양간도 모두 잃지는 않을지 불안했습니다.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뻔히 보고도 납품 비리를 버젓이 저지르는 이들이 핵 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감을 발휘해 그것을 해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3·11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해서 걱정스럽습니다. 『멜트다운』에 그려진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먼저 3·11을 당신들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우리나라이며,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여러모로 일본과 닮은꼴이 많은 나라도 우리나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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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민강좌 제1집
이기백 지음 / 일조각 / 198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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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한다고 선동하는 이들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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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파동
윤종영 지음 / 혜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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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런데도 학계가 그간 대응하지 않았던 것은 '1987년 트라우마' 때문이다. 당시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강단·재야학계 토론회가 열렸는데, 청중들은 강단사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모욕적인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이후 학계는 이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툭하면 내놓는 '공개토론하자'는 얘기는 '일단 불러낸 뒤 청중을 동원해 망신을 주겠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토론 참가 경험이 있는 한 학자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토론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을 해도 대답은 안하고 식민사학에 찌들었다는 소리만 반복하고 야유만 보내는 데 무슨 토론이 되겠냐"고 말했다."



2016년 3월 4일 자 『한국일보』 기사에 나오는 정신문화연구원(이하 정문연)의 토론회는 '한국 상고사의 제 문제'라는 주제로 1987년 2월 25일과 26일 이틀에 걸쳐 열렸습니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의 역사 담당 편수관으로 일한 윤종영 씨는 1999년에 쓴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정문연이 이 토론회를 연 까닭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정문연은 고대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고 재야 측의 기존 학계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자 양측 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학문적으로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이를 계획, 추진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임에 회의적이었다. 그래서 정문연 관계자를 만나 재야 측과 여러 차례 만나 대화해 본 경험으로 보아 정상적인 학술회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더욱이 이들에게 무조건 성원을 보내는 일반 청중이 다수 참여하는 장소에서는 진지한 학문적 토론이 불가능하니 원고만을 받아 논문집으로 내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청중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였다."


편수관이 되고서부터 유사 역사학 또는 사이비 역사학에 빠진 이들의 등쌀에 수없이 시달린 윤종영 씨는 이들과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으리라고 예감하고 이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정문연 원장이 행사 개최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데다가 이미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와 상당한 물밑 접촉을 한 뒤라서 토론회 일정을 바꿀 수 없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민족사 바로잡기국민회의는 유사 역사학자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이 모임의 의장이 윤보선 전 대통령이었고, 부의장이 당시 국회의원인 이종찬 씨였을 만큼 유력 정치인들도 다수 참여하였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일개 편수관인 윤종영 씨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덕일 씨의 선동으로 폐기된 동북아역사지도(뉴시스)



결국, 제날짜에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는 고고학과 고대사 두 분야로 나눠 주제 발표와 토론 순서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토론회를 보러 온 청중의 숫자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적어도 수백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윤종영 씨가 우려한 대로 토론회는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26일 대강당에서 열린 종합토론회는 손보기 교수가 사회를 보았는데 회의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고조된 회의 분위기 때문에 발표자와 토론자 가운데 일부가 자리를 뜨고 윤내현·이기동·임효재·임승국 등만이 자리를 지켰다. 재야 측과 이들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청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윤내현 교수, 임승국 씨, 손보기 교수 등은 재야 측의 지지를 받는 학자들이었고 모든 공격의 화살은 기존 학계 측의 학자로 외롭게 자리를 지키던 이기동 교수에게 쏟아졌다. 학자와 학자 사이의 토론이 아니고 방청객들과 단상에 있는 학자 사이에 질의 응답이 오갔다. 단군조선은 신화인가, 정말 존재한 왕조인가 하는 것이 그 초점이었다. 이기동 교수가 문헌사학의 입장에서 문헌의 신빙성 문제를 사료 비판적 차원에서 설명하자 설명을 계속해 나가지 못할 정도의 공격이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 문제로까지 번져 일제 식민사관을 들먹이면서 듣기 민망할 정도의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기존 역사학자들을 성토하려는 방청객들이 서로 발언하려고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고, 마이크를 얻지 못한 일부 방청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의 이 교수를 향해 고성을 지르고, 일부는 단상으로 몰려가고 난장판이었다. 이러한 속에서도 이기동 교수는 비교적 침착하게 단상에 앉아 자기의 뜻을 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자리를 계속 지키기가 면구스러워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 방에 설치되어 있는 스피커를 통해 발언 내용을 들으면서 이러한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걱정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회의장을 나왔다."


당시 서울대학교박물관의 관장인 임효재 교수는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에 그날의 분위기를 권투 경기에 빗대었습니다. 그 정도로 토론회는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는데(관련 글), 토론회를 취재한 『동아일보』 기사에는 청중이 내뱉은 말이 일부 나옵니다.




죄인을 조리돌리는 것도 아니고, 이기동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이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했을까요? 토론을 빙자한 사이비들의 시비 걸기에 역사학자들이 학을 뗄 만도 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정문연의 토론회가 끝나고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가 이와 같은 자리를 또 마련하면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참석하라고 학자들에게 통보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응한 학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편수관으로서 내키지 않는 자리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윤종영 씨는 또 고통을 받았습니다.


"회의 벽두에 사회자는 주최 측이 참석자들에 대한 사전 양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초청을 한 미숙한 준비에 대한 사과보다 불출석한 위원들의 무성의와 이번 회의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불출석 위원과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국민회의에 참여한 많은 사람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는 과거의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행정부의 관료를 불러 호통치는 식으로 학자들도 일방적으로 호출하면 나와야 되고 질책하는 소리를 조용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회자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가 거북하여 밖으로 나와 울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1987년 트라우마'라는 말이 결코 지나친 게 아닙니다. 다만 역사학자들이 이후 사이비들이 준동하는 것을 방관하다시피 하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은 결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지원하던 여러 사업이 좌초된 것은 또 다른 불행이었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 제2의 국사교과서 파동이라고 할 만한 사건까지 겹치면서 불행은 더욱 커졌습니다. 더는 트라우마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움츠러들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물론 그동안 사학계가 대중들과 접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만 꼽자면, 『한길역사강좌12 - 한국고대사론』은 문제의 정문연 토론회로부터 몇 달 뒤에 여러 학자가 일반인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었고, 1987년에 창간해서 2012년에 종간한 『한국사 시민강좌』도 학계의 성과를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나온 잡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대개 단발성으로 그쳤기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방법으로 사이비들과 맞서야 할 때입니다.

- 2016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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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개설 - 증보판
송환도웅 외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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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을 둘러싼 환호가 제국을 지키는 만리장성으로 바뀌기까지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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