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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척, 조선의 사냥꾼 - 호랑이와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구한 잊힌 영웅들
이희근 지음 / 따비 / 2016년 1월
평점 :
1866년 음력 10월 3일, 양력으로 11월 9일에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梁憲洙, 1816~1888)가 이끌던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쳤습니다. 낡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을 얕잡아 보던 프랑스군은 뜻밖에도 거센 저항에 부딪혔고, 이날 패배는 프랑스군이 한 달 가까이 점령하던 강화도에서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곧이어 한강 수로를 봉쇄하던 프랑스 함대도 강화 해협에서 물러나 사라졌습니다. 프랑스 군함 2척이 음력 8월 18일(양력 9월 26일)에 한강에 난데없이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인 때부터 헤아리면, 거의 두 달 동안 한성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린 병인양요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병인양요의 승패를 가른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중앙군인 경군(京軍)이 아니라 '향포(鄕砲)'라고 불린 지방 포수들이었습니다. 지방 포수 대다수는 평소 산에서 조총으로 범을 잡던 사냥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이(洋夷)'가 쳐들어오자, 조정의 명령으로 순무영(巡撫營) 선봉대가 주둔한 통진에 모였는데, 어떤 이는 강원도 춘천에서, 또 어떤 이는 경기도 여주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는 고을은 제가끔 달랐지만, 포수들은 순무영의 일원으로서 바다를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전투를 치렀습니다.

병인양요 이후 정족산성의 지형을 병풍에 그린 고지도(우리역사넷)
정족산성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전공을 기록한 보고서인 「정족산성접전사실(鼎足山城接戰事實)」을 보면, 양헌수가 군사를 나눠 남문에는 향포 161명, 동문에는 향포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경군 101명과 향포 56명을 배치했다는 내용이 눈에 띕니다. 전등사(傳燈寺)와 사고(史庫)가 자리한 골짜기를 둘러싼 정족산성에서 남문과 동문으로 오르는 길은 서문과 북문으로 오르는 길보다 덜 가파릅니다. 더욱이 그 길은 정족산성과 강화부성(강화산성)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놓인 도로와 이어졌기에 접근성도 좋았지요. 서문과 북문보다 남문과 동문 쪽으로 프랑스군이 진격해 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다시 말해 양헌수가 남문과 동문에 향포를 집중하여 배치한 것은 향포를 전방 부대로, 경군을 예비 부대로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양헌수가 예측한 대로 남문과 동문 일대에서 접전이 벌어지자, 일선에 선 포수들은 그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때 통역으로 프랑스군 정찰대를 따라간 리델(Félix Clair Ridel, 1830~1884) 신부는 친형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자신이 목격한 전투 현장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했습니다.
"문에서 100m도 안 되는 곳까지 이르고 전위는 문에 훨씬 더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긴 성벽 앞쪽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습니다. 총성은 뒤섞여 쉴 새 없이 울렸고 총탄이 사방에서 저희 말, 저희 머리 위에서 쌩쌩 날랐습니다. 머리를 돌려봤더니 거의 모두 땅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각자 숨을 수 있는 곳에 몸을 숨기고 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사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 『리델문서Ⅰ』에서
포수들은 마치 사냥감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듯이 프랑스군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인 100보 안에 들어올 때까지 참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적들이 성문에 접근한 순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조선군의 기습으로 서른 명이 넘는 프랑스군이 총상을 입었는데, 그 가운데 다섯 명이 장교였습니다. 4개 소대를 차출해 150명 규모로 편성한 정찰대에서 장교 여럿이 총에 맞아 쓰러졌으니, 작전을 지속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리델 신부는 친형에게 부상병들과 그들을 간호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싸울 수 있는 병사가 80명이 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습격을 당해 사상자가 발생했어도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앞세워 조선군을 격퇴한 문수산성 전투와 정반대로 불리한 전황에 빠진 셈이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찰대를 지휘한 올리비에(Olivier) 대령은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1882) 제독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조선의 포수들을 가리켜 "그들은 의심 없이 서울에서 파견된 가장 훌륭한 정규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포수들은 군인도 아니었고, 한성에서 온 것도 아니었으니, 올리비에 대령이 오해한 것이었지만, 그 정도로 포수들은 잘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양헌수가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 병졸들 대신에 지방 포수들을 전방에 내세운 까닭을 짐작해 볼 만합니다.
