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에 대비된 비주류 문자의 이름이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한글‘은 독립의 의지를 일깨우는 이름이기도 했고 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문자‘라는 의미는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고, 상처 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치유하기 위해 ‘한글‘에는 ‘큰‘, ‘위대한‘, 또는 ‘유일한‘이라는 의미가 덧붙었다.

그만큼 한글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물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이 위기에 처할수록 이 위대한 증거물의 의미는 더 크고 풍부해졌다. 일제강점기에 한글 반포일을 기념해 한글날을 제정한 것은 그 증거물의 의미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글날은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우리말과 우리 정신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이 문자의 이름이면서 우리말의 이름이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한글을 지키는 것이 곧 우리말을 지키는 길이었던 상황에서 말과 글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도 우리는 한국어를 지칭하거나 우리가 쓰는 문자를 가리킬 때 한글이라는 말을 쓴다. 언어의 용법이 언어 사용자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때, 이는 단순한 혼동은 아닐 터이다.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의식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착종되어 있다.

이처럼 한글의 역사적 의미가 강조되고 그 의미가 확장되는 상황에서는 언어와 문자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언어 문제에 관한 논쟁의 저변에는 한글과 관련한 역사적 경험과 상처가 도사리고 있고, 역사적 경험과 상처의 기억은 언어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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