안타깝게도 19세기 무렵에 조선의 병력 동원 체제는 허물어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를테면 개성처럼 큰 고을에서 강화도를 돕겠다고 모은 군사가 겨우 200명 남짓할 뿐이었습니다. 군적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명부에 이름만 적힌 장정이 너무 많은 탓이었지요. 다른 고을들도 개성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허깨비나 다름없는 군적만 믿고 모이지 않을 군졸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포수들을 부르는 것이 더 빠른 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정이 전시에 사냥꾼들을 동원한 일은 병인양요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임병양란을 겪었을 때도 사냥꾼들은 전선에 나아가 활약했습니다. 목궁을 잡고 살을 먹이던 '산척(山尺)'에서, 조총을 쥐고 방아쇠를 당기는 '산행포수(山行砲手)'로, 시대에 따라 무기와 호칭은 바뀌었어도 사냥꾼들은 언제나 노련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대에 수어사(守禦使)를 지낸 조영국(趙榮國, 1698~1760)이 "급할 때 믿을 만한 것으로 산행포수만 한 자들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비록 병자년의 일로 말하더라도 유임(柳琳)의 김화 싸움은 오로지 청주의 3백 명 산행포수의 힘을 입은 것"이라고 평가한 일은 위정자들이 사냥꾼들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 줍니다.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에 고립된 임금이 끝내 버티지 못하고 청 황제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조선이 전략적으로 패배한 전쟁이었지만, 조영국이 언급한 김화 전투나 광교산 전투에서는 전술적으로 승리함으로써 포수들이 지닌 힘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조총 생산과 포수 양성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17세기 중반에 청과 제정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청이 조선에 포수 파병을 요청했을 만큼 조선 포수들은 뛰어난 사격술을 자랑했습니다. 또 19세기 전반에 중앙군이 보유한 조총은 4만 자루가 넘었는데, 마상총과 천보총 등 조총에서 파생한 화기까지 헤아리면, 그 두 배인 8만 자루를 훌쩍 넘겼습니다. 지방군이나 산행포수가 지닌 조총도 그 수가 적잖았을 테니, 조선은 화승총을 먼저 도입한 일본보다 더 많은 조총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면서 창고에 가득 쌓인 조총을 다뤄야 할 포수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인인 관포수(官砲手)들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병인양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헌수의 직속상관인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 1811~1878)는 음력 9월 18일(양력 10월 26일)에 도성으로 보내는 첩보에 보병 5초와 마병 3초로 구성된 출정군이 모두 조총을 잘 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듯싶어서 걱정스러운데, 총수(銃手)는 겨우 5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정보를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1등 포수 3백 명을 서둘러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용희의 첩보를 근거로 추정한다면, 군대 편성 단위의 하나인 '초(哨)'는 약 100명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순무영 선봉대 병력은 약 800명이고, 그 가운데 포수는 약 160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포수, 사수, 살수를 통틀어 이르는 삼수병(三手兵)에서 포수가 고갱이가 돼야 하는데, 조총을 다룰 줄 아는 군사가 3분의 1은커녕 그보다 훨씬 더 적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앙군에서 생긴 구멍을 메운 이들이 바로 지방에서 온 사포수(私砲手)인 산행포수들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조정은 전후에 이른바 포군(砲軍)을 늘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전국의 산행포수는 대거 정규군에 충원되었는데, 신미양요 직전 전국의 포군은 그 수가 무려 2만여 명이나 되었다. 물론 새로 확충된 포군 전체가 산행포수, 서양인의 표현에 따르면 호랑이 사냥꾼 출신은 아닐 테지만 핵심 전력이라고 단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테다. 그리하여 조선은 신미양요 때에는 전국의 산행포수를 별도로 차출하지 않은 채 확충된 포수만으로 미군의 침략에 대치하게 된다."
지금은 한반도에서 범이 멸종되었기에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에는 범이 궁궐에도 나타났을 만치 수두룩했고, 그만큼 많은 백성이 피해를 봤습니다. 어느 해에는 경기도에서 두세 달 동안 서른 명이 넘는 백성이 범에게 물려 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호환이 천연두, 전쟁과 함께 무서운 재앙으로 꼽힐 만했지요. 사람들이 ;악수(惡獸)'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던 존재인 범을 잡아야 했으니, 사냥꾼들이 군인들보다 더 뛰어난 전투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희근 선생이 쓴 『산척, 조선의 사냥꾼』은 조선의 생태 환경이 낳은 최고의 전사인 사냥꾼들에게 주목한 책입니다.

김준근이 그린 포수들의 모습(우리역사넷)
글쓴이는 산척과 산행포수를 범을 잡던 사냥꾼으로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평시에는 범에게서, 전시에는 외적에게서 백성을 지키던 영웅으로 그들을 되살려 냈습니다. 사냥꾼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쳐 독립 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고비마다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신분이 대개 높지 않은 탓에 오래도록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했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활동한 홍범도(洪範圖, 1868~1943)처럼 이름을 남긴 이도 드물었지만, 사냥꾼들이 역사에서 맡은 역할은 작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띕니다. 이를테면 글쓴이는 화승총을 가리켜 "장전하고 나서 불을 붙인 심지가 다 타야 발사되는데 그 시간이 꽤 소요됐다."라고 설명했는데, 불이 붙은 심지가 다 타야 탄환이 발사되는 것은 총통이지 화승총이 아닙니다. 불을 붙인 심지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면, 화승총에 방아쇠가 굳이 달아 놓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화승총은 미리 불을 댕긴 화승을 용두에 물린 채 포수가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가 내려가 화약 접시에 담긴 화약에 점화해 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습니다. 총통과 조총의 차이를 놓친다면, 산행포수들이 범과 맞서 싸우며 익힌 사격술의 의미가 반감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산행포수들은 방아쇠를 당겨야 할 때를 똑똑히 알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산척, 조선의 사냥꾼』이 지닌 가치는 작지 않습니다. 주변부에 있던 산척과 산행포수를 조선사의 중요한 행위자로 불러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호환에 시달리던 백성들, 활이나 총을 손에 쥐고 높은 산을 오르내리던 사냥꾼들의 삶을 떠올려 본다면, 조선사가 새롭게 보